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예림이 만난 무용가 17] 나초 두아토 Nacho Duato
[김예림이 만난 무용가 17] 나초 두아토 Nacho Duato
  •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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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0.06.02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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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난 나초 두아토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18세에 무용을 시작해 런던의 램버트 학교, 브뤼셀에 있는 모리스 베자르의 무드라 학교에서 수학했고 뉴욕에 있는 앨빈 에일리 아메리칸 댄스 센터에서 훈련을 마쳤다. 1980년 스웨덴 스톡홀름의 쿨베리 발레단에서 무용수로서의 첫 데뷔 무대를 가진 그는 1년 후 지리 킬리안의 권유로 네덜란드 댄스 씨어터에 합류했다. 1987년 유럽 최고의 무용가에게 수여하는 VSCD의 Golden Dance Award를 수상하는 등 무용수로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안무에 있어서도 탁월함을 발휘하여 첫 안무작 <닫혀진 정원 (Jardi Tancat)>(1983년)의 성공 이 후 1988년 NDT의 상임 안무가로 임명되면서 ‘킬리안의 후계자’로서 유럽 무용계의 주목을 끌었다. 1990년 33세의 젊은 나이에 스페인 국립 무용단(CND)의 예술감독으로 취임한 두아토는 클래식 위주의 무용단을 컨템포러리 무용단으로 확장, 정체성을 확립하는 한편 고전 발레의 테크닉과 현대적인 감각을 조화시키며 CND를 세계 정상의 무용단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는 NDT와 CND 외에도 쿨베리 발레단, 도이치 오퍼 발레단, 슈투트가르트 발레단, 영국 로얄 발레단, 아메리칸 발레 씨어터 등과 같은 세계 유수의 무용단을 위해 작품을 안무하고 있다.

 

2007년 6월 연출가 토마스 판두르와의 협업으로 탄생된 <날개>에 직접 출연하고자 한국을 찾은 나초 두아토를 만나보았다. NDT의 역대 무용수가운데 최고라는 명성에 걸맞게 그는 50이 넘은 나이에도 여전히 멋진 무용수의 몸을 가지고 있었다. 넓은 어깨와 긴 팔 다리, 귀족적인 목선 등은 실루엣만으로도 그를 찾아낼 수 있을 만큼 탁월한 것이었다. 지난밤 에어컨을 너무 틀어 감기에 걸렸다며 손수건을 목에 두르고 나온 나초 두아토는 자신이 여전히 멋진지 확인받고 싶어 했는데, 인정하고 싶지(?) 않았건만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제스츄어가 “So Gay"같음에 적잔케 놀라고 말았다. 그러나 무슨 상관인가? 그는 지금도 최고의 무용수이고 뛰어난 음악성의 몇 안 되는 지적인 안무가인 것을! 살아생전 그의 춤을 눈앞에서 볼 수 있음에 감사하며, 매혹적인 에스파냐 억양으로 자신의 춤 이야기를 말하는 나초 두아토의 매력에 흠뻑 취했던 시간이었다.

 

(다음은 월간 <춤과 사람들> 2007년 7월호에 게재된 글의 일부이다.)

 

 

반갑습니다. 한국 방문이 처음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 이번에 세 번째 방문 입니다. 매번 잊지 못할 방문이었습니다. 첫 방문은 2002년 월드컵 스페인과 한국의 경기 때였는데 스페인의 패배가 아직도 씁쓸한 기억으로 남는군요. 두 번째 방문인 2004년에는 직접 출연하기로 되어있었으나 허리부상을 크게 당해 침대에 묶여있었어요. 정말 아쉬웠습니다. 이번 방문은 어떤 인상적인 기억으로 남을지 기대됩니다. 어제 인터넷 접속을 해보니 한국 팬들이 환영의 메일을 보내주었더군요. 신기하고 고마웠습니다.

 

열여덟, 늦은 나이에 춤을 시작하셨는데 춤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어땠나요?
-무용수는 타고나야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나는 무용수로 태어난 사람이라 생각합니다. 내가 어릴 적 춤을 추고 싶었을 때 스페인은 프랑코 총통시절로 오로지 문화라고는 축구와 투우만 인정되던 때였어요. 특히 춤은 여자들의 것이고 남자가 춤을 추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죠. 나는 적절한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춤의 기회가 왔을 때 스페인뿐 아니라 영국, 미국 등에서 춤을 배웠어요. 나는 무용을 하면서 포기한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오직 얻은 것들만 많을 뿐이죠.

 

이번 내한 공연의 프로그램 중에는 <카스트라티>라는 작품도 있던데 당신이 춤을 시작하던 때와 반대로 여성이 노래하는 것이 금기시 되던 때의 이야기인데 혹시 연관성이 있나요?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하지만 안무를 할 때 그런 연관성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춤을 시작하려던 때의 스페인은 남성의 춤이 이상하게 여겨지긴 했어도 금기시되던 시기는 아니었으니까요. 나는 영화 파리넬리에 나온 가수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당시 여자에게는 노래, 춤 뿐 아니라 교회 입장도 허용되지 않았어요. 9명의 남자무용수 만으로 작품을 만들었습니다.

 

이번 공연에 직접 출연하는데 지난 허리 부상에서는 완쾌되었나요?
-2004년 이후 충분한 회복시간이 있었습니다. 완쾌되었고 계속해서 공연도 해오고 있었습니다. 이번 출연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안무가로써 이 나이에 무용수역할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대에 설 수만 있다면 언제까지라도 기쁘게 설 것입니다.

 

이번 공연 <날개>를 통해 연출가와 협업을 시도했는데 서로의 영역을 구분 짓는 것이 가능했나요?
-누구든 함께 일하다 보면 의견 차이를 보게 됩니다. 하지만 연출을 맡은 토마스와는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냈고, 우리는 서로의 스타일을 좋아하고 있었어요. 우리는 충돌을 피해가려고 노력했고 아이디어를 공유했습니다. 이번 협업에 별 어려움이 없었던 이유는 작품<날개>에서 연출가와 안무자의 역할이 분명하게 정해진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연출가가 있었고 연극적 요소를 사용하지만 무용에 초점을 맞추기로 되어있었기 때문에 수월했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하고자 하지만 작업에 있어서 연극과 무용은 접근법이 달랐을 텐데 그 차이를 어떻게 극복했나요?
- 무용과 연극의 표현 방법이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이었어요. 대사를 하지 않아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연극이 될 수 있고, 몸을 움직이지 않고 대사만으로도 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어 천사 다미엘이 가만히 서서 대사를 읊는 장면이 있는데 그때 나는 내 입이 춤추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날개>의 후반부로 가면 무대 위에 물이 차는데 춤추기에 힘들지 않나요?
- 마지막 장면이죠. 기분 좋은 장면이에요. 무용수들도 감정적으로도 최고조에 다다르게 되고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표현하는 수단입니다. 무용수들은 물고기가 되어 춤추는 기분이 든다고 해요.  물위에서 추는 것이 어렵다기 보다는 오히려 자유롭습니다. 우리가 그 장면을 얼마나 즐기는가하면 막이 내린 후에도 분장실로 돌아가지 않고 물에서 계속 놀기를 멈추지 않아요.

 

특별히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를 선택한 이유가 있나요?
- 처음 그 영화를 선택한 것은 토마스였습니다. 그 후 영화를 춤으로 만들어보자고 하면서 떠올린 사람이 나였다고 하더군요. 천사의 고독과 인간이 되려는 모습이 나의 성격과 몸에 모두 맞아떨어진다고 생각했고, 무엇 보다 내가 천사의 날개처럼 긴 팔을 가진 점에 주저 없이 선택했다고 해요. 그는 내 팔이 긴 것에 대해 “천사의 날개인줄 알고 나초의 팔을 선택했는데 지금 보니 비행기 날개 같군.”이라며 놀리곤 합니다. 제의를 받고 다시 본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는 매우 시적인 영화였습니다. 그것이 나에게 와 닿아서 안무를 수락하게 되었어요.

 

앞으로의 작품 성향에 변화가 온 것인가요?
- <날개>는 특별한 안무작입니다. 나의 안무스타일에 있어서는 아주 예외적인 것이지요. 연극 연출가와 협업을 하기로 했기 때문에 연극적인 것을 고려했을 뿐입니다. 평소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나의 춤이 오로지 순수한 춤으로만 설명되는 것이 좋습니다. 올해 발표될 신작에서도 오직 춤으로만 표현할 것입니다.

 

좀 전에 언급한 올해 발표될 신작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떤 계획이 있습니까?
- 스페인 국립무용단은 저의 안무로 11월에 신작을 발표할 계획입니다. 7월에 안무를 들어가야 하니 얼마 남지 않았군요. 내용은 아직 공개할 수 없지만 까발리에와 알깔리에 등 <날개>에서 함께 작업한 음악가들과 함께할 계획입니다. 스페인 국립무용단에서 저는 매년 2개의 신작을 선보이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어요. 또 매년 3명의 외부 안무가를 초청하여 우리 무용수들과 작업하게 하는데, 올해에 초청될 안무가 중 지리 킬리안과 윌리엄 포사이드가 확정되어있고 나머지 한사람은 물색 중입니다.

 

당신의 안무에는 표현의 한계가 있습니까?
-내 생각에는 춤이 바로 현실입니다. 나의 춤은 내가 보고 듣고 세상을 느끼는 것들을 표현 합니다. 표현이 없는 춤은 의미가 없어요. 몸만 움직이는 춤은 나이트클럽에 가서 춰도 됩니다. 굳이 내가 안무하고 무용수와 고생스럽게 연습하여 공연하는 것은 관객에게 상상이라는 세계를 열어주고 내가 느낀 것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현실의 모든 일을 춤으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춤을 만드는 목적은 그러한 ‘표현’에 있습니다.

 

안무자가 직접 출연하게 되면 객석의 관점에서 작품 전체를 볼 수 없다는 불편함이 있을 텐데, 본인이 춤추는 동안 무대가 어떻게 그려지는지 보고 싶지 않나요?
-안무가로써 제일 힘든 점입니다. 그래서 연습 중에는 객석에서 무대를 보다가 안무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 내 자신을 끼워(?) 놓는 방식을 취하고 있어요.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을 이야기 하자면 나는 오랫동안 안무와 출연을 동시에 해왔기 때문에 뒤통수에도 눈이 생겨서 내가 춤추는 동안 등 뒤의 무용수가 틀리는 것도 잡아낼 수 있답니다. (웃음)

 

‘킬리안의 후계자’라는 수식어가 오랫동안 붙어 다녔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1981년 킬리안을 처음 만났고 그 후 9년 동안 네덜란드 댄스씨어터에서 그의 많은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그와 함께 춤춘 작품도 많았는데, 1983년 나의 첫 안무작을 선보일 때에도 그와 함께 출연했었습니다. 네덜란드 댄스씨어터에 있는 동안 나는 그를 위해 15개의 작품을 안무했어요. 함께한 시간이 많으니 나에게 킬리안의 후계자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을 이해합니다.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스페인에 돌아와 작업하면서 많은 시간이 지났고 현재엔 나만의 춤 언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스페인 태생이죠? 당신의 스페인적 요소가 춤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나요?
- 그 질문을 받고 보니 그런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내 말은 플라맹고나 투우 같은데서 영향을 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스페인의 ‘고독’이라고 말하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그러한 감성의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하고 싶군요. 그리고 음악적인 부분에서도 상당한 영향을 받았는데 지중해 민속음악들이 나에게 많은 영감을 주었어요.

 

긴 시간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 목감기에 걸려서 목에 손수건을 두르고 나왔는데 멋있게 보였으면 좋겠네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아쉽지만 즐거운 시간 이었습니다. 한국 관객들이 나의 공연을 즐기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글_김예림 무용평론가 (yelim1108@yahoo.co.kr)

<고품격 경제지=파이낸스 투데이> FnToday=Seoul,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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