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주식대박터뜨리기
<1화> 저놈의 팬티를 벗겨라
 주식대가
 2008-12-21 21:13:48  |   조회: 2319
첨부파일 : -
그 해 겨울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세상은 멀쩡했지만 내 인생은 더없이 참혹하게 거덜난 지 오래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 해 겨울은 유난히 쓸쓸하고 으스스했다. 순식간에 와르르 무너진 건물의 잔해들을 숙명처럼 끌어안은 폐허 속에서 나 홀로 병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두 발을 딛고 있던 대지가 폭삭 꺼지듯 계절이 깊어지는가 싶더니 날씨도 꽤나 추워졌다. 낮게 드리워진 구름 탓이었을까. 잔뜩 찌푸린 하늘이 탁하게 내려앉는 통에 불어오는 바람조차 스산한 12월 하순이었다.


온몸이 후들후들 떨리도록 매서운 혹한의 날씨가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밤 11시쯤, 나는 서울특별시 구로구 가리봉동 3층 건물 안에 연약한 초식동물처럼 갇혀 있었다. 그저 살려 달라고 빌고 싶었다. 건물 한쪽 창문으로 겨울밤의 칼바람이 달려들 때마다

삐익삐익 신음 소리가 들려 왔다.


"아! 제발 이러지 마세요!"


나는 쥐어짜듯 비명을 내질렀다. 한겨울의 냉기가 썰렁하니 감도는 그 어두컴컴한 2층 사무실 안에서, 나는 유괴당한 아이처럼 찌걱찌걱 울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고백하자면, 아주 낯설고 허름한 공간 안으로 끌려 들어가 조직 폭력배들의 협공에 맥못추고 있었다.


"때려죽일 놈! 내 돈 언제 갚을래?"


조폭의 중간 보스격인 박광식이 누르스름한 빛살을 뿜어 대는 형광등을 이고 선 채 눈을 부라렸다. 내 귀싸대기를 대여섯 차례 올려붙인 그에게 죽기 살기로 맞서고 싶었지만 차마 오기를 부리기 어려웠다. 얼얼한 두 뺨을 쓰다듬던 나는 굴욕감을 맛볼 때일수록 침착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그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자존심이란 허영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저 살려 달라고 빌고 싶었다.


"박 사장님, 돈을 마련할 시간을 주셔야지요."


나는 정신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결박당한 신세나 다름없었다. 말이 좋아 사무실이지, 옛날 어떤 정보 기관의 지하 취조실 같은 그 창고 안에서 탈출할 수 있는 구멍은 철제 출입문 하나밖에 없었다. 마주 보고 있는 두 개의 창문엔 제법 굵직한 방범창이 설치된 데다가, 네 명의 우락부락한 사내들에게 포위되어 탈출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한 나는 가능한 한 차분하게 대처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어느 새 뜨거운 물기가 또 한번 내 볼을 적시기 시작했다.


"다시 묻겠다. 내 돈 언제 갚을래?"


박광식은 내 귀싸대기를 두세 차례 더 갈기고 나서 성난 진돗개처럼 이를 빠드득 갈았다.



"박 사장님, 제 말 좀 들어 보세요."


대한은행 입사 동기 박광호의 동생이자 나이로 4년 연하인 박광식 앞에서도 나는 반말을 꺼내지 못했다. 자포자기 상태에서 막다른 길로 내몰려 인생의 환멸에 발이 묶인 지 오래였으므로 나이와 자존심을 따질 계제가 아니었다. 모멸과 수치를 이기면서 목숨을 구걸하는 내 자신이 너무 가증스러웠지만, 그래도 순간 순간을 견디기 위해 그들이 명령하는 대로 배를 넙죽 깔고 진흙바닥을 기는 것처럼 무기력하게 나를 내던졌다.





저놈 팬티마저 벗겨라!



"이 등신아, 징징 짠다고 물러설 내가 아냐! 솔직히 말해, 나는 좆나게 무식하거든. 그래서 한번 물어뜯기 시작하면 끝장을 봐야 돼!"


박광식이 긴 대나무를 손에 움켜쥐었고, 부하 조직원으로 보이는 세 명의 청년들도 거무스름한 쇠파이프를 하나씩 집어 들었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면서 눈앞이 캄캄해졌다. 불구가 되거나 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진저리를 쳤다.


"얘들아, 도저히 안 되겠다. 저놈 옷을 벗겨라!"


박광식이 쉬어 터져 갈라지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그는 저질 액션 영화 속의 중간 보스처럼 우람한 덩치의 졸개들을 등진 채 벽을 향해 열중쉬어 자세로 서 있었다. 두 손에 틀어쥔 대나무가 그의 허리춤에서 바들바들 떨었다.


"제, 제발……."


젖 먹던 힘까지 뽑아 내며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 코트와 양복이 우악스런 손길에 벗겨지고 팬티 차림이 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옷 벗기기 작전을 잽싸게 마친 졸개들이 쇠파이프를 다시 주워 들더니 내 등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그 때였다. 쿵! 쿵! 쿵! 쇠파이프로 시멘트 바닥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가 저승사자의 목소리처럼 나를 위협했다.


"얘들아, 홀딱 벗겼니?"


여전히 등을 보이고 서 있던 박광식이 낮은 어조로 으르렁거렸다. 나는 내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일어서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묻겠다. 홀랑 벗겼느냐?"


"형님, 빤스만 남았는데요……."


겁에 질린 졸개 한 명이 말끝을 흐렸다. 불길한 예감이 송곳처럼 가슴 한복판을 찔렀으므로 나는 다시 한번 오들오들 떨었다. 책상 한 개와 철제 의자 대여섯 개만 달랑 놓여져 을씨년스런 사무실 안은 옷을 입고 있을 때도 몹시 추웠는데, 팬티 차림이 되자 사지가 걷잡을 수 없이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낡은 석유 난로가 사무실 바닥의 한복판에 놓여 있었으나 겨울밤의 꽁꽁 언 몸을 녹이기엔 역부족이었다.


"얘들아, 빤쓰도 마저 벗겨라!"


굵고 긴 대나무를 손에 쥔 박광식이 돌아서더니 뚜벅뚜벅 다가왔다. 그 순간, 치매에 걸린 노인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졸개들이 달려들어 내 팬티마저 벗겨 냈다. 숨통을 바짝 조일 것 같은 공포가 가슴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정말이지, 시중에 떠돌던 루머가 사실인 모양이었다. 악덕 사채업자의 청탁을 받은 조폭 해결사들이 어떤 사내의 ‘남성을 거세했다’는 소문을

떠올리며 나는 몸서리쳤다.


"좆같은 놈의 좆이라 그런지 진짜 좆같이 생겼네, 씨발!"


"……."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불길한 조짐 앞에서 눈을 질끈 감았다. 박광호 과장과 박광식 사장. 두 형제는 내가 갚지 못한 금융기관 대출 원리금 5천여 만 원을 대신 끌어안고 발버둥치는 중이었다. 연대 보증 채무 원리금 5천여 만 원을 비롯해 몇 억 원의 빚을 갚던 와중에서 그들도 나 못지않게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지은 죄가 너무 많아 쫓기며 견디던 나는 그 빚쟁이들에게 운명을 맡기기로 했다. 알거지 신용불량자로 전락한 나와 박광호, 우리 두 사람 때문에 박광호의 가족이 맞은 날벼락에 비하면 이런 수모는 별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계속)
2008-12-21 21: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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