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게시판
[컬럼] 혼자서 축구장 가기 그리고 혼자서 일본 라멘 먹기 (1부)
 빅버드 일기
 2010-05-14 14:57:41  |   조회: 15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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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처음에 연재 시작하던 당시의 그림이라, 지금에 비해 그림이 거칠고 조금 성의 없어 보이는 점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연재하는 김에, 그림도 다시 그려볼까 생각중입니다.)

한국의 피버피치(Fever Pitch)를 꿈꾼다, 빅버드 일기(Bigbird Diary)
http://blog.naver.com/udong80



2002년 10월 30일
수원 vs 부천


축구를 좋아하는 나이지만 한가지 꺼려지는 게 있다. 바로 아무도 동반하지 않고 축구장에 혼자 가는 일이다. 물론, 법적으로나 윤리적으로나 축구장 혼자 간다고 문제 될 것도 없다. 대학로에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일본라멘 집이 있는데, 예전 일본 여행을 갔을 때 맛보던 본토의 라멘 맛과 너무나 닮아 있어서 (실제로도 일본인 주방장이 라멘의 핵심인 국물을 우려내고 있다.) 일하다가도 점심 때 가서 먹거나 주말에 가기도 했지만, 역시 우리 나라 문화에서 아직 혼자 음식점에 들어가서 외식을 한다는 건 여전히 낯설다. 일본에 휴가를 갔을 때는 너무나 그런 것이 당연하게 생각되서 놀란 적이 있다. 한 가게의 테이블의 8할 정도는 혼자 와서 먹는 사람들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것이 더 합리적인 것도 같다.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자기 돈 내고 먹으러 가는 건데 다른 사람 눈치를 왜 봐야 하는가? 설사 다른 사람들이 한 번 흘겨본다 하더라도 그건 순간일 뿐, 맛있는 음식을 먹다보면 자연히 상쇄되곤 한다.

어쨋든 나 뿐 아니라, 축구를 좋아한다고 자부하는 많은 축구팬들 역시 혼자서 축구장에 가는 것은 약간 터부시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가끔씩 빅버드 (수원 월드컵 경기장) 2층의 텅 빈 좌석 한 가운데에 혼자 앉아서 마치 신선처럼 축구를 보는 아저씨들을 보면 멋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축구팬 중에는 유독 마이너리티들이 많다고 한다. 리버풀이 그렇고 보카 주니어스가 그렇고.. 유독 서민층들이나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엔 명문 축구팀들이 많이 위치한다. 그런 마이너리티들이 혼자 축구장에 와서 고독을 씹으며 축구를 보는 것... '너희 같은 범인들 따위는 상관하지 않겠다'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지금도 그렇고 예전도 그렇고 내가 직접 축구장에 갈 때는 대개는 나의 절친한 친구이자 극렬 수원 써포터라고 자부하는 요시노부와 함께 할 때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2002년에는 상황이 달랐다. 월드컵 4강이라는 태풍이 한 번 쓸고 가고, 미디어에서는 마치 전국민이 축구팬이 된 것처럼 떠들어대고 있었지만, 내가 만나본 주위의 사람들은 '길거리 응원'에 관심은 있어도 정작 '축구' 자체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월드컵 기간 동안 모든 길거리 응원에 참여했다고 자부하던 누나가 있었는데, 나중에 "축구장에 같이 가볼래요?"라고 물어보자

"나는 대한민국을 응원한 거지 축구를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다."

라고 말한 적 있다. 나는 이 말이야말로 우리 사회의 축구 문화의 슬픈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월드컵 이후 CU @ K리그로 대표되는 k리그 열풍도 얼마 오래가지 못할 것임을 직감했고, 그것은 슬프게도 사실로 나타났다.

2002년 월드컵 직후7, 8월의 빅버드는 사람들로 차고 넘쳐났다. 3만명의 관중은 기본이었고 수원 vs 부산 전은 송종국이라는 부산의 스타 (지금은 수원에서 뛰고 있으며 현재 팀의 부진으로 인해 삭발을 하고 그라운드를 누비고 있다.)의 영향으로 4만 관중까지 달성을 했었다. k리그는 월드컵을 계기로 부흥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잡았고, 프로야구를 밀어내고 대한민국 최고의 프로 스포츠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역을 연고로 하는 매니아 위주의 클럽 축구를, 월드컵과 대한민국만 아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기에는 시기가 너무 성글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원의 경기에서도 대한민국 구호를 외쳤고, 붉은 악마 티를 입은 채 수원 경기를 보는 사람들은 부지기수였다. 수원이 골을 넣건, 원정팀이 골을 넣건 사람들은 환호를 질렀고, 아무나 이겨라 식의 정체성 없는 관중들은 프로축구에 금방 질려버렸다. 그 사람들은 월드컵에 비해 프로축구가 재미없다고 느꼈겠지만, 응원하는 팀이 없을 경우 월드컵 경기 역시 재미 없을 수 있다는 것은 모르는 듯 했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2002년 9월에 가자 프로축구의 상황은 비참해졌다. 경기장은 예전처럼 텅 빈 채로 써포터들만이 을씨년스러운 구장들을 다시 굳게 지키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한창 대학교와 기숙사를 오가며 일상 생활을 하던 중이었다. 날씨는 추워지고, 그렇다고 만날 연인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공부에 불을 붙이기에는 시험기간이 너무나 많이 남아 있었다. 수원 경기가 보고 싶어 대학 동기들에게 축구장에 가자고 말을 붙여도 대부분은 싫다고 했으며, 설사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들도 경기가 수원에서 열린다는 말을 듣고는 질려 버려서 미안하다고 말하기 일쑤였다.

그냥 포기해 버릴까 하고 생각하는 도중 기숙사 벽에 붙여 놓은 수원 선수의 포스터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 했다.

'그러고도 너가 수원 팬이라고 자부할 수 있나?'

결국, 나는 축구장에 혼자 가기로 결정했다. 그런 결정을 하고 나니 의외로 마음이 덤덤해지더니 다음에는 역시나 설레이기 시작했다. 그래 혼자 가보는 거다.

사실 빅버드 N석 (써포터석)에서 축구를 보다 보면 혼자 배낭을 짊어지고 축구를 보러 와서 경기가 끝나자마자 후다닥 사라지는 사람들을 보는 것도 드문 일은 아니다. 나 역시 오늘 그런 스타일리쉬한 팬이 되보는 거다. 나는 사당에 가서 수원행 버스를 탔다. 날씨는 춥고 하늘은 흐렸다. 수요일 오후, 일과에 지친 사람들이 수원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버스는 그렇게 나를 빅버드로 실어나르고 있었다.
2010-05-14 14:57: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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