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만은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아시아축구를 주름잡던 강호였다. 대륙이 공산화된 후 상하이와 텐진에서 과거 중국대표선수들이 대거 대만으로 들어와 중화민국 대표선수가 되었던 것이다.
상하이와 텐진은 일제시대에 아시아 축구의 중심이었다. 개방된 국제도시답게 온갖 국적의 외국선수들이 상하이와 텐진으로 몰려들었던 것이다. 해방 직후 미군정기에 한국에서도 원정팀을 꾸려 상하이 원정을 갔다는 기록이 있다. 상하이에는 제대로 된 프로축구리그가 195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다고 한다.
그랬던 대만 축구가 1960년대 후반 들어 급속히 몰랐했다. 중국대륙의 정세가 안정되면서 중국공산당이 축구육성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던 것이다. 그러자 대만의 장개석 총통은 축구로는 대륙을 이길 수 없다고 판단하고 친일친미의 스포츠 야구 육성을 지시했다. 그 이후 대만에서 운동에 소질이 있는 어린이들은 '리틀야구단' 회원이 되었다. 1970년대의 대만은 '리틀야구의 나라'로 전세계에 알려졌다. 실로 야구에 올인한 것이다.
대만 축구는 유스 육성에 외면함으로써 1960년대 이후 급속 몰락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970년대 후반에는 성인축구팀이라고는 대학팀에 단 두 개만 남았다. 축구를 하는 어린이들이 없으니 대학의 체육교육과 학생들이 취미로 축구를 하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이다. 대만 출신으로서,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인 오사다하루(왕정치)의 존재는 대만인들의 야구 편향을 더욱 부추겼다.
1994년 월드컵에서 한국이 스페인에게 2-2로 비기고 독일을 2-3으로 물고늘어지는 등 전 아시아를 놀래키자, 대륙의 등소평과 대만의 리덩휘는 동시에 중국도 축구 육성을 해야 한다고 내각에 지시한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야구하던 자들이 없어 등소평의 지시가 먹혔지만 대만에서는 야구인맥이 워낙 강고하여 축구가 뿌리를 내릴 여지가 없었다. 야구가 성하는 한 축구가 자리잡을 수 없음은 대만의 사례가 극명하게 제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