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욱 소설게시판
Memories... <제 7 회>
 JUP STORY
 2008-12-10 17:06:53  |   조회: 13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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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점 ‘리플레이’로 들어서자 신입생들의 입학을 축하하는 현수막이 한쪽 벽면에 크게 자리 잡았다. 길게 늘어진 테이블에는 선․후배들이 섞여 자리를 채웠다. 신입생들은 돌아가며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로 여념이 없었다.

한편 한 테이블에 영섭과 나란히 앉은 현욱의 표정은 그다지 달갑지 않았다. 물론 혜린이 참석했지만, 저만치 떨어져있는 상황에다 다른 사람들에 가려 얼굴조차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이런 와중에 신입생들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과대표로 보이는 한 사내가 간단하게 환영사를 읊고는 축배제의와 함께 본격적으로 분주한 술자리로 탈바꿈했다.

영섭은 어느새 취기에 약간은 상기된 표정으로 특히나 여자 후배들에게 술을 따라주며 주절거리는 반면 현욱은 묵묵히 앉아 은근슬쩍 혜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혜린 주변에는 동기나 선배들은 물론 후배들까지 모여드는 바람에 더 이상 그녀의 얼굴은커녕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영섭은 여전히 여자 후배들과 주절대느라 신났다. 자신의 답답한 심정은 전혀 모른 채… 아니, 알아주지도 않는 영섭이 괜스레 꼴사나웠다. 결국 현욱은 채워진 술잔을 단숨에 비우며 타는 마음을 달랬다.
그때 맞은편에 앉은 한 여자 신입생이 술병을 내밀었다.

“선배,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현욱은 어색하게나마 술을 받았다.

“어… 고마워…”

술잔이 조금 채워질 때 그녀가 말했다.

“근데… 선배는 저 모르시겠어요? 전 선배를 단 번에 알아보겠던데…”

현욱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우선 술잔을 내려놓았다.

“글쎄, 나는 기억이 안 나는데… 어디서 봤더라?”
“오늘 낮에 도서관에서 선배랑 부딪혔잖아요.”

이제야 생각이 났는지 ‘아!’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도서관에서 혜린을 몰래 훔쳐보다 부딪혔던 그 여학생, 미란이었다. 어깨에 닿을 듯 말 듯한 머리길이에 옅은 화장기 하며 동그랗고 커다란 눈과 조금은 도톰한 아랫입술이 제법 귀여웠다.

“응, 기억나네. 정말 어디 다친 곳은 없지?”
“네, 괜찮아요.”
“그럼 다행이고…”

현욱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더 이상 대화는 이어지지 않았다. 주변은 아직도 시끌벅적한데 현욱과 미란 사이엔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현욱은 애꿎은 술잔만 만지작거렸다.

그때 미란에게 선배로 보이는 한 사내가 술병과 잔을 들고 들이댔다.

“우리 귀여운 후배 이름은 뭐지?”

갑작스런 남자선배의 출현에 미란은 순간 흠칫했다.

“하미란이라고 해요.”

남자선배는 능글맞게 미란에게 온갖 칭찬을 늘어놓더니만 때마침 비워진 미란의 옆자리에 아예 눌러 앉았다. 그리고 자신의 술잔을 건네곤 무작정 술잔을 채우는데 이미 취기가 오른 상태라 그만 잔이 넘쳐 미란의 손을 적셨다.

게다가 빨리 마시라는 남자선배의 재촉에 짜증마저 났지만 차마 그런 기색조차 내지 못했다. 그저 빨리 젖은 손을 닦고 싶다는 마음에 얼른 술잔을 비우고 싶은 마음도 간절했다. 하지만 그 술잔이 그 남자선배 것이란 게 거슬렸다.

이 난감한 상황을 벗어나고자 간절히 흑기사가 나타나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리저리 눈을 돌렸지만 마주앉아 있는 현욱을 제외하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취상태이거나 주절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물론 현욱도 미란의 처지 따윈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즐거워하는 혜린을 지켜보는 데 여념이 없었다.

이번에도 혜린에게 다가가기엔 인간으로 만들어진 방어벽이 한없이 높았고 너무나 견고했다. 옆에 있던 영섭마저 어느새 다른 테이블에서 사람들과 떠들썩하게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이유는 없었다. 현욱은 미란이 채워준 술잔을 단숨에 비우곤 자리에서 홀로 일어났다.

주점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아직도 혜린의 주변만 맴돌거나 먼발치에서 지켜볼 뿐, 자신의 존재조차 알리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과 어리석음이 이유였다. 지하철역에 들어서도 현욱의 낙심한 표정은 사리지지 않았다.

이제 곧 열차가 도착하니 안전선에서 물러나라는 안내방송이 들여왔다. 현욱은 긴 한숨과 함께 무심코 열차가 들어오는 터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렌지빛 열차 전등이 터널에서 빛나고 있을 무렵 미란이 보였다. 깜짝 놀란 현욱과는 달리 미란은 태연하게 다가왔다.

“이제야 아는체 해주네요.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5분 넘게 선배만 쳐다봤는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열차가 도착했다. 하차하는 승객을 보내고 열차에 올랐다. 빈자리가 보이지 않아 반대편 출입문에 나란히 섰다. 열차가 다시 출발하고 몇 정거장을 지나쳐도 현욱은 멍하니 창밖만 바라볼 뿐 입을 열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미란이 슬쩍 눈치를 보며 먼저 말을 건넸다.

“어디까지 가세요?”

뜬금없는 질문에 현욱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잠실. 너는?”
“저는 삼성역에서 내려요. 근데 선배는 내 이름 모르죠?”

신입생 환영회동안 마주 앉아있는 미란보다는 저만치 떨어져있는 혜린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에 당연히 알 리가 없었다. 현욱은 괜히 미안한 나머지 머쓱했다.

“미안…”
“괜찮아요. 저도 아직 선배 이름을 모르는 걸요. 전 미란이라고 해요. 하미란.”
“나는 신현욱.”

통성명을 하자 그나마 조금은 어색한 분위기가 풀렸는지 현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아직 9시도 안됐는데 벌써 집에 가? 신입생 환영횐데 좀 더 놀다가지…”
“계속 있다간 여기저기서 선배들이 주는 술만 먹을 것 같아서요. 그러는 선배는 왜 벌써 가요?”

차마 혜린과 친해지고 싶어서, 혹은 자신의 존재감을 혜린에게 각인시켜 주고 싶어서 기껏 신입생 환영회에 참석했는데 역시나 이번에도 무리라는 생각에 나왔다는 등의 구체적인 이유는 말할 수도 없고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피곤해서…”

현욱은 대충 얼무부렸다.
그때 열차에서 다음이 잠실역이라고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제 구태여 어색한 대화를 할 필요가 없으니 그의 표정은 한결 가벼웠다. 내릴 출입문으로 다가설 때 미란의 목소리가 들여왔다.

“근데 선배…”

현욱이 고개를 돌리자 미란은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아니, 혜린선배 좋아하죠?”

현욱은 화들짝 놀랐다. 도서관에서 부딪히고 신입생 환영회에서 마주친 것이 고작인데… 어떻게 혜린을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는지 놀라움과 동시에 그 경위가 궁금했다. 하지만 그 궁금증을 해결하기보다 우선은 완강히 부정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애써 침착한 표정으로 말했다.

“응? 누구? 네가 뭔가 잘못 알고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누굴 좋아하는 게 잘못된 일은 아니잖아요.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거, 누군가를 좋아할 수 있다는 거, 사랑이야말로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감정이 아닐까요?”
“그렇지. 네 말이 맞긴 맞는데 정말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구나.”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와 차마 붉어진 얼굴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현욱의 그런 모습에 미란은 더욱 확신했다.

“저 다 봤어요. 도서관에서 혜린 언니 지켜봤잖아요. 그리고 좀 전에 환영회에서도 혜린 언니 있는 곳만 뚫어지게 쳐다봤잖아요. 내 말이 틀려요?”

혹시나 혜린을 향한 마음을 영섭을 제외하고는 다른 누군가에겐 들키고 싶지 않아 나름대로 주의하고 또 주의했다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기껏 두 번밖에 마주친 미란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들켜버릴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마치 발가벗겨진 마냥 부끄러웠다. 더 이상 부정해도 우스울 테고 그렇다고 긍정은 하고 싶지 않았다. 미란을 외면한 채 나직하게 말했다.

“부탁인데, 그 일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는데…”

미란은 조금도 지체 없이 그의 부탁에 응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열차는 잠실역에 도착하고 이윽고 출입문이 열렸다.

“그럼 먼저 갈게.”

조용히 인사를 내뱉고는 재빨리 열차에서 내렸다.

“네, 안녕히 가세요.”

등 뒤에서 미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여왔다.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물론 그것이 자신의 지나친 생각임을 알고 있지만 불편한 마음은 쉽게 떨쳐버릴 순 없었다.
발걸음을 재촉하며 여러 계단들을 거쳐 지하철역에서 빠져나왔다. 너무 서둘렀더니 조금 숨이 차올랐다.

여태 학과 행사 따윈 무심하다 신입생 환영회를 계기로 혜린과 조금이라도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참석했는데 다가가보지도 못할 노릇이었으니 친해지기는커녕 여전히 자신의 존재조차 알리지 못했다. 게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하필이면 전혀 생각지도 못한 후배에게 혜린을 향한 마음마저 들켜버리다니…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거렸다.

더욱이 혜린과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는 가장 자연스럽고 유일한 기회라며 신입생 환영회 참석을 부추긴 영섭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휴대전화가 진동해 주머니에서 꺼내어 확인했다. 바탕화면에 ‘나은경’이라고 나타나자 그의 표정은 좀 전보다 더욱 심상치 않았다. 받지 않은 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계속 진동해도 무심하게 걸었다. 어느덧 진동이 멈춘 듯하더니 몇 발자국가지도 않아 다시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이번엔 진동이 짧은 것으로 보아 문자메시지였다.

「잘 지내고 있어? 그냥 네 생각이 나서 말이야…^_^;;」

수신자 이름은 ‘나은경’이었다. 이번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다시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을 찰나에 또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역시나 수신자 이름은 ‘나은경’이라 표시됐다.

「솔직히... 네가 너무 보고 싶네...^0^ 문자 확인하면 연락줘~♥」

현욱은 냉정하게 금방 도착한 두 통의 문자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리고 전화번호를 뒤적거렸다. ‘나은경’이란 이름과 전화번호는 물론 전자우편주소와 생일, 게다가 사진까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었다.

그동안 깜박한 것일까? 아니면 쓸데없는 미련에 차마 지우지 못했던 것일까? 아마 전자일 것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이내 미련 없이 삭제버튼을 눌렀다.
2008-12-10 17:0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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