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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1990-1995년도 동대문 시절 포함해서 현재까지 당시 프로축구 못 보신 분들 위해서 서울연고공동화정책 설명 해 드립니다.
 당시프로축구팬
 2015-05-20 13:39:14  |   조회: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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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부터 시작해서 1990년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프로축구 비롯 당시 우리나라 스포츠 상황을 직접 경험하지 않아서 그런건지 서울연고공동화정책에 대해서 잘못 이해하는 분들이 많아서 글 올립니다.

 
대략 1993년까지 서울 연고지 3개팀 일화, LG, 유공 / 지방 연고지 3개팀 부산 - 대우, 울산 - 현대, 포항 - 포철 6개팀이 운영되었는데 절반인 3개팀인 서울연고지 팀인 것에 대한 불균형 얘기가 나오기 했지만 1994년부터 전북 버팔로 시작으로 1995년 전북 다이노스, 전남 드래곤즈 이렇게 팀들이 창단 되어서 8개팀으로 확대되면서 이 문제도 해소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당시 프로축구가 인기가 없고 이런 인기 없는 요인이 대한민국 수도 연고지에 프로축구단이 3개팀이나 있기 때문에 그런것으로 그래서 3개팀을 모두 강제라도 이전시켜서 서울 연고팀들이 전부 없어져야 0가 되어야 프로축구인기가 올라갈 수 있다라는 서울연고공동화정책 명분이 과연 설득력이 있었던가? 그리고 실제 그 효과가 있었던건가?
 
이 질문 아무리 되새겨봐봐도 서울연고공동화정책은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최대 비극이자 병신짓이 맞습니다.
 
첫번째 - 당시 프로축구 인기가 정말 한번 뒤짚어야 할 만큼 개막장이었던건가?
 
1996년 서울연고공동화정책 시행 이전 1990-1995년 당시 프로축구가 축구에 관심없는 일반 국민들까지 끌어들이는 대중적인 인기가 없긴 없었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인 프로축구의 영원한 숙제이로 그래도 당시에도 동대문운동장에는 매주 주말 프로축구가 열리니  프로축구를 즐기는 고정팬 그리고 지방 부산, 포항, 울산도 역시 프로축구 고정팬들이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지금처럼 유니폼 입은 서포터스들만 없을뿐이지 연고의식 가진 팬들도 있었고 프로축구 자체를 즐기는 축구매니아들도 분명 있었던 시절로 1990년도부터 공식적으로 시행된 도시연고제를 발판으로 서울은 일화, LG, 유공 3개팀 / 부산은 대우, 울산은 현대, 포항은 포철 이렇게 지방팀들로 구성되어서 지역연고제를 시행하고 이로 인해 해당 지역 축구팬들과 연고지 구단간의 연고의식이란 맹아가 싹트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절대 당시 프로축구 열기는 갈아엎을 정도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우리 프로축구가 당시 가진 그릇에 맞게 인기가 있던 시기로 겉으로 눈으로 보기에 성장은 느리지만 그래도 조금씩 바닥을 다져가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솔까 프로축구가 국내 최고 인기스포츠가 되길 바라는 대다수 프로축구팬들과 마찬가지로 저 역시 당시 관중수나 전체적인 프로축구 인기가 저 역시 불만족스럽긴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도 K리그 클래식 하위팀, K리그 챌린지팀들  몇백명에서 몇천명 오고 존재감 없는 팀들 수두룩한것 보니 그 당시 프로축구 인기가 결코 적은 인기가 아닌란 생각인 많이 듭니다.
 
그런데 왜 당시 한국 축구계는 프로축구 인기를 너무나 비관적으로 바라보고 인기가 없으니 무슨 수를 써서 뒤짚어 엎더라도 개혁을 해야 하겠다고 생각을 했을까요?
 
가장 큰 이유는 월드컵 유치가 1996년 6월에 결정될 예정이었는데 가장 큰 약점으로 지목된것이
일본보다 국내 축구 열기 즉 프로축구 열기가 J리그보다 떨어진다는 것이었고...
 
그 다음 이유가 400만 이상 총관중수를 기록하며 1993년에서1995년 1차 전성기를 맞은 프로야구 인기와(참고로 1995년에는 프로야구 500만 관중 찍고 13년 후인 2008년에야 다시 500만 관중을 찍습니다.) 직접적으로 비교하면서 생긴건데 프로야구는 여기 파투에서도 많이 나왔지만 70년대 지역 명문고 고교야구부터 시작해서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이런 거점 대도시에 대기업 구단 만들어서 그대로 열기를 이어받은것으로 기반 자체가 프로축구 보다 훨씬 유리했던것으로 프로야구 보다 인기 뒤쳐지는것이 당연히 기분은 좃같지만 그렇다고 이게 당시 프로축구 인기를 비관적으로 바라볼 상황도 아니었습니다.
 
덧붙여 위에 서술한 프로야구 1차 전성기의 일등공신이 서울 연고팀인 LG 트윈스로 1993년부터 1995년까지 100만 관중을 찍었는데 축구계도 서울 연고팀들이 이런 LG 트윈스처럼 수도 서울에서 인기몰이를 해야 하는데 이걸 못 하고 있으니 아예 유명무실한팀처럼 비하했던것이지만 사실 LG 트윈스는 1982년 MBC 청룡부터 10년넘게 서울 연고지 정착을 해서 10년 후 1993년부터 포텐이 터진것고 서울 연고 3개팀 해 봤자 실제 서울 연고지 동대문에서 경기한거는 일화는 1989년 창단, LG는 1990년 충청도에서 서울로 이전, 유공은 1991년에 인천-경기에서 서울로 연고지 이전 전부 서울 연고지 정착한지 5년도 안 되었던 것으로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흡사 5살 애기 보고 중학생과 달리기 시켜놓고 중학생 만큼 뛰지 못 하니까 너는 운동 신경 없는 놈이니 앞으로 운동 쪽은 꿈도 꾸지 마라 이런식으로 말도 안 되는 섣부른 판단을 내린것과 감스빈다.
 
결론적으로 일본 J리그야 당시 일본 열도가 생긴 이래 처음으로 프로축구가 생긴거고 거기에 퇴물들이라도 거액으로 스타들 데려오고 이런 식으로 거품 인기가 있던 시절이었고
(따지고 보면 우리 프로축구도 1983년 슈퍼리그 출범 첫해에는 평관 2만에 육박할정도로 대박을 쳤었고 이렇게 J리그도 신장개업빨이었습니다)
 
프로야구에 비해 기반도 없고 스타트도 늦었으니 프로야구 보다 인기가 없는것이 어떻게 보면 당연한거로 J리그나 프로야구보다 인기 없는것을 인정하고 차근차근 정도를 걸었으면 되는데 이런 인기를 한 큐에 만회하고자 욕심 부리다 나온게 어처구니 없는 서울연고공동화 정책이죠.
 
어처구니가 없어도 너무 없다는것이 저 서울연고공동화정책 모델이 J리그인데 위에도 서술했지만 J리그 인기는 그냥 당시 신장개업빨과 퇴물 스타들 영향으로 도쿄에 연고지가 없어서가 아닌데 이렇게 당시 일본 프로축구 인기의 본질을 이해 못 하고 외형적인 현상만 보고 J리그처럼 지역명 쓰고 수도에 연고팀 없으면 흥행한다고  병신같이 벤치마킹을 하게 되면서 비극이 시작된겁니다.
 
당시 J리그에 만약에 도쿄 연고팀이 두개나 있어서 원래 J리그도 요미우리랑 미쓰비시가 도쿄 연고팀 원해서 충분히 만들수 있었고 첫해부터 도쿄 더비 만들수도 있었습니다. 만약 도쿄 더비가 있었으면 1993년에서 1995년 사이에 J리그 인기가 없었을까요? 아마 도쿄 공동화 시키고 운영하는것보다 더 인기가 있었을것이고 이랬다면 우리 축구계에서도 일본 J리그 인기 핵심은 도쿄 더비이다 그러니 우리도 서울 연고 3개팀을 활용해서 서울 더비를 활성화 하는것이 프로축구 인기 상승의 핵심이라고 판단하고 서울 연고 3개팀의 인기 올리기에 몰빵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되지만 결과는 아시다시피 서울 연고팀 완전 강제이전으로 모조리 없애는 것이었습니다.
 
 
두번째 -  서울 연고팀들이 전부 없어져야 프로축구 인기가 올라갈 수 있다라는 서울연고공동화정책 명분이 과연 설득력이 있었던가? 그리고 실제 그 효과가 있었던건가?
 
1993년까지 6개팀중에 절반이 서울 연고팀인 불균형은 1994년도부터 해소가 되기 시작했고 1995년에는 전북 다이노스와 전남 드래곤즈 창단으로 거의 문제가 없어졌습니다. 
 
사실 이 당시 가장 큰 문제는 서울에 3개팀이 집중된 것이 아니고 서울과 부산 이외에의 대도시 당시는 직할시라고도 불렀는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이런 거점 대도시에 프로축구단이 없던것이 큰 문제였고 지금 이들 대도시에 시민구단이 생기긴 했지만 역시나 이런 대도시에 강력한 대기업 구단을 만들지 못한것이 항상 발목을 잡고 있고 이것 역시 아직 풀지 못한 한국 프로축구의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연고공동화정책이 그나마 명분을 얻고 효과를 얻어낼려고 했으면 LG는 대전, 유공은 인천, 일화는 대구  이런 식으로 당시 거점 대도시로 연고지 배분이 되었다면 그나마 명분이 있었겠지만
서울 대신 결국 연고지 새로 정한 곳이 안양, 부천 이런 서울 위성 중소도시들에 천안이란 지방 중소도시였죠.
 
서울이란 대한민국 수도 빅마켓 연고지를 버리고 조명탑도 없는 경기장 보유한 안양, 천안 같은 중소도시에 부천은 아예 경기장도 없어서 2000년까지 서울 목동경기장 사용하는 코미디 같은 상황이 계속 연출되었고 이럴거면 동대문운동장과 목동운동장이라는 좋은 경기장 가진 서울 연고지를 구단들을 없앴는지 전혀 명분이 없었습니다.
 
거기에 서울 연고지팀들 없어지고 지방 중소도시들로 연고지 재편되고 연고제가 정착되고 연고의식 가진 팬들이 생기고 그래서 프로축구 인기가 올라간것처럼 효과가 있었던 것처럼 착각하시는 분들도 있는데 그 효과라는것이 서울 연고지팀들이 없어져서 생긴 것이 아니고 1996년부터 지역명 제도 도입 그리고 서포터즈 문화 도입 이런거와  맞물려서 그런것으로 서울 연고지팀들 유무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서울 연고지팀들이 그대로 있어서 서울LG, 서울일화, 서울유공이면 지역 구단명칭 효과가 없고 서포터즈 문화가 안 들어고 그런게 아니라는거죠.
 
그리고 서울연고공동화정책 이후 프로축구 인기가 확 올라갔던 시기도 1998년, 2002 월드컵과 맞물린 외부효과 때문이지 서울 연고팀들이 없고 중소도시 연고팀들이어서 프로축구 인기가 올라갔던게 아닙니다.
 
도리어 당시 회상해 보면 1998년, 2002 월드컵 때문에 전 국민적으로 프로축구 관심 고조되고
특히 서울 광화문에 몇십만명 응원인파 몰리고 정말 한국 프로축구 역사상 프로축구 팬덤이 가장 확대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고 또한 실제 많이 올라갔던 시기였지만 서울 연고팀이 없고 중소도시 위주 연고팀들만 있으면서 기대만큼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아쉬움이 더 큽니다.
 
이때 서울연고팀들이 없으니 올스타전 같은 이벤트 유치했는데 1998년 즈음에는 잠실주경기장이
거의 매진되었고 2002 월드컵 이후에는 서울월드컵경기장도 매진시키고 그랬는데 서울 연고팀이
계속 존재해서 매주 주말 프로축구가 열리고 그랬다면 당시에 지방 중소도시 위주였는데도
인기가 올라갔는데 최대 빅마켓인 서울 연고팀들이 존재했다면 그 효과는 더더욱 배가 되었겠죠.
 
 
결론적으로 지역명 도입, 서포터즈 문화 도입, 1998, 2002 월드컵 호재 이런 상황을 서울연고팀들이 존재한 상태에서 프로축구가 맞이했다면 더더욱 큰 효과를 볼수 있었을 천재일우의 기회를 
서울연고공동화정책이란 뻘짓으로 스스로 날려 버린건데 위와 같은 상황으로 조금 프로축구 인기 올라간걸 보고 서울연고공동화정책으로 서울 연고팀들이 없어서 프로축구 인기가 올라간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는것입니다.
 
 
 
 
 
 
 
 
 
 
 
 
 
 
 
 
 
 
 
 
 
2015-05-20 13:3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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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프로축구팬 2015-05-20 15:33:24
요약
1990-1995년도 프로축구 인기는 분명 월드컵 유치 경쟁국인 J리그와 경쟁 상대인 프로야구에 밀렸지만 완전 갈아없을 정도는 절대 아니었습니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서울 연고지팀들 역시 1983년도부터 서울 연고지팀이어서 10년 넘게 서울 연고지 있으면서 관중 동원 못 했던게 아니고 일화 1989년 서울 연고지 신생팀, LG는 1990년 충청에서 서울로 연고지 이전, 유공은 1991년부터 인천/경기에서 서울로 연고지 이전으로 3팀 모두 5년도 안 되는 서울 연고지팀으로 연고지 정착이란 씨 부리던 시기로 설사 인기가 없었어도 좀 더 인내심 가지고 지켜볼 단계였습니다.


그런데 신장개업빨과 돈빨로 퇴물 외국인 선수 데려와서 거품인기였던 J리그와 70년대부터 고교야구 그리고 1982년 출범후 지역감정 편승등로 인기 다진 프로야구에 직접적으로 비교하면서 너무 프로축구 인기를 과도하게 비관적으로 판단하면서 낮은 인기를 한방에 만회하고자 하는 과욕에 그것도 검증되지도 않은 J리그 인기가 도쿄 연고지에 구단이 없어서 인기가 있는 줄 알고 우리도 저렇게 해서 서울 연고지 없애고 J리그처럼 지방 중소도시 위주로 돌리면 인기가 생길 줄 아는 단세포적인 발상에 모티브를 얻고 여기에 김영삼의 지방자치화시대 정책과 맞물려 서울 연고지팀을 없애는 무리수 두는 개혁을 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결국 도리어 1990년대 후반 서포터스 문화 도입, 1998년, 2002년 월드컵 호재 등 프로축구 역사상 가장 팬덤을 확대할 천재일우의 기회를 대한민국 수도 최대 빅마켓 서울 연고지 구단 없이 맞으면서 날려버리는 뻘짓으로 귀결된겁니다

지나가다 2015-05-20 14:31:12
3줄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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