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이병기 선생의 "가람 일기"를 읽었다. 북한산도 아닌 미아리 뒷산에 관해 흥미로운 부분을 발견했다.
*사진출처
신구문화사에서 1976년 문고본 "가람일기" 상권(1919년-1930년)과 하권(1931년-1963년)을 냈다. '가람일기"는 근대 일기문학 전체를 놓고 볼 때도 주목할만한 책이라 한다. 아직까지 양장본은 커녕 제대로 된 책을 찍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궁금하다.
이병기 선생은 취미도 그러하고 해서 여행과 등산을 즐겨 했다. 이지누의 "잃어버린 풍경 1"에는 '경성 근처에 이만한 산이 또 있을까' 라는 도봉산행기가 들어 있다. 당시 도봉산 산행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잘 보여주는 수작이다.
"가람일기"에도 등산 여행관련해서 짤막한 일기가 곳곳에 있다. 김교신 선생 또는 양정고보와 관련하여 등장하는 '무레사네'에 관한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된다. 1938년 1월 26일(수)에 쓴 일기는 당시 경성 주변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맑다. 미아리 뒷산으로 토끼 사냥을 가다.
몹시 춥다.
토끼 한마리를 잡고 점심식사후 2마리를 더 잡았다.
오후 5시에 돌아오다.
그는 미아리 뒷산에서 토끼잡이를 했다. 그곳이 어디쯤일까?
일제 당시에도 정릉과 정릉계곡 그리고 솔밭공원과 북한산은 유명했다. 이를 잘 아는 가람이 다만 '미아리 뒷산'이라고 한 건, 정말로 미아리 뒷산이어서일 것이다.
그시절 사대문 밖을 벗어나면 이정도였다. 노천명이 '이름없는 여인이 되어'에서 여우나는 산골이야기를 하면'이라 했는데 여기가 그기다.
산악계 원로인 김영도 선생님이 1960년대 우이동이 집을 짓고 살 때도 그러했다. '미아리 고개를 넘으면 집이 없고 공동묘지가 길게 이어졌다' --> 여기를
가람 선생의 이구절을 읽자 북한산이 새로워진다. 북한산이 지금보다 비할바 없이 넓었던 시절을 생각해본다.
산숙(山宿) - 산중음(山中吟)1
여인숙이라도 국숫집이다
메밀가루포대가 그득하니 쌓인 웃간을 들믄들믄 더웁기도하다
나는 낡은 국수분틀과 그즈런히 나가 누워서
구석에 데굴데굴하는 목침들을 베여보며
이 산골에 들어와서 이 목침들에 새까마니 때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 사람들의 얼굴과 생업(生業)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백석의 시 "산숙-산중음'이 떠오른다. '이 산골에 들어와서 목침들에 새까마니 를 올리고 간 사람들을 생각한다. 그사람들의 얼굴과 생업과 마음들을 생각해 본다.'
가람 이병기 선생의 이 구절을 읽자 북한산이 더 따뜻해지고 살가워졌다. 비스듬히 드러누워 미아리 고개 너머 온통 초록의 세상을 상상하니 얼굴에 웃음이 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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