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왜곡된 ‘이야기’, 끊임없는 기억의 재편집, 연극 ‘우릴 봤을까?’
[리뷰] 왜곡된 ‘이야기’, 끊임없는 기억의 재편집, 연극 ‘우릴 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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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5.13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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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 출근길, 헐레벌떡 뛰었지만 한 끝 차이로 놓친 버스는 점점 눈에서 멀어진다. 이런, 또 지각이다. 곧 후회를 한다. “신발 끈이 풀리지 않았다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만약 앞서 간 사람이 시간을 끌었다면...”까지 이른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상황이 달라질 수도 있었을까? 어쩌면 이것으로 우리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한 아이가 연을 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떤 한 여고생과 그녀의 아버지는 놀이터에서 아파트 8층 베란다를 바라본다. 그 곳엔 멍한 표정으로 연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그녀의 어머니가 있다. 부녀는 저 멀리 보이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참을 얘기했을까. 어딘가에서 ‘쿵’하는 소리가 들린다. 엄마가 아래로 추락했다.

 

여기 충격적인 모친의 죽음에 이어 전 연인의 죽음을 직면한 후, 그 죄책감으로 살아가는 정연이 있다. 모친의 사망 이후 아무 일도 않고 하루하루 술과 괴로움으로 세월을 보내는 그녀의 부친. 그녀는 그를 보면서 가슴 속의 상처를 묻었다. 이후 전 남자친구의 죽음은 그녀에게 슬픔을 넘어 집착이 된다. “만약...”이라는 후회는 정연이 과거를 놓지 못하게 만든다. 정연은 하나씩 기억을 더듬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 즉 단서를 찾는다. 때론 단서를 위해 과거 기억들을 재편집해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러니까 그 날은 말이죠. 바람이 불고 있었어요. 아니요. 비를 머금은 바람이었어요. 그럼요. 건조한 바람이 아니었다는 건 중요해요.”

 

과거는 늘 다르게 기억된다. 대부분 스스로가 생각하고 싶은 방향대로 기억되기 마련이다. 연극 ‘우릴 봤을까?’는 10대부터 30대까지의 정연을 통해 믿고 완전하다고만 생각해온 ‘기억’에 관해 반문한다. 현시대를 살면서도 과거와 미래에 의존하면서, 혹은 현재보다 더 신뢰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기억들은 과연 정확한 걸까? 혹 스스로가 재생산해 만들어낸 기억은 아닌가? 그렇게 해서라도 더욱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닐까? 

 

입체적으로 구성된 무대는 시간이 흐를수록 관객과 점점 가까워진다. 새롭게 생성된 무대가 기존 무대와 연결되고, 이에 따라 관객들의 몰입도는 깊고 진지해진다. 무대 위 병, 접시, 책 등 모든 소품들은 오브제로 되어 있다. 오브제는 정체성을 잃은 듯 형체만 존재하며 푸석푸석하고 쉽게 깨어지는 성질도 있다. 이는 현실 속에 살지만 생동감을 잃은, 불완전한 과거의 기억에만 집중하려는 정연을 반영한다. 이것은 마치 그녀가 말한 ‘마른바람’과도 상통한다.

 

“넌 계속 날 끌어들이고 있어. 그 망할 놈의 죄책감을 나한테 전염시키고 있는 거라고.” 

 

정연과 전 연인의 친구 민기의 말이다. 죽은 남자친구 집에 살기로 결정한 정연. 정연은 죽은 남자친구의 뺑소니 사고 당시 상황을 민기에게 캐내려 한다. 또 그 상황을 기억하려고 애쓰며 이것은 일종의 집착으로까지 나타난다. 그녀는 살아있을 때 그를 죽을 만큼 사랑하지도,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당시의 상황을 떠올리고 기억해 내는 일이 절박할 뿐이다. 그것은 정연이 현실을 살아가면서 과거의 기억을 포기하는 것, 그 후가 두려운 마음의 단상을 드러낸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연이 다시 찾은 친부의 집은 활력이 맴돈다. 수염을 기르고 허름한 옷차림으로 당체 기운이 하나도 없던 친부, 그가 깔끔한 모습으로 그녀를 맞는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준다고 누가 말했던가. 어느새 친부의 얼굴에 어둠의 그림자는 말끔히 씻겨나갔다.

 

“어느 날 베란다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그 아이가 너희 죽은 엄마를 쳐다보듯 나를 보고 있었어... 그 때 청소를 하기 시작했지.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게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 같았어.”

 

친부는 그녀에게 손수 차린 반찬을 입에 넣어주기도 한다. 가슴이 짠해지는 배우의 자연스런 연기에 몰입될 즈음 친부가 죽음을 앞두고 있음이 밝혀진다. 죽음 앞에 선 친부의 변화와 그 담담하고 차분한 목소리에 눈시울이 붉어진다.  

 

-“단지 연을 날리고 있었을 뿐인데...”

정연은 모친 사망 당시, 연을 날리던 소년, 지금은 건장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와 우연히 만난다. 연을 날리던 소년은 사건 이후 간접적 용의자라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정신병원에서의 생활까지 감수해야 했던 지난날을 고백한다. 이것은 정연에게 불완전한 기억이 또 다른 현실로 다가와 지난 과거를 마음속에서 털어내는 계기가 된다.

 

이것은 극에서 모래시계의 원리로 연출됐다. 과거의 증거물들, 즉 기억의 잔해들을 버려 이내 막혀버린 싱크대의 구멍에서 모래가 일정하게 바닥으로 쓸려 내려온다. 모래가 바닥에 모두 도달했을 때 그녀의 막혔던 감정의 실타래도 풀린다.

 

“그러니까 그 날은 말이죠. 바람이 불고 있었어요. 글쎄요. 어떤 바람이었는지 모르겠어요. 아니 알고 있다고 해도 정확하게 말할 순 없어요……가오리연이었는지 방패연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아요. 나는 거기 있었어요. 정확한 건 그것 밖에 없어요, 지금 내가 여기 있는 것처럼.”

 

정연의 엔딩에서의 에필로그다. 이는 의미심장했지만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없었던 첫 대사의 연장선이다. 연극 ‘우릴 봤을까?’는 퍼즐을 맞춰나가듯 치밀한 구성과 오브제라는 세련된 연출로 진솔하고 소박한 우리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배우들은 초미부터 말미까지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로 일관하며, 관객들의 공감과 감동을 동시에 자아낸다.

편집국 김미성 기자 newstage@hanmail.net

<고품격 경제지=파이낸스 투데이> FnToday=Seoul,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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