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요받는 것이 싫다. 어느 정도 나이가 차오르니 드는 생각이다. 초중고대학을 거치며 마음 한 쪽에는 이런 나름의 반항심도 생겼다. 그래서 연극 ‘순우삼촌’은 편하고 좋다. 부드럽게 타이르는 것도, 강하게 어필하는 것도 아니다. 대사의 공백도 많다. 그 때 관객은 대답이나 리액션을 떠올리지만 연극 ‘순우삼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순수하다. 느릴수록 멀리 간다고 했던가. 순우삼촌의 말은 답답할 정도로 느리지만, 씹으면 씹을수록 그 의미가 새롭고 감질나다.
순우삼촌은 70년대 바가지 머리에 순박한 얼굴과 서투른 말투로 여느 농촌 총각과 같은 모습이다. 배의 노를 깎는 그. 그 끝은 부드럽고 뭉뚝하다. “끝이 뾰족하면 강바닥이 아프잖어.” 이런 부드러운 마음도 지녔다. 그가 끔찍이 사랑하는 것은 그가 살아온 터전과 함께 더불어 살아온 가족, 그리고 자연이다. 우리 조상들이 그랬다. 물명의 이기속에서도 끝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문명에 흔들리지 않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이었다. 하지만 1970년대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문명의 발달과 함께 생계는 자연과 함께라기보다 내 집과 몸이 편한 것으로 둔갑했다. 개인주의 경향도 생겼다. 삶이 각박해졌다. 이제 순우삼촌네 대가족은 개발에 밀려 그 자리를 떠나야 하는 지도 모른다. 순우삼촌이 지키고 싶었던 것은 자존심이다. 이제껏 살아왔던 조상들의 뿌리와 자존감 말이다.
무대 위에는 나무사람이 항상 서 있다. 가끔 앉아 있기도 한다. 답답한 마음이거나, 외로움이 찾아 들 땐, 사람은 나무에게로 간다. 나무는 항상 그 자리다. 바뀌는 건 사람들뿐이다. 나무사람은 아무 말을 안 해도, 자체위로가 된다. 답답한 마음에 순우삼촌은 가끔 나무와 짧은 대화를 시도해본다. 나무사람은 말이 없다. 그래도 순우삼촌이 웃을 수 있는 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무 때문이다.
순우삼촌은 대가족을 이루고 산다. 그 중 지숙이라는 인물은 있는 듯 없는 듯 중요한 감초역할을 한다. 지숙의 순진무구함과 순박함, 티 없는 모습은 관객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지숙은 변화와 발전, 개발과는 전혀 관련 없다. 그저 함께하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다. 걱정도 근심도 그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을 미워할 줄 모르는 그녀는 전통을 지키려는 사상과 개발, 변화시키려는 강권세력를 모두 아우른다. 모두 마음에 품어간다. 하지만 이 갈등을 통해 무너지는 인간의 신뢰와 사랑이 그녀의 마음을 두드린다. ‘아아아아아!’ 그녀의 함성소리가 극장에 울러 퍼지며 관객에게 여운을 남긴다.
연극 ‘순우삼촌’에는 삶이 있다. 한 대가족의 삶이 담겨 푹 익었다. 정겹다. 개가 짓는 소리, 새 지저귀는 소리, 벌레우는 소리, 바람소리, 물 흐르는 소리가 수채화같은 풍경이다. 중간 중간에는 수묵화 같은 퍼포먼스도 볼 수 있다. 이 역시 조용하고 아름답다. 마지막 장면에서 대가족은 넋을 잃은 표정으로 평상에 앉았다. 묵묵한 가운데 개 짖는 소리와 새 소리는 더 크게 들린다. 넉넉한 인심의 말 많은 문자가 노래 한 자락 부르기 시작한다. “거짓말이야... 사랑도 웃음도 거짓말이야” 그녀의 간드러지는 트롯이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편집국 김미성 기자 newstag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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