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욱 소설게시판
Memories... <제 15 회>
 JUP STORY
 2009-01-14 14:22:19  |   조회: 1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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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란이 들어서자 마침 출입구가 보이는 자리에 앉았던 영섭이 두리번거리는 미란을 찾았다. 다른 사람들의 왈왈거리는 소리에 큰 소리로 그녀를 호명하며 손짓했다. 그녀가 다가오자 그는 현욱의 옆자리에 놓인 가방을 모조리 자신의 옆자리로 옮겼다. 영섭의 행동에 현욱은 의아스러웠지만 물어볼 세도 없이 그녀는 자연스레 현욱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영섭이 자신과 미란을 두고 남발한 망언이나 의심스런 행동에 무색했건만, 이젠 나란히 앉은 자신과 미란을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의 눈빛이 더욱 거슬렸다.

이때 종업원이 미란의 잔을 가져왔다. 현욱은 그의 능글맞은 눈길을 피하려 마침 근처에 있던 맥주피처를 들었다. 미란의 잔을 거의 채울 때쯤에 영섭이 말했다.

“둘이 그러고 있으니깐 은근히 잘 어울린다!”

순간 현욱은 흠칫 놀란 나머지 그만 그녀의 잔이 넘치도록 부었다. 그녀의 손등과 소매가 조금 젖어버리자 현욱은 난처한 표정으로 황급히 티슈를 건넸다.

“이런, 미안! 괜찮아?”
“네, 괜찮아요.”

미란은 대견스럽지 않은 표정으로 닦아냈고 현욱이 매섭게 영섭을 노려보았다. 영섭은 일부러 그의 시선을 외면했고 미란이 닦은 티슈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선배도 참 눈치 없게 지금 현욱 선배한테 그런 농담을 하고 싶어요? 친구라면서 정말 너무해요! 그렇지 않아도 혜린 언니 때문에 얼마나 속상…”

다시 혜린의 얘기가 나오자 얼른 현욱이 술잔을 내밀며 끼어들었다.

“그런 얘기는 그만하고 오늘 시험도 끝났으니 우선 한 잔 마시자!”

현욱은 혹시나 또 혜린의 얘기가 나올까 내심 불안했다. 건배를 하자마자 서둘러 잔을 비우곤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참! 학교에 두고 왔다는 건 잘 챙기고 왔어?”

이번엔 미란이 흠칫 놀란 듯 하더니 그렇다며 짧게 말했다. 하지만 눈치 빠른 영섭이 이를 놓칠 리가 없었다. 영섭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이미 그런 그의 낌새를 눈치 챘는지 얼른 현욱의 빈 잔을 채우며 시선을 회피했다.

다행히 영섭은 더 이상 현념할 생각은 없는지 슬쩍 웃음을 띄곤 화제를 돌렸다. 중간고사 시험부터 시작해 사사로운 주제들이 오갈뿐, 미란이나 영섭은 현욱을 의식해서인지 혜린이나 그녀의 남자에 대한 얘기는 한사코 꺼내지 않았다.

그래도 현욱의 머릿속엔 혜린과 그녀의 남자의 상념으로 복잡했다. 두 눈으로 본 그 현실을,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데 쉽지 않은 듯 아무리 우스운 얘기가 오가도 현욱의 얼굴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물론 영섭과 미란도 현욱의 심정을 은근히 파악했지만, 그렇다 해도 지금은 어떠한 위로나 격려보다 무관심만이 진정 그를 돕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느지막이 들어온 몇몇 학과 사람들과 마주치자 자연스레 합석했고 사람 수에 따라 빈 술병도 늘어나자 분위기는 금세 소란스러웠다. 한참 시간이 흐르자 다수의 의견에 힘입어 다른 장소로 이동할 때였다. 그동안 적당히 취기가 오른 사람들도 있지만, 벌써 인사불성인 몇몇 사람들 때문에 그나마 멀쩡한 사람들이 집에 보내느라 진땀을 뺐다.

현욱은 한 남학생을 막 택시에 태워 보내고 잠시 한숨을 돌렸다. 마침 골목에서 게워내는 여학생의 등을 두드리는 영섭이 보여 다가갔다.

“영섭아, 나도 그만 돌아가야겠다.”

영섭은 슬쩍 시계를 쳐다봤다.

“하긴 네가 이렇게 늦게까지 있는 게 더 이상하지. 그보다 기분은 좀 어때? 조금이라도 풀어졌으면 좋겠는데…”
“덕분에.”
“그럼 다행이고. 주말 잘 보내고 다음 주에 보자.”

현욱이 발걸음을 돌려 어느 정도 멀어지자 영섭은 게워내는 여학생에게 다시 눈길을 돌렸다. 이번엔 등 뒤에서 미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선배, 미안한데 나도 이만 가볼게요!”

영섭이 고개를 돌렸을 땐 그녀는 이미 잰걸음으로 현욱을 뒤따라가고 있었다. 영섭은 오묘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것들 정말 수상하단 말이야. 둘 사이에 진짜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는 거 아냐? 하여간 그 뭔가가 좋은 거라면 굳이 상관없지만…”

미란은 먼저 앞서간 현욱과 불과 몇 발자국 차이라 뒤따라가기엔 큰 무리가 없었다. 조금만 속력을 내면 따라잡을 수 있을 법한데 되레 걸음을 늦추고 다가가지 않았다. 혜린에 대한 미련 때문일까? 아니면 오늘따라 유난히 마신 탓에 생긴 취기 때문일까? 축 늘어진 그의 뒷모습이 덧없이 측은스러웠다.

어느덧 지하철역이 보였다. 집에 간다고 했으니 당연히 지하철역에 들어서 승강장 계단으로 내려가겠거니 했지만, 현욱은 그대로 지나쳐 버렸다. 미란은 그의 그 같은 돌변에 어리벙벙할 틈도 없이 행여나 놓일세라 더욱 간격을 좁혔다.

얼마 있다가 그가 도착한 곳은 시내 인근의 공원이었다. 밤늦은 시간이라 그런지 인기척 하나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맨 처음 보이는 벤치에 덥석 무너지듯 주저앉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힘없이 축 늘어져 호졸근한 그의 모습에 아직은 다가갈 수 없었다.

미란은 주변을 기웃대다 편의점을 발견했다. 얼른 들어가서 생수 하나를 구입해서 돌아왔다. 다행히도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가만히 앉아있었다. 미란은 생수 마개를 열고 한 모금 마시고는 태연무심하게 다가가 그에게 생수를 내밀었다.

“선배, 물 마실래요?”

현욱은 그녀의 돌연적인 등장에 당연히 놀란 듯 했다.

“아… 아니, 괜찮은데. 그런데 네가…”

미란은 현욱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옆에 턱하니 앉았다. 그리고 친절하게 생수 마개까지 열어 건넸다.

“입 안댔으니깐 마셔요. 술 마시고 나면 은근히 갈증 나잖아요.”
“그…그래, 알았어. 마실게.”

현욱은 마지못해 생수를 받아 들이켰다. 금방 구입한 것이라 은근히 시원해 약간의 남은 취기마저 금방 물러날 듯 했다.

“고마워. 정말 시원하다! 근데 네가 여긴 웬일이야?”
“선배가 집에 가는 거 보고 같이 갈려고 따라왔는데 지하철역엔 안가고 여기로 가잖아요. 그래서 저도 모르게…”

미란이 헤헤대자 그도 따라 웃었다. 그녀는 금방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바꾸곤 다시 말했다.

“선배야말로 집에 안가고 왜 여기에 있어요? 좀 전에 보니깐 기운 없어 보이던데… 혹시 혜린 언니 때문에 그런 거예요?”

현욱은 침울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이미 그 사람한테는 남자가 있는데… 그걸 알면서도 쉽게 단념이 안되네. 계속 이래봤자 부질없는 짓인데 말이야.”
“그거야 당연한 거잖아요. 그만큼 선배가 언니를 진심으로 좋아했으니깐 쉽지가 않겠죠. 언니에 대한 마음이 한 순간의 감정은 아니었잖아요. 누가 그러더라고요. 사랑하면 할수록 그에 대한 미련도 그만큼 커진다고…”

그녀의 말이 여간 대견스러운지 현욱은 흐뭇했다.

“그러고 보면 나보다 네가 더 어른스러운 것 같단 말이야. 반면에 난 후배인 너한테 이렇게 자꾸 안좋은 모습만 보이게 되니깐 어떤 때는 널 대하기가 솔직히 좀 그렇더라.”
“선배도 참… 그게 뭐가 안좋은 모습이에요. 오히려 난… 물론 어떻게 보면 혜린 언니 때문에 뜻밖에 선배랑 가깝게 지내고 있지만, 선배란 사람… 보면 볼수록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아직 영섭 선배만큼이나 선배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냥… 그냥 그렇게 느껴져요.”

현욱은 수줍음을 감추려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시계바늘은 막 열한시를 가리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늦은 것 같은데 그만 가자.”

현욱이 자리에 일어나자 미란도 따라 일어나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현욱은 한동안 말없이 걸었다. 미란은 흘깃흘깃 현욱을 쳐다봤다. 아직은 떨쳐버릴 수 없는 혜린에 대한 상실감과 미련 때문인지 골몰 중이었다.

지하철역에 도착해 승강장 내려가는 계단에 이르렀을 때 현욱이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저기, 미란아… 넌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란 법 없다’란 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미란은 놀라서 두 눈이 휘동그레져 말했다.

“갑자기 그건 왜요? 설마 그 재석이란 사람한테서 혜린 언니를 뺏으려는 거예요?”

순간 그녀는 아차 실수했다는 듯 입을 꽉 다물었지만, 이미 현욱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재석? 그 사람의 남자친구 이름이 재석이니? 근데 넌 어떻게 알았어? 아니, 언제부터 안거니? 너 혹시 그 사람한테 남자친구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의 표정이 경직되어가자 미란은 난처한 얼굴로 서둘러 손사래까지 치며 입을 열었다.

“선배, 오해는 말아요! 선배도 알다시피 낮에 두고 온 것이 있어서 다시 학교에 돌아갔잖아요. 그때 우연히 유정 언니만나서 알게 된 사실이라고요!”

현욱은 그제야 진정이 됐는지 짧게 숨을 내뱉었다. 현욱은 씁쓸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다시 승강장으로 내려갈 찰나였다.

“송재석! 나이는 선배랑 동갑이고 한국대학교 경영학과에 다닌대요.”

뒤에서 들여오는 미란의 목소리에 현욱의 걸음이 멈춰졌다.

“교회 봉사활동으로 처음 만났고 작년 10월 말경부터 사귀기 시작했대요. 그 남자가 먼저 언니에게 고백했고 그렇게 사귀게 됐는데… 유정 언니한테 그 남자에 대해 이것저것 들어보니깐 여자인 내가 봐도 그 남자,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중요한 건… 언니가 그 남자를 더 많이 사랑하는 것 같대요.”

현욱은 겨우 침착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 사람이 더 많이 사랑한다고? 그래, 좋아! 그렇다고 쳐! 근데 그 말을 왜 하는 거지? 결국 나 같은 건 그 사람한테 다가봤자 무조건 안된다는 거야?”

그의 점차 격앙된 목소리에 미란은 애연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선배, 그렇게 자신을 비하하지 말아요. 선배가 언니에 대한 진심이 어떤 건지 잘 알아요. 그래서 언니가 부럽기도 해요. 한 여자로 태어나 한 남자에게 진심으로 사랑받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이겠어요. 근데 다만… 그렇게 선배가 언니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사랑하면 뭐해요? 언니는 이미 다른 사람에게 온전히 마음을 빼앗겼는데… 그런데도 선배가 언니한테 다가가는 건… 오히려 선배만 상처받을 뿐이라고요!”

지하철이 곧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오자 승강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의 걸음걸이가 갑자기 바빠졌다. 미란도 다시 계단을 내려가 그에게 다가갈 때였다. 이제 막 그 계단에 들어선 한 남자가 급하게 허둥지둥 내려오다 미란을 툭 치고 지나가 버렸다. 순간 그녀는 짧은 비명과 함께 비틀거리며 균형을 잃자 결국 그의 품에 안기는 꼴이 되어 버렸다. 현욱은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놀랄 법도 한데 미란은 의외로 담담한 얼굴이었다. 이내 뺨의 한복판이 발그레하더니 그윽한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야 말로 정말 괜찮은 거죠? 선배가 지금 많이 힘들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그래도 많이 아프지 말아요. 많이 힘들어하지 말아요.”
2009-01-14 14:2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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