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욱 소설게시판
Memories... <제 16 회>
 JUP STORY
 2009-01-21 22:45:38  |   조회: 24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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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은 집에 도착해 부랴부랴 샤워를 마쳤다. 침대 옆에 놓인 탁상시계를 보니 어느덧 자정을 훨씬 넘기고 있었다. 온수로 샤워를 해서 그런지 술기운이 다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몸이 가뿐했다. 그래도 늦은 시간이라 몰려오는 고단함에 저절로 하품이 나왔다.

그녀는 침대에 올라와 앉더니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비벼대는데 별안간 현욱과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계단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당연히 실수로 살짝이나마 현욱의 품에 안겼다지만 민망한 기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게다가 혜린이 남자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가가려는 현욱을 만류하는 것도 이제야 생각해보면 사실상 주제넘은 짓이었다. 아무리 선·후배 사이라지만 현욱이 그러든 말든 그건 그의 사생활인 뿐이고 그의 감정이자 의지일 뿐인데 도대체 무슨 자격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도통 자신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한 숨만 나왔다.

술을 많이 마신 것도 아니니 술주정은 아닐 테고 그렇다면 혜린이 남자친구가 있다는 사실로 인해 애석해하는 현욱을 향한 단순한 동정심일까? 아니면 사랑?

미란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처구니없는지 바로 헛웃음을 쳤다. 그럴 리가 없다며 혼자 계속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그런 부정은 오히려 살짝이나마 현욱의 품에 안긴 자신의 모습을 다시 상기시킬 뿐이었다. 그토록 밀려왔던 나른함은 잠시 물러나고 묘한 설렘이 그녀의 가슴을 두근대게 했다.

미란은 혼란스러운 나머지 침대에 엎드려 커다란 베개에 얼굴을 묻고는 주문을 외듯 중얼거렸다.

“하미란! 너 정말 미쳤어! 미친 거야! 미치지 않고선 이럴 수는 없어! 그래, 이게 다 그 놈의 술 때문이야! 난 지금 취한 거야! 그래, 사람이 취하면 뭐,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 수도 있지! 그래, 그런 거야!”

이때 휴대폰이 드르륵거리며 진동했다. 움찔거리며 슬며시 확인하자 학과 동기인 박우종의 전화였다. 요즘 들어 자주 전화해서는 시시껄렁한 얘기나 늘어놓기에 달갑지 않았는데 이 늦은 시간에 전화라니… 게다가 지금의 심난한 마음으로는 더욱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러더니 잠시 후, 그에게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자는가 보네? 그보다 란! 주말에 뭐해? 심심한데 같이 영화나 보자! 확인하면 콜미~♡」

바로 거절의 문자를 보낼까 했지만, 생각해 보니 전화도 안받았는데 이렇게 바로 답장을 보내는 것도 우습기도 하고 귀찮았다. 휴대폰을 내려놓는 순간 다시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또 우종의 것이라 생각해 탐탐치 않게 확인했지만 현욱의 문자메시지였다.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앉을 정도로 놀란 가슴으로 문자메시지를 확인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전화는 못하겠고 집에 잘 들어갔지? 주말 잘 보내고... 항상 고마워!^_~」

다시 두근대는 가슴을 부여안고 쓰러지듯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워 중얼거렸다.

“하미란! 너 도대체 어쩌자고 이러는 거니?”



중간고사 기간도 끝나고 더없이 포근해진 날씨에 캠퍼스 분위기는 확연히 여유롭고 활발해졌다. 사회과학관에도 이전처럼 오고가는 학생들의 표정엔 활기가 넘치는 가운데 현욱은 영섭과 함께 막 수업을 마치고 로비로 내려왔다.

그런데 로비 한쪽 벽면에 설치된 게시판에 몇몇 학생들이 모여 있는 모습이 영섭의 눈에 들어왔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모여 있는 사람들 사이로 비집고 들어가자 대자보에 알록달록한 색깔과 아기자기한 글씨체로 MT에 관한 일정과 내용들이 적혀있었다.

뒤늦게 온 현욱도 대자보를 봤지만 그다지 관심 없어 보였다. 반면 영섭은 한껏 부풀어 오른 기대감으로 말했다.

“작년보다는 더 재밌겠는 걸. 이번엔 너도 가자!”
“싫어, 귀찮아!”

현욱은 딱 잘라 말하곤 발길을 돌렸다. 영섭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으며 종알댔다.

“짜식, 또 튕기긴! 그러지 말고 이번엔 가자! 이번 아니면 언제 너랑 놀러 가겠어? 그리고 명색이 대학생인데 재학시절에 한번쯤은 MT 정도는 가야한다는 센스도 몰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이번 학기 끝나면 이 몸이 군대 가는데 그 전에 찐한 추억이라도 만들어줘야 네가 나의 진정한 친구라 하지 않겠니? 또 이참에 가서 후배들이랑 두루두루 잘 지내면 얼마나 좋아? 너에 대한 소문도 확실히 해명하고 말이야!”

현욱은 갑자기 걸음을 거두고 꺼림칙하게 쳐다봤다.

“소문?”
“그래, 임마! 네가 딴 후배들하고는 거의 생까다시피 지내면서 유독 미란이하고는 찰떡같이 잘 붙어 다니는데 둘이 사귄다는 소문이 안돌겠니?”
“정말 어처구니없네. 그리고 내가 무슨 연예인도 아니고 그러다 말겠지, 뭐. 그보다 오늘 여자친구가 찾아온다고 하지 않았어?”

영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말인데 심심하니깐 여자친구 올 때까지 좀 기다려줘라. 잠깐 만나서 서로 인사라도 나누는 것도 좋잖아.”

그의 부축임에도 현욱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것도 좋지만, 사양할게. 나 먼저 갈 테니깐 여자친구랑 데이트 잘하고 내일 보자.”

현욱은 홱 돌아서 유리문을 열고 학과 건물에서 나왔다. 마침 학과 주차장에 있는 승용차들 사이로 미란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와 마주하며 간절한 표정으로 주절대는 우종의 모습도 보였다.

좀 전의 영섭이 말한 헛소문이 신경 쓰이기도 했지만, 개운치 않은 그녀의 표정으로 말미암아 괜히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행여 방해가 될까 발길을 돌릴 찰나였다. 그때 우종이 그의 인기척을 느꼈는지 좀 전의 표정과는 달리 금세 밝은 얼굴로 말했다.

“선배! 집에 가는 길이에요?”

자연스레 미란이 고개를 돌렸다. 예상치 못한 현욱의 출현에 흠칫거렸다. 이때 미란의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잠시 잠깐 순간적인 감정일 줄 알았다. 그래서 일부러 한동안 마주치지 않다보니 괜찮은 줄 알았는데 다시 두근대는 이 마음은 도대체 무엇인지… 제발 사랑은 아니길. 그저 한 순간의 감정이길. 그토록 간절히 바랬는데 여전히 두근대는 가슴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정말 사랑일까? 지금은 그렇게 자신에게 되물어 볼 때가 아니었다. 더욱 혼란스러웠다. 우선 현욱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함이 옳은 듯 했다. 혹시나 현욱과 눈이라도 마주칠세라 우종에게 고개를 돌려 냉심하게 말했다.

“영화 보러 가자며? 그럼 얼른 가자!”

그녀는 현욱을 외면한 채 앞서 나갔다. 우종은 현욱에게 미처 인사치레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미란 뒤를 따라갔다. 현욱은 의문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냉담해진 그녀의 태도의 원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지만 지하철 승강장에 도착해서도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기껏 영섭이 말한 자신과 연관된 헛소문 때문이라 추측도 해보지만, 지금껏 지내온 미란을 생각한다면 고작 그런 헛소문 정도에 그렇게 태도가 돌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소박한 성격에 그런 소문이 있다며 먼저 말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길 텐데…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유에 답답하기만 했다.

전화라도 해서 물어볼까하는 생각에 휴대전화를 꺼내보지만, 우종과 영화 보러 간다는 말이 떠올라 다시 집어넣었다. 괜스레 심난한 마음에 대신 귀에 이어폰을 꽂고 아이팟을 작동시켰다. 그때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들리자 절로 선로 쪽으로 고개가 돌아갔는데 조금 떨어진 정지선에서 지하철을 기다리는 혜린이 보였다.

이윽고 컴컴한 선로 안쪽에서 지하철의 불빛이 보였다. 선로에서 떨어져 있던 사람들이 점차 정지선으로 모여들자 혜린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현욱은 모여든 인파를 헤치고 무작정 혜린에게 다가갔다. 이내 지하철이 도착했고 스크린 도어와 함께 지하철 문이 열리자 승하차하는 승객들로 더 이상 나아가기엔 무리였다.

이리저리 두리번거리자 겨우 지하철을 타는 그녀가 보였다. 그제야 현욱도 얼른 지하철에 올랐다. 비록 혜린과 같은 칸에 타지 않았지만, 다음 칸과 연결된 통로 문에 있는 창문 사이로 손잡이를 잡고 서있는 혜린의 모습이 보였다.

이미 혜린에게 남자친구가 있는 걸 알면서도, 이젠 혜린에 대한 마음을 단념해야 함에도 심하게 고동치는 심장소리와 함께 좀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다 그녀는 내릴 차례가 됐는지 지하철 문에 다가섰고 예상대로 지하철이 멈추자 내렸다. 물론 현욱은 정차한 역이 어딘지도 모른데다 딱히 혜린을 어떻게 해볼 재간도 없으면서 따라 내렸다.

그런데 막상 내린 역은 마치 데자뷰라도 경험한 듯 상당히 낯익었다. 그러다 벽에 커다랗게 표시되어 있는 역 이름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름 아닌 자신이 내려야 할 역과 동일했으니 몰래 숨어서 따라갈 필요 없었고, 혹시나 혜린에게 들켜도 현욱의 집도 이 근방이니 우연을 빌미로 삼을 수 있었다.

이젠 거추장스럽기만 한 이어폰을 빼고 휴대전화의 전원마저 꺼버렸다. 그래도 되도록이면 혜린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에 간혹 전화라도 하는 척하며 혼자 주절대는 연기를 하거나 괜히 두리번거리며 그녀의 뒤를 밟아 도착한 곳은 어느 고층의 아파트 단지였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오가는 차들이며 사람들이 있었지만, 단지 내로 들어가자 인적마저 드물었다. 금방이라도 들킬 것 같은 불안감에 그녀와 간격을 더 넓히고는 살금살금 따라갔다. 그것도 잠시 그녀는 한 아파트 입구에서 걸음을 멈추더니 유리문에 부착된 경보 시스템의 번호를 눌러댔다. 짧은 전자음과 함께 좀 전까지 굳게 닫혀있던 유리문이 열렸고 마침 1층에서 대기 중인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리고 더 이상 혜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허나 그녀의 집이 불과 자신의 집에서 고작 십 여분 떨어진 거리였다는 사실에 북받쳐 오르는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 지금껏 그녀는 왜 그리도 보이지 않았을까? 설마 스쳐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한 걸까? 그렇다면 왜 진작 알아보지 못했을까?

끝없는 의문 속에 그녀가 들어간 아파트 입구까지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미 그녀가 들어간 아파트 입구인 유리문은 다시 굳게 닫혀 있었다. 그 유리문에 초라하게 서있는 자신의 모습이 비쳐졌다.

문득 작년 혜린을 처음 본 날이 떠올랐다. 떨리는 마음에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두 번째 그녀를 봤던 날에도 최근에 알게 된 남석 선배의 등장에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다행히 올해 학과 동기로 재회하긴 했지만, 여전히 말조차 건네지 못했다. 그러다 결국 그녀에겐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그녀와 이렇게 가까이 살고 있다는 사실마저 알게 되었다.

하나씩 혜린에 대한 추억과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될 수록 그만큼 혜린과의 거리는 점차 멀어져만 가는 현실이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물론 진정 좋아하는 상대에게조차 진심을 고백할 용기조차 없는 자신이 가장 큰 문제였다는 건 이젠 부정조차 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녀와 인연이 아니었기에, 운명이 아니었기에 그런 용기조차 생겨나지 않았다고, 그래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달랠 뿐이었다. 물론 그것이 자기 합리화하는 비겁한 변명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야만 그나마 혜린의 사랑이 될 수 없는 이 현실에서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가슴은 그런 모진 마음도 몰라주고 여전히 가쁘게 두근대는 가운데 현욱은 고개를 쳐들고 서서히 뒷걸음질 했다. 고개가 아플 정도로 우뚝 솟은 고층의 아파트로 인해 드리운 어두운 그늘은 그의 표정을 더욱 어둡게 했다.

“많이 힘들겠지만, 많이 아프겠지만…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잊어볼게요.”
2009-01-21 22:4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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