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욱 소설게시판
Memories... <제 14 회>
 JUP STORY
 2009-01-11 23:35:18  |   조회: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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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린을 부르는 사내의 목소리에 현욱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제일 먼저 프리지어 꽃다발을 들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늘씬한 키, 상당히 준수한 외모에 깔끔한 매무새는 단정도 하였지만, 무척 세련되어 보였다.

그때 샴푸 향인지 향수 향인지 모를 은은한 향을 풍기며 혜린이 지나갔다. 얼핏 보였지만 환희에 잔뜩 차있는 얼굴이었다. 그 사내는 들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자 혜린은 무척이나 기쁜 얼굴로 바로 탄성을 발했다.

“갑자기 웬 꽃이야?”
“뭐, 꼭 특별한 날에만 꽃다발 주는 건가? 그냥, 차 몰고 오는데 요기 앞 사거리에서 신호 받다가 문득 꽃집이 눈에 띄더라고. 그래서 네가 좋아하는 프리지어 몇 송이 샀어.”
“정말 예쁘다! 너무 고마워!”

다른 사내와 함께 있는 혜린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보는 건 정말 곤욕스러웠다. 하지만 그들에게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오히려 자꾸만 시선이 갔다.

아주 잠시나마 미란의 말만 곧이곧대로 듣고 괜한 설렘과 기대감에 부풀어있던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웠다. 그러한데다가 혜린에게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가능성을 잠시나마 배제하고 망각한 것에도 한없이 어리석었다. 하지만 혜린에 대한 애석한 마음은 여전했다.

그 사내는 혜린의 어깨를 살포시 감싸곤 계단으로 내려갔다. 영섭은 은근하게 현욱의 표정을 살폈다. 의외로 담담한 현욱의 표정에 그의 심중을 떠볼 심상으로 넌짓 말했다.

“누구지?”

현욱은 역시 한풀 꺾인 목소리로 말했다.

“누구긴, 척 보면 모르겠어? 저렇게 꽃다발까지 들고 오고 어깨에 손 올리고 가는데 설마 그냥 친구겠니? 남자친구겠지! 하긴 그 사람 정도면 남자친구가 있는 게 당연하지. 오히려 없는 게 더 말이 안되지. 잠시라도 없을 거라고 착각한 내가 바보다, 바보!”

현욱의 얼굴엔 금방 쓸쓸함이 묻어났다. 이내 투박한 걸음으로 그곳에서 벗어났고 영섭과 미란은 조용히 그의 뒤를 따랐다. 그러다 학과 건물을 막 벗어날 때쯤 현욱이 걸음을 멈췄다. 뒤따라온 그들도 잠시 걸음을 거두고 현욱의 눈길을 따라갔다.

혜린이 남자친구의 배려를 받으며 햇빛에 유난히 반짝이는 새하얀 중형차 조수석에 올랐다. 이어 혜린의 남자친구도 얼른 운전석에 오르더니 힘찬 시동소리와 함께 유유히 현욱의 눈에서 멀어져만 갔다.

“자기 아버지 차라도 끌고 왔나? 하여튼 여자 앞에서 저렇게 폼 잡는 놈들이 있다니깐!”

영섭의 비아냥거림에도 현욱은 그저 묵묵했다. 그래도 영섭은 더 생기가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야, 여기서 이러지 말고 시험도 끝났는데 간만에 시원한 맥주나 한 잔씩 하러가자! 이번에도 시험도 네 덕을 톡톡히 봤는데 그냥 넘어갈 순 없잖아? 그렇지?”
“그래, 그러자.”

현욱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솔직히 현재 현욱의 기분에 이렇게 쉽게 수락할 것이라 생각 못했는지 영섭은 조금 놀랬다. 영섭은 미란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하자 역시나 선뜻 받아들였다.

영섭은 괜찮은 호프집이 있다며 먼저 앞장섰다. 캠퍼스에서 벗어나 인근 버스정류장을 지나칠 때였다. 미란은 캠퍼스에서 유독 혜린과 절친하게 지내는 유정을 발견했다. 처음엔 굳이 다가가 인사할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아 무심히 지나칠 듯하더니 문득 떠오른 생각에 영섭을 불러 세웠다.

“영섭 선배, 미안한데 깜박하고 학교에 두고 온 것이 있어서 그런데 먼저 가요. 찾아가지고 금방 따라 갈게요.”

영섭은 알겠다며 찾아올 호프집 위치를 가르쳐주곤 현욱과 홀연히 가버렸다. 미란은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다 많은 인파속에서 완전히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유정에게 눈길을 돌렸다. 다행히 유정은 그 자리에 있었다. 혹시 그녀가 타고 갈 버스가 올까봐 최대한 안연한 얼굴로 재빨리 다가갔다.

“어머, 유정 언니! 집에 가는 길이에요?”
“응, 미란아. 너도 여기서 버스 타니?
“아뇨, 그게 아니라… 사실 혜린 언니에 대해서 뭐 좀 물어보려고요.”

한편 현욱과 영섭이 들어간 호프집에는 좀 이른 시간임에도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인근 대학교에도 시험기간이 끝났는지 거의 자리마다 시험 얘기가 화두에 올랐다. 그런 부산스런 분위기에서 영섭은 맥주 한 잔을 거뜬하게 비웠다. 반면 현욱의 잔은 여전히 채워져 있자 영섭이 투덜댔다.

“술은 뭐 나 혼자만 마시냐? 안마시고 뭐해?”

현욱은 그의 비워진 잔을 다시 채워주며 말했다.

“뭐가 그리 급해? 아직 미란이도 안왔는데…”
“그래도 원래 맥주 첫 잔은 원샷으로 깔끔하게 목구멍으로 넘겨주는 게 맥주에 대한 도리라고! 짜식, 센스 없기는…”

그의 빈정거림에 현욱은 슬쩍 웃어 넘겼다. 그때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영섭이 말했다.

“이제 앞으로 어떻게 할 거야?”
“뭘?”
“뭐긴, 혜린이하고 말이야!”
“어떻게 하고 말고가 어딨어? 남자친구가 버젓이 있는데 별 수 있겠어?”

현욱은 그제야 잔을 들어 벌컥 마시곤 다시 말했다.

“포기해야지…”

맥주의 쌉싸래한 맛 때문인지 혜린에 대한 미련 때문인지 현욱은 비감에 잠겼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확 고백 해버려! 솔직히 그렇게 좋아하면서 좋아한다는 말은커녕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한 게 억울하지도 않아?”
“남의 얘기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 그 사람의 남자… 남자인 내가 봐도 괜찮아 보이더라. 그 사람과 잘 어울리기도 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행복해하고 있잖아. 비록 십 개월 남짓한 짝사랑이지만, 난 진정으로 그 사람을 좋아했다고 생각해. 그러니깐 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했다면 그 사람의 진짜 행복을 위해 보내주는 용기도 필요하지 않을까?”

현욱은 남은 잔마저 단숨에 비웠다. 영섭은 그의 잔을 채웠다.

“속으론 속상해 죽을 것 같으면서 끝까지 멋있는 척 하기는… 가식적인 놈! 근데 내가 너한테 친구로서 진지하게 얘기하는데 네가 정말 혜린을 좋아한다면 이렇게 비겁하게 피하지는 마라!”
“비겁한 게 아니잖아. 이미 그 사람한테는 사귀는 사람이 있잖아.”
“그래, 말 잘했어. 사귀는 사람이 있지. 근데 둘이 사귀는 사이일 뿐이지 결혼했어? 아니잖아! 그리고 골키퍼 있다고 골 안들어가니?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면 안되는 법이라도 있어? 네가 정말 혜린을 좋아한다면 거절당할 것에 두려워하지 말고 너의 그 솔직한 진심을 얘기라도 해. 물론 이미 사귀는 사람이 있으니깐 실패할 확률이 훨씬 높겠지만, 너랑 혜린이랑 천생연분이라면 기적이 일어날 수도 있고, 이렇게 가슴앓이하면서 혜린에 대한 마음을 죽이는 것보다 직접 남자답게 하고 싶은 말다하고 후련하게 털어내는 게 훨씬 멋있다고 생각하지 않아? 아니면 그 남자랑 헤어질 때까지 혜린에 대한 마음을 고이 간직하고 있을래? 그러다 만약 둘이 결혼이라도 한다면 어떡할래? 만약 그렇게 되면 정말 너만 멍청한 놈 되는 거야.”

현욱은 영섭의 설득에도 그리 내키지 않은 표정이었다.

“내 속편해지고자 그렇게 그 사람에게 부담주고 싶지도 않고 그건 정말 무모한 짓이야.”
“용기가 없는 게 아니고?”
“그건 용기가 있고 없고가 아니라 그냥 나 혼자만 좋아한 것뿐이잖아. 나만 드러내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거잖아.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차차 자연스레 잊어지겠지. 결국 그렇게 잊으면 되는 거잖아.”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차라리 이참에 깨끗이 마음정리도 할 겸 너무 먼 곳에서 찾지 말고 미란이하고 좋은 관계로 맺어보는 건 어때?”

현욱은 바로 인상까지 찌푸리며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게 질색할 것까지 없잖아. 그리고 미란이가 어때서! 네가 혜린이한테 정신 팔려서 뭘 모르는 가본데 얼마나 인기가 많다고! 얼굴 예쁜 것도 모자라 귀엽지, 성격은 또 사근사근한 게 얼마나 좋아? 막말로 혜린이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한 건 또 뭐있어? 미란이가 네 놈한테 먼저 인사해주고 말 걸어주니깐 기고만장 하는가 본데 딴 놈들은 반대로 먼저 인사하고 말 걸려고 난리도 아니다.”
“나도 미란이가 인기있는 건 알아. 그런데 왜 자꾸 그 사람 얘기하고 비교해? 그리고 미란이는 내가 혜린을 짝사랑하고 있는 사실을 뻔히 알고 있는데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니?”
“얼씨구! 그래도 완전 마음은 없지는 않은가 보네?”

놀려대는 영섭의 말투에 현욱은 답답한 얼굴로 앞머리를 긁적였다.

“자꾸 헛소리 지껄이지 마라. 차라리 딴 여자라면 모르겠는데 미란은 절대 안돼!”

강력한 부정에 영섭은 수상한 눈초리로 그 이유에 추궁했다. 현욱은 은경과 얽혔던 일을 구태여 밝히고 싶지 않아 대충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래도 영섭은 더욱 눈을 반짝이며 캐묻자 말하기 싫어서라도 입에 잔을 댔다. 그때 출입구를 열고 미란이 들어섰다.
2009-01-11 23:3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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