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나는 하이스쿨 로큰롤>
신나는 하이스쿨 로큰롤 CD 2 -Track 3.
 mojo
 2009-01-17 19:02:54  |   조회: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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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D 2 - Track 3. Beautiful Freak (아름다운 괴짜)



미쉐린네 살림집은 생각보다 깔끔했다. 아 왜 미쉐린네 '살림집' 이라는 표현을 쓰냐고? 미쉐린네는 특급 모텔 '흑장미' 의 꼭대기 층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곳까지 오면서 모텔과 방석집과 성인용품점이 세 블럭 가까이 꽉 늘어서 있는 부평로터리 근처의 환상적인 교육환경에 감동 먹었지만, 막상 미쉐린의 방안에 뻘쭘하니 앉아 있자니 도대체 내가 왜 미쉐린을 쫓아 온 건지 후회막심이었다. 열어놓은 창밖에서는 한 낮의 모텔촌에서 들을 수 있는 특유의 소리만 들려왔다. 정적 말이다.


사실 내가 미쉐린에게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있거나 한 것은 아니다. 녀석은 싸가지 없게도 버스정류장까지 따라와서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나에게 말대꾸도 안하고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나 역시 버스에 따라 탔다. 무단조퇴인 셈이었지만, 열등반으로 강등되고 나니 어쩐지 학사규정 따위가 다 좆으로 보였다. 미쉐린은 버스에 따라 탄 날 놀란 표정으로 바라봤지만, 이내 씩씩 거리며

"그래도 너 넌 내 친구라고 새 생각했는데."

이러고 앉아 있었다. 근데 씨발 나 니 친구 아니거든? 그냥 불쌍해서 상대해 준 건데 엉뚱한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녀석이 계속 토라져 있자 어떻게든 화를 풀어주고 싶었다. 뭐라고 해야 되나, 미쉐린 녀석에게 제대로 사과를 하지 않으면 나 역시 쏭부장과 같은 인간이 될 것만 같아 그게 두려웠다. 그리고 당시 쏭부장에 대한 내 감정은 혐오 그 자체였다.


아무튼 그러다보니까 미쉐린의 집까지 오게 된 거다. 녀석이 모텔촌으로 접어들 때 이 새끼가 호모 아닐까? 라는 불안감에 사로잡혔고, 마침내 어느 모텔 앞에 도착했을 때 난 재빨리 느슨하게 묶인 내 캔버스화의 신발 끈을 다시 조이고 있었긴 하지만....

"뭐 뭐해?"

젠장! 호모는 한 번 찍은 먹이를 놔주지 않는다는 데 어쩌지? 빌어먹을 방금 전까지 만만하게 보이던 미쉐린이 타이슨처럼 초강력해보였다.

"저 저기 기왕 우리 지 집 온 김에 바 밥이나 먹고 가."

난 녀석의 말을 듣고서야 내 앞에 우뚝 서 있던 디즈니랜드 비스무리한 건물을 바라봤다. 특급 '흑장미'라... 가정환경 끝내주는 군.



우리가 모텔안으로 들어갔을 때 카운터에 앉아 멍하니 TV를 보고 있던 미쉐린네 엄마는 한 낮에 귀가한 미쉐린이 걱정인지 무슨 일 있었니? 하며 녀석을 걱정스럽게 맞았다. 하지만 미쉐린은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대답 대신 날 자기 친구라며 엄마에게 소개했다. 사위를 맞는 장모의 모습이라고 해야 되나? 미쉐린네 엄마는 갑자기 눈을 반짝이더니 내 손을 꼬옥 잡고 '어머! 우리 애 친구니? 너무 잘 왔다! 오느라 피곤하지는 않았니?' 이런 저런 말을 하며 날 반겼다. 미쉐린네 엄마는 손이 유달리 차가웠는데, 검은 매니큐어를 칠한 긴 손톱이 까끌하게 내 손등에 닿고 있었다. 그녀가 내 얼굴에 얼마나 가까이 대고 말을 하는지 눈썹이 문신이라는 걸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또 눈은 유달리 크고 짙은 쌍커풀이 있어 똑바로 보기 부담스러웠다.


난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리고 거기서 본 건 아아 바로 파멜라 앤더슨이었다! 깊게 파인 브라우스 사이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골짜기 같은 가슴골이 내 자지를 폭발시킬 것만 같았다. 조땅이 봤으면 100점! 이라고 했을만한 그런 가슴을 중년의 아줌마가 달고 있었다. 아니 아줌마가 아니라 '부인' 이라고 해야 될까? 미쉐린네 엄마는 그런 여자였다. 도저히 고등학생의 엄마라고 볼 수 없는 육감적인 몸매에 그 나이대 여자치고는 엄청나게 큰 키, 음악보다도 훨씬 더 커보였다. 거의 나만했던 것 같다.


"엄마! 우린 방에 가서 놀 거니까 카운터나 봐!!"

미쉐린이 창피한 표정으로 꽥하고 소리를 질렀다. 미쉐린...... 너 더듬지 않고 말할 수도 있었네?

미쉐린의 방안은 사우나에서 때를 박박 민 다음에 들어가야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먼지 한 톨 없었다. 고등학생의 방이라면 당연히 내 방처럼 자유방임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말하자면 침대 밑에 처박힌 뒤집힌 양말이라든가, 책장에 쑤셔 박힌 옷들, 옷장에 쑤셔 박힌 책들, 듣고 나서 정리하지 않아 케이스와 알맹이가 뒤죽박죽 된 테이프 같은 것들 말이다. 너무 정갈한 실내라 마치 방송국 세트장에라도 와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도 시사대담 프로그램. 난 양반다리를 하고 앉기도 미안해서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우 우리 엄마가 너무 호 호들갑이지?"

"아니, 근데 무척 미인이시던데?"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부인'은 미쉐린과 같은 유전자를 공유한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의 여성이었다. 물론 어딘지 얼굴의 전체적인 형상이 몇 번의 성형을 거쳤을 거라고 짐작되는 그런 다소 지친듯한 느낌을 주고는 있었지만 아주 지독한 로리타 컴플렉스를 가진 사람이 아닌 이상 누구나 미인이라고 할 만한 그런 용모였다. 모텔이름 "흑장미"를 자신의 별명에서 따온 게 아닐까 생각됐다. 아무튼 그러고 앉아 있는데 방문이 빼꼼히 열리더니 '부인'께서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들어왔다.


'부인'은 피자(그것도 피자헛!!!슈퍼 슈프림 라지 두판!!!)를 시켜서 가져왔다. 아 씨발 이거 우리 집에서는 국경일에만 먹는 건데! 나는 황송한 나머지 넙죽 절이라도 할 태세였다. 다만 미쉐린의 어머니와 피자 중 어느 쪽에 절을 해야 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타이밍을 놓쳤을 뿐이었다.

"엄마! 그냥 배달부들이 갖고 올라오게 하면 되잖아!"

미쉐린이 짜증을 냈다. 이 자식 복에 겨웠구나. 하지만 '부인'은 직접 만들어줘야 되는데... 지금 카운터를 봐야 해서 말이야. 라며 우리들에게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없이 희생적인 모성이라는 건 이런 사람을 말하는 거다! 난 진심으로 감동받았다. '부인'은 우리 애가 좀 사회성이 부족해서 그런데 잘 이해해주고 친하게 지내달라느니 그런 말을 했다. 물론 미쉐린은 또 한 번 그녀에게 역정을 냈다.



"미 미안해."

미쉐린은 '부인'이 나가자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미안하긴 뭘~ 이라고 말하려 했으나, 목구멍에 피자가 잔뜩 걸려있어 켁켁 소리 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쉐린이 재빨리 오렌지 쥬스를 따라줬다.

"보통 친구들 오면 이렇게 대접해? 죽이네!"

난 피자를 연신 집어 삼키며 말했다. 미쉐린 녀석은 피자를 토핑이 얹어진 부분만 쓱 뜯어먹고 가장자리는 휙 버리며 말했다.

"사 사실 친구 중에 우리 지 집 온 거 니가 처 처음이야."

녀석이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미쉐린... 친구 중에가 아니라 친구는 나 밖에 없는 거 혹시 아니냐? 물론 대놓고 저 말을 하지는 않았다. 왠지 미쉐린이 울어버릴 거 같았다.



피자를 거의 배가 터질 듯이 먹고 난 뒤 난 뭔가 화제거리를 찾아 해멨다. 그러다가 나는 방 한켠에 있는 장식장에 한 가득한 프라모델들을 발견했다. 우와! 국민학교 때 저거 정말 좋아했었는데! 나는 반가움에 프라모델이 잔뜩 모여 있는 장식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저거 좀 봐도 되냐고 미쉐린에게 물었다.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고 있던 미쉐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프라모델은 주로 로봇류였는데, 예전에 내가 만들던 것하고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정교했다. 한 번 만져보려고 하자 미쉐린은 기겁을 하면서 일단 물티슈를 가져왔다.

"이 일단 손에 기름기 좀 다 닦고 마 만져."

뭐라고 욕해주고 싶은데 딱히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지금이야 간단히 이런 녀석들을 정의할 수 있는 단어를 알고 있지만 말이다.



씹덕 새끼!

....뭐 그 때야 그런 단어 알았나.

"나도 이거 알아! 건담에 나오는 짐이라는 로봇이지?"

"거 건담이 아니라 패트레이버에 나오는 로봇이야."

"아... 이건 패트레이버라는 로봇이구나..."

"아아니 그 그게 아니라 그 로봇의 이름은 이 잉그램이고, 패트레이버는 그거 마 만화제목이야. 그리고 저 정확히는 로봇이 아니라 레 레이버고"



......씨발 뭐가 이렇게 복잡해?

나는 프라모델을 내려놨다. 이 주제로 이야기를 계속 하다가는 미쉐린의 멱살을 잡게 될 거 같았다. 미쉐린은 자기가 실수 한 걸 알아챈 듯 다소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야 근데 너 일본 음악 좋아하나봐?"

난 다소 긴장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미쉐린에게 말했다.

"아... 어 그 그래 맞어. 내 커 컬렉션 보 볼래?"



미쉐린이 책상 옆에 있던 하얀 캐비넷의 문을 열자, 맙소사... 엑스재팬, 루나시, 맬리스 마이저 같은 일본 비쥬얼 록밴드들의 시디가 빼곡히 꽂혀있었다. 난 저 밴드들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경악할 수 밖에 없었던 게 당시엔 일본 음반은 정식 라이센스가 금지되어 있어서 소규모 보따리상이 알음알음 구해오던 게 다였기 때문이다. 장당 가격은 5만원에 육박했다. 지금 물가로 생각해보면 시디 한 장에 십만원 정도? 그 캐비넷에 있는 시디들만 가져다가 팔아도 몇 백은 우습게 나올 것 같았다. 미쉐린은 내가 놀라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날 쳐다봤다.


그리고 녀석은 최후의 일격을 먹이려는 듯 자기 옷장을 열더니 기타 케이스를 꺼냈다. 이 자식도 기타 칠 줄 아는 건가? 그리고 미쉐린이 케이스의 뚜껑을 열자, 그 안에서 페르난데즈의 모킹버드 옐로하트 360S - 일명 히데 커스텀이 '훗.... 평민새끼' 라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노란색 바디에 점점이 박혀진 붉은 색 하트에 눈이 아릴 정도였다.



"야 이 이거 한 번 쳐 쳐봐도 되냐?"

쪽팔리게도 난 미쉐린처럼 말을 더듬고 있었다. 미쉐린은 거만한 표정을 짓더니 모킹버드를 꺼내줬다. 그리고선 침대 밑에 있던 이펙터와 앰프를 꺼내 케이블을 연결했다. 앰프 역시 펜더 15와트짜리였다. 정체불명의 국산 앰프를 쓰고 있던 나로서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당장에라도 쌀 것만 같았다.


난 즉시 코드를 잡고 모킹버드를 연주해봤다.


"으... 음?"

뭐랄까? 잘 모르겠는 느낌?


"소 소리가 작아서 그 그럴꺼야."

미쉐린이 앰프의 출력을 크게 높였다. 어차피 모텔촌이라서 낮에는 크게 연주해도 상관 없대나? 아파트에 사는 내 처지가 원망스러워졌다.

쾅! 하고 모킹버드가 비명을 내지르기 시작했다. 스트라토 캐스터에 비해서는 다소 소리가 가볍고 방방 뜬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주-욱 내지르는 듯한 소리가 상당히 괜찮았다.



물론.

"뭐, 펜더 스트라토 캐스터 보다는 별론데?"

난 별거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모킹버드를 내려놨다.

"하 하지만 스 스트라토 캐스터는 니께 아 아니라 하 학교 거잖아."

예리한데? 난 스트라토 캐스터 그러니까 '제니퍼'의 정식남편이 아닌 세컨드... 였던 것이다.

"뭐 넌 칠 수 있는 거 있냐?"

자존심에 상처를 받은 난 미쉐린에게 비죽비죽 웃으며 물었다. 이런 근성도 없고 가오도 없는 녀석이 끈기와 많은 연습이 필요한 기타라는 악기를 제대로 칠 수 있을 리 없다. 녀석이 스트랩을 목에 거는데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그리고 녀석은 살찐 손가락을 지판에 올려놨다. 줄 두 개가 한꺼번에 눌리는 거 아닐까 걱정부터 됐다.



빌어먹을.

미쉐린의 손가락은 내 손가락보다 두 배는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다. 피킹 역시 면도날처럼 정확했다. 사람 목을 그으면 피가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녀석은 엑스제팬의 <Week End> 를 쳤는데, 역시 히데 커스텀으로 듣는 히데의 연주는 뭔가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나서 녀석은 즉흥적인 애드립 연주를 선보였다.



간단히 말해. 녀석은 나보다 기타를 잘 쳤다. 그것도 훨씬....

잘하면 음악하고도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까 음악이 펜타토닉에 기반한 애드립에 강한 전통 하드락 스타일의 플레이어라면, 이 녀석은 멜로딕 스피드 메탈계열의 하모닉 마이너 스케일에 통달한 전형적인 속주 플레이어였다. 나? 난 그 둘에 비하면 그냥 좆밥이고... 녀석이 피크를 내려놓더니 날 쳐다봤다. 그리고 난 녀석이 진짜 원하는 게 뭔지 알아챘다.


"배 밴드부에 드 들어가도 돼?"

"......"

"저... 내 내가 드 들어가면 훠 훨씬 좋아질텐데 말야...."


녀석의 말이 사실이었다. 미쉐린만 밴드부에 합류한다면 밴드의 퀄리티가 엄청나게 높아질 게 뻔했다. 녀석은 신입생 때는 밴드부에 무서운 형들이 많아 보여 섣불리 가입을 못했다고 했다. 하지만 난 생각이 다르다. 녀석처럼 개인주의적인 인간이 형편없는 연주력에 가오만 잡는 자칭 '롸커'들이 득실대는 고등학교 밴드부에 애당초 들어가려 했을 리가 없다.


아마도 미쉐린은 쏭부장에 대항하는데 내가 필요했을 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뭐 어쨌단 건가? 나 역시 쏭부장은 싫다. 그리고 난 가만히 생각해봤다. 미쉐린이 합류한 밴드부의 화려한 플레이를 말이다. 학교축제에서 공연이라도 하게 되면 아이들의 혼을 빼놓겠지. 어쩌면 라이브 하우스에서도 공연이 가능할 수 있다. 열광한 관중의 환호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안 돼."

"어... 어? 왜? 나... 기 기타 잘 쳐."

나는 녀석에게 학사규정상 3학년생은 새로 동아리에 가입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입시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리나라는 대체 왜 이렇게 입시가 고등학교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걸까? 라며....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그딴 학사규정은 있지도 않다. 어쩌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학사규정 따위를 외우고 다닐 리 없지 않은가? 녀석이 밴드부에 들어오게 된다면 분명 난 리드기타 자리를 잃게 될 것이었다. 차라리 미쉐린 녀석에게 싸움으로 지는 게 낫다. 평소에 롸커라며 가오 잡던 내가 저 미쉐린 같은 왕따 새끼에게 기타 실력으로 뒤쳐지다니 최악이었다.


미쉐린은 실망한 표정으로 잠시 있다가 또 다른 자랑거리를 찾으려는 듯 방안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어떻게든 집에 돌아가 침대에 묻혀 오늘 들은 미쉐린의 연주를 기억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생각에 꽉 차 있었다. 미쉐린이 3.5인치 디스켓을 손에 쥐고 엉거주춤 방을 나서는 나에게 어딜 가냐고 물었다. 자식 이번엔 무슨 컴퓨터게임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난 일단 학교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일단 가방 같은 거 챙겨야 된다면서. 녀석은 여전히 실망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디스켓을 나에게 줬다. 재미있는 게임이니까 꼭 해보라고 하면서.



미쉐린과 부인의 배웅을 받으며 난 학교로 돌아갔다. 물론 미쉐린은 부인에게 '아 쫌 들어가!" 이러며 버릇없이 대했다. 복에 겨운 자식.... 난 학교에 저녁 늦게 자율학습시간에야 도착했고, 다행히도 쏭부장은 이미 퇴교한 상태였다. 젠장... 대신 너덜너덜 찢겨진 가방이 내 자리에 걸려있었다. 조만간 사생결단이 펼쳐질 건 누가 봐도 뻔해보였다. 교실에 몇 안 남은 애들이 내 싸늘한 표정을 힐긋 거리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심란하기 짝이 없었다. 쏭부장 녀석에게 이제라도 화해를 청할까... 아니면 집에서 식칼이라도 가져가야 되나... 젠장 국민학교 때 태권도 무지개 띠는 따놨는데 그거 보여줘도 쏭부장 새끼 안 쫄겠지? 교복 주머니에 넣어둔 3.5인치 디스켓이 언뜻 손에 잡혔다. 그냥 오늘 저녁엔 게임이나 하자라고 마음먹었다. 재미있으면 좋을텐데...

"야! 컴퓨터 좀 쓰자!"

"야~아? 이게! 누나라고 안 불러!"

하이텔 채팅을 하던 누나가 먹고 있던 프링글스 캔을 내 머리통에 내리쳤다. 망할 년, 대학교는 대체 뭘 하는 곳이 길래 하루 종일 채팅만 하는 이런 년이 짤리지 않고 다닐 수 있는 거지? 누나의 대화명을 보니 Angel74였다. 허이구... 74킬로 나가는 앤젤이라는 뜻이야?.... 프링글스 캔이 내 대가리에 다시 내리쳐졌다. 아 씨발 속으로만 생각할 걸...

"너 담배 피는 거 아버지한테 말한다!"

내가 누나를 위협했다. 물론 누나는 내가 담배피는 걸 아버지한테 이르지 못한다. 아버지는 내가 담배 피는 거 알고 있었으니까.... 뭐 사나이라면 담배도 필 줄 알고 그래야지! 내 앞에서만 피지마라. 가 그의 지론이었다. 무서운 사람이다. 하지만 여자인 누나가 (나는 도저히 누나가 여자라는 게 믿겨지지 않았지만) 담배 피는 걸 걸리게 된다면 머리는 물론이고 눈썹까지 빡빡 깎여서 백담사에 유폐될 게 뻔했다. 누나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그럼 15분만이다. 라며 자리를 내줬다. 땡큐~! 채팅창의 남자는 갑자기 누나가 간다고 하자 발정난 손가락을 놀리며 뭐라 뭐라 입 발린 소리를 해대고 있었다. 병신 새끼.



그리고 난 게임을 하드에 인스톨했다. 컴퓨터는 누나방에 있었고, 난 평소에 컴퓨터를 잘 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상메모리가 어쩌고저쩌고 잡소리가 있어 좀 버벅거리기는 했지만, 어쨌든 실행엔 성공했다.


할렐루야! 마우스를 잡은 손가락 끝에서 쿠퍼액이 나오는 것만 같았다.

그 게임의 정체는 향후 방송 3사와 3대 종합일간지에서 청소년의 건전한 성의식을 망친다고 신나게 까게 될 문제작


"동급생"


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허접한 그림체에 코웃음을 쳤지만, 본격적으로 섹스신이 나오는 데 이럴수가! 인터렉티브 스타일의 엔터테인먼트 미디어 였던 것이다. 마우스 커서로 클릭하는 부위마다 여자애의 반응이 달라졌다. 게다가 대사는 야설 뺨치게 자극적이었다. 마우스를 열심히 클릭해 화면에 떠있는 여자애의 팬티까지 벗기자 자지가 팽팽히 발기됐다. 바야흐로 21세기 버츄얼 리얼리티 IT산업의 개막을 알리는 미디음이 컴퓨터에서 뿅뿅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난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바지를 내렸다. 눈깔은 방안에 티슈가 없나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야! 15분만 한다고..."

문을 벌컥 열며 들어온 누나가 얼어붙었다. 나 역시 얼었다. 내 입에서 잠깐 이란 단어의 자.... 까지는 튀어나왔던 것도 같다.


"엄마아아아아아!!!!"


어머니한테 자정이 되도록 쳐맞았지만 별 타격 없었다.


다행히 아버지는 친구들과 술 퍼마시느라 집에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리고 누나는 그로부터 몇 년 동안이나 날 "딸쟁이" 라고 불렀다.



그건 꽤 타격이 컸다.
2009-01-17 19:0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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