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덕의 [등산의 재구성] (2)1950년대 중반, 지리산 vs 독도 어느쪽 가기가 어려웠을까요?
김진덕의 [등산의 재구성] (2)1950년대 중반, 지리산 vs 독도 어느쪽 가기가 어려웠을까요?
  • 김진덕 칼럼니스트
    김진덕 칼럼니스트
  • 승인 2018.12.18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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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중반 서울공대 산악부.

울릉도와 독도 원정을 가기 어려웠을까? 지리산 동계 등반이 어려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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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반도체의 전신은 '한국반도체'이고, 한국반도체 설립자 강기동은 서울공대에 입학하여 산악부에서 활동했다. 아래는 그가 얼마전 쓴 자서전 "강기동과 한국반도체"에 들어있는 당시 산악부 사진들과 글이다. 1950년대 등산계 편린들을 만날 수 있다.

그는 1934년  함흥에서 태어나 경기고를 졸업하고 서울대 공대에 입학했다. 5,60년대만 해도 서울대의 최고는 의대가 아니라 공대였다고 한다. 산업화를 설계하고 이끈 리더들로 가득하여 일일이 거론할 필요조차 없겠다. 산악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서울대 공대에 입학하여 당시 '인기'많았던 산악반에 입회한다. 책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서울공대 산악반은 워낙 관록이 있어 많은 활동을 했다. 전기과의 김형실이 산악반 반장이었고 나를 포함헤서 문희성 이동호 김동주 모두가 산악반의 활발한 멤버였다.

횡계리 최진봉씨댁이라고 하고 있는데, 이들 뒤에 방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바깥을 내다보며 서있는 가족들이 눈에 띤다.

주말이면 서울 주변의 산에 올랐고, 겨울에는 동기 등반도 하고 스키타러 대관령에도 갔다. 한국스키연맹 제1회 대회에 정명식 대장의 인솔로 선수로 나간 기억이 난다.

한가운데에 파이프를 물고 한참 멋을 부리는 이는 2년 선배로 정명식 '대장'이다. 정명식은  다시 대장직을 맡아 여름 태백산을 타고 평창, 정선을 거쳐 강릉으로 넘어가기도 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는 포철 회장을 맡았고, 한국산악회 회장을 역임했다.

참고로 네이버 뉴스라이버러리에 의하면. 한국스키연맹이 아니라 대학스키연맹이고, 대회의 정식명칭은 1955년  제1회 전국학생대통령친서기(親書旗)쟁탈대회로 보인다.

서울공대 산악반의 울릉도와 독도 원정도 했다. 당시 산악부는 프롤레타리아의 유희가 아니라는 걸 다시 알 수 있다.

강기봉은 사진과 글에서 산악'부'라고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산악'반'이라고 자칭한다. '부(部)'는 영어의 '클럽Club'의 번역어로서 시민들의 자유로운 모임체를 의미한다. 그러나 '반'이라는 호칭은 그러하지 않다. 일본이 태평양전쟁에 돌입하면서 준전시조직으로 학교의 클럽을 재편하며 이름을 '반'으로 바꾼다.

1950년대 그들은 저간의 이런 맥락을 모르고 있었기에 관행적으로 '반'으로 불렀을 것이다. 참고로, 유신정권이 마지막 발호하던 1970년대 후반, 대학산악부를 '반'으로 강제개명한적이 있다. 당시 통치세력이 1930년대 말 청춘 시절의 잔존 기억이 있어서 그러했을 것이다.

          * 1947년 8월 20일 독도에 상륙한 해안경비대 대원들과 한국산악회 회원들 /김정태 소장자료.

여기서 잠간, 당시 울릉도 독도 원정이 쉬웠을까? 지리산 동계 등반이 어려웠을까?

지금 우리 추측과는 정반대로 지리산이 어려웠다.

당시 국토 '규명' 작업은 군관민의 절대적인 협조가 있었다. 1955년 서울대 문리대 산악부가 설악산 천불동 초등을 할때는 3군단장이 환영식을 열어 주었다. 울릉도 독도 역시 해군이 허락하고 전세 함정을 내어 주어야 비로소 가능했을 것이다.

지리산은? 

기차야 전라선이 뻥 뚤려 있어 누구나 산입구까지 갈 수 있지만, 빨치산 전투가 아직 종결되지 않았던 상황이라는 거... 치안이 불안했다는 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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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1956년 1월 지리산 동계 종주를 시도한다.

              원 사진설명 왼쪽부터 문희성. 성명미상. 지리산 경찰대장. 김형실 강기동

 

우리는 공대 산악반 행사로 지리산 등반을 하기로 하고, 특별 이동무선국 운영을 계획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지리산은 빨치산 소굴이었다. 우리의 등반은 정부가 지리산에 치안이 확보된 것을 홍보하는 좋은 기회도 될터였다.

지리산 지구 경찰에 협조 공문도 보냈다. 지리산 베이스 캠프에 도착하자 지리산 지구 전투경찰대 대장이 우리를 마중해 주었다....

사진 맨 좌측의 문희성은 후에 대우 엔지니어링 회장직을 맡았다. 산악계에서도 역시 한국산악회 회장직을 맡는다.
 

LG의 구자경회장에 이어 이숭녕 박사가 한국산악회 회장을 맡았다. 이어 정명식. 문희성. 그리고 남정현(1939년생) 모두 경기고, 서울공대 출신 계보의 산악회 회장들이었다.

지리산 등반계획은 한국아마추어 무선연맹 창립(KARL 1955년 4월 20일) 전에 시작했으나, 실제 등반은 거의 일년 후인 1956년 1월에 이루어졌다.

당시 이런 무선활동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나 보다. 강기동은 이때부터의 관심으로 모토롤라 반도체를 맡았다가 이어 한국반도체를 세우게 된다.

참 이쁜 사진. 이 사찰이 어디일까? 얼굴이 아직 깨끗한 걸 보니 구례 화엄사 혹은 천은사가 될 것 같은데...

1956년 그들은 천왕봉에서 무엇을 했을까?

2년뒤 서울대 공대 산악부는 다시 지리산 종주를 하고 좌측사진처럼 단체사진을 찍는다. 그 뒤의 돌탑은 무엇일까? 역시 경기고 서울공대 후배이고 후에 한국산악회 부회장직을 맡았던 서립규는 1958년 원정기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몇개의 케른이 보인다. 우리도 등정을 기념하는 케른을 쌓았다금년 들어서는 마산 산악회가 지나간 것과 며칠 전 3명이 왔다간 흔적이 보인다. 우리 공대 6명은 1956년 1월 공대 동계등반대가 세운 케른 앞에서 기념 촬영을 했다.

그러니까 1956년 팀은 그 혹한에서도 좌측에서처럼 멋있는 케른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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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여)

경기고 3학년 시절 전쟁 중의 천막학교에서 찍은 사진. 맨 좌측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정치인 이회창이 있다.

 

     원 사진설명: 공대 옥상에서 서정욱과 함께(1954년경)

저 뒤의 산은 물론 불암산이다. 불암산 아래에 있어 공대 회보 명칭도 불암산이라고 하고 있다. 당시 공릉에 있던 서울공대는 지금 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되어 있다. 지금은 아파트로 들이닥쳐 불암산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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