[이유리의 뮤지컬프리즘4] 배우라는 가혹한 훈장
[이유리의 뮤지컬프리즘4] 배우라는 가혹한 훈장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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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4.20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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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이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 많다. 애간장을 녹이는 엔드루 로이드 웨버의 음악, 아날로그적인 상상력으로도 극장을 단숨에 밀림의 정글로 만드는 ‘라이언 킹’의 스펙터클, 조나단 라슨의 ‘렌트’가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하는 재미, ‘스프링 어웨이크닝’은 주술적인 자극으로 우리를 흥분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큰 기쁨은 ‘지킬 엔 하이드’에서 만나는 배우 조승우다. 사실, 뮤지컬이 주는 즐거움 중에 으뜸은 작품 속의 인물을 잘 창조한 배우를 만나는 일일 것이다. 그런 배우를 발견하는 순간, 때로 무료한 일상에 물세례를 맞듯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김종욱찾기’의 엄기준, ‘쓰릴 미’의 김무열, ‘노트르담 드 파리’의 윤형렬,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의 임태경, ‘스위니 토드’의 홍광호, ‘마이 페어 레이디’의 임혜영, ‘대장금’의 강태을, ‘드림걸즈’의 차지연 등의 배우는 그렇게 신선하게 뮤지컬 시장에 입성했다. 또 관객뿐만 아니라 뮤지컬배우 마저 자극시킨 신예들도 있다. ‘페퍼민트’의 바다, ‘아이다’의 옥주현, ‘소나기’의 승리, ‘돈주앙’의 주지훈, ‘모차르트’의 김준수! 그들은 열거한 데뷔작에서 눈부셨는데, 그들이 계속 뮤지컬을 해줬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만든다.

 

배우(俳優)의 한자어는 아닐非에 인간人의 합성어이다. 원초적으로 풀이하자면 배우는 인간이 아니란 의미다. 한자어 非가 부정어이기에 거짓된 인간이란 의미로도 보이는데 굳이 빗댄다면 진짜 삶이 아닌 거짓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표현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어쨌든 인간과 다른 존재를 일컫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면 배우는 인간 이하일 수도 인간 이상일 수도 있는 존재라는 의미? 물론 무대 위에서의 삶이 그렇다. 맞는 말일 수도 있다. 배우는 때로 짐승만도 못한 인간으로 때로 신으로 관객을 설득하고 감동시켜야 하는 존재이니까.
참 특별한 존재다. 

 

 

나의 뮤지컬인생도 1986년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창단멤버로 또, 배우로 출발되었다. 첫 작품의 파트너가 배우 박지일씨였고 희곡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치밀하게 계산하는 그의 연기 스타일과 호흡이 잘 맞았다. 그러나 출연 작품 편수가 늘어날수록 난 내가 창조해야 하는 인물과 충돌하고 내 자아가 공감하지 않는 정서는 내 몸이 거부하는 비극적인 사태와 직면했다. 그리고 결단했다. 자의식이 강한 스스로를 배우라는 업으로부터 해방시켜 버렸다.
가끔 첫 연출가가 이윤택선생이 아니라 김광림선생이었다면 난 연극배우로 살고 있을 것이라고 농담을 하지만 그랬더라도 내 기질이 오히려 작가나 프로듀서에 맞는다는 것을 살면서 재확인한다.
그래서 곧잘 배우를 꿈꾸는 제자들에게 일침을 놓는다. “재능만으로 배우 못해. 배우의 업을 타고나야지!”

 

김태웅작가의 희곡 ‘이’에는 죽음을 맞는 광대의 마지막 한판 놀이가 장렬하게 등장한다. 무대 위에서 극치의 희열을 느끼는 순간, 그의 심장에 왕의 칼이 꽂힌다. 많은 배우들이 꿈꾸는 최후의 순간이다, 무대 위에서 마지막 호흡을 불사르는 건. 참 모진 업이다.
또 류보미르 시모비치의 희곡 ‘유랑극단 쇼팔로비치’에는 현실과 무대를 혼동하는 배우 필립이 등장한다. 그는 늘 연극 속의 대사로 절묘하게 동료 배우들을 곤경에 빠뜨리고 자신의 실존에 대해 의심한다. 그런 그가 연극의 상징인 나무칼을 높이 들고 현실인 듯 극 중 인물의 말을 외치다가 살인자로 지목되어 총살당한다.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인간의 허망한 죽음이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젊은 혁명가 세쿨라를 구한다. 그것이 배우의 업이 아닐까?
 

 


한 제자가 가장 배우다운 모습은 어떤 모습인가를 물었을 때 문득 노년의 백성희선생이 떠올랐다, 온화한 주름 속에 천진한 어린 계집애의 모습이 겹쳐있는 얼굴. 그런데 참 묘하게도 모든 노배우들의 얼굴에는 해탈한 듯 투명한 평화와 개구쟁이 악동 같은 천진성이 공존한다. 평생 현실 너머에서 다채로운 인생의 극단적인 단면을 표현하는 것이 삶이었기에 그렇게 해맑은 유아 성을 보존할 수 있었을 거다.
그래서 빈 그릇 같다. 그것도 질박한 흙을 빚어 만든 흰 도자기 같은. 그렇게 천진하게 비워져 있어야 언제든지 얼마든지 무엇이든지 담을 수 있을 테니까. 그 또한 업이 아니면 불가능한 기질이리라.

 

 

활동하는 뮤지컬배우 중에 평생 배우로 살 유형들이 보인다. 그들에게서는 특별한 아우라도 함께 보인다. 배우라는 축복받은 형벌이 그들에게 준 가혹한 훈장이다. 결코 거부할 수 없는 업.
배우 정선아에게는 하늘이 천부적인 재능과 자태를 주었고 배우 조승우에게는 그 천부적인 재능에 내면적인 성찰에 몰두할 기질과 환경을 더해 주었고 배우 서범석에게는 천부적인 재능 보다 더 강하게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근성을 주었다. 하늘이 선택한 배우들은 대체로 이 세 가지 유형에 속한다. 어떤 유형이든 특별한 운명을 부여받았음은 분명하다.

 

6년 전, 현장을 떠나 학교로 와서 뮤지컬과를 셋업한 후 모든 학생들을 합숙시키며 너희는 기적이야! 라는 황당한 최면과 하루 16시간의 수업과 공연 연습으로 중무장시키는 스파르타식 사관학교를 무모하리만치 집요하게 실천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배우의 업을 타고나지 못한 자일지라도 배우를 꿈꾼다면 배우다운 근성과 재능을 치열하게 훈련함으로서 그 업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도전 때문이다.

 

 

그렇게 배우의 업은 특별하고도 험난하다.

 

현실 너머를 바라보고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으며 끝없이 자신을 연마할 수밖에 없으며 다른 인생을 살기 위해 스스로의 인생은 비운 존재,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위로와 구원이 되지만 스스로는 현실의 칼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는 존재, 그리고 그 운명을 기꺼이 즐기는 존재인 배우의 삶은 우리에게 때로 자극이고 감흥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배우를 사랑한다.

 

더군다나 뮤지컬배우들의 삶은 더 하다. 춤, 노래, 연기의 전문성을 고루 갖춰야 하기에 매일 일정량의 신체훈련과 연습에 치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신을 사르는 그 불길이 무대 위에서 재로 승화되는 것이다. 구도이고 해탈일 수 있는 그들의 그 업이 관객들에게는 구원이며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배우에게 무대는 제단이며 마지막 목숨을 내거는 형장일 수 있다. 그리고 관객은 그런 모습으로 무대에 서 있는 배우를 알아보고 그를 만나러 일상의 문을 넘어 환상의 공간인 극장으로 들어선다. 자신의 귀한 시간과 돈을 바쳐서.

 

최근에 뮤지컬배우들의 자질론과 겹치기 출연으로 뮤지컬계가 시끄럽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진정한 뮤지컬배우!가 많다!
  


이유리(청강문화산업대학 뮤지컬과 학과장) yourikey@ck.ac.kr

<고품격 경제지=파이낸스 투데이> FnToday=Seoul,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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