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영 칼럼] (4) 의학은 진보했으나 의료는 퇴락했다.
[오순영 칼럼] (4) 의학은 진보했으나 의료는 퇴락했다.
  • 오순영 가정의학과 전문의
    오순영 가정의학과 전문의
  • 승인 2024.03.26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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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허무주의는 의학이 질병을 치료하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해가 된다는 생각이다. 18·19세기는 치료 허무주의(Therapeutic nihilism)가 유행할 만큼 의학의 취약성이 충분했다. 이 시대는 현대의학의 문이 열리기전 혼돈과 개척시대였다. 많은 발견과 발명 그리고 도전이 있었으나 실패와 좌절도 많았다. 의학과 미신이 혼재돼 있었고, 엉터리 약장사들과 돌팔이들이 마을을 돌며 약을 팔고 시술을 하며 떠돌아 다녔다. 미국의 의사인 올리버 웬델 홈스(1809년 ~ 1894년 )는 “모든 현대의학이 바다에 던져진다면 인류에게 더 좋을 것이고, 물고기들에게도 더 나쁠 것”이라고 말하여 당시 의학을 비꼬았다.

치료허무주의는 흑사병을 일으키는 흉측한 쥐들이 어두운 파리의 뒷골목을 기어 다니던 1500년대 유럽에서 흔히 있었다. 몽테뉴의 수상록 전반부는 치료 허무주의로 가득하다. “인간이 제아무리 신중을 기한다고 한들 매 시각 그들을 위협하는 위험에 충분히 대비할 수는 없다.” “태어난 첫날부터 그대는 삶을 사는 동시에 죽음을 사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의학은 완성되었으므로 더 이상 발전할 필요가 없다는 견해도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2500년 전에 쓰인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는 ‘고대 의학에 관하여(De prisca medicina)’라는 일종의 논문이 있다. 이 논문의 저자는 자신이 생존했던 기원전 5세기 이전에 진정한 ‘의술’이 이미 존재하였으며, 이 전통의술은 확고하게 정립된 ‘테크네(technē 기예)’이기 때문에 우연과 확연히 구분된다고 말하고 있다. 전통의학을 불신하는 논적들이 의학에 새로운 휘포테시스(kainē hypothesis)를 도입하려고 하자, 의학은 오랫동안 위대한 발견을 이룬 고유한 원리와 방법을 이미 갖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한의학도 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의학사상사를 쓴 여인석 교수는 ‘과학과 의학이 하루가 무섭게 진보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천 년 전에 나온 의학 경전인 『황제내경黃帝內經』에서 이론의 근거를 찾고, 사백 년 전의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따라 처방을 내리는 한의사들이 엄연히 있으며 한의사들 가운데는 한의학은 완성된 학문이므로 더 발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이들까지 있다.’고 하였다.

문명의 진보가 불평등을 유발하고, 이것이 질병을 일으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장 자크 루소( 1712~1778)다. 그는『인간 불평등의 기원론』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의술이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는 치료법보다 우리가 더 많은 병에 걸려 있다면 그것은 무엇 때문일까? 생활에서의 극심한 불평등, 어떤 사람에게는 지루한 여가가 주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는 과중한 노동이 강요되는 것, 부유한 사람들에게 변비를 일으킬 동·식물성 즙을 제공하여 소화 불량으로 괴롭히기 일쑤인 너무도 희귀한 음식들, 그나마 굶주리기 일쑤지만 경우에 따라 과식하게 마련인 가난한 사람들의 형편없는 먹을거리, 그리고 밤샘과 온갖 종류의 무절제, 온갖 정념의 과도한 흥분, 정신의 피로와 소모, 누구나 경험하며 그래서 영원토록 영혼을 좀먹는 무수한 비애와 고통.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당하는 불행의 대부분이 우리 자신의 탓이며 따라서 자연이 명령한 소박하고 일정하며 고독한 생활양식을 간직했더라면 피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되는 고약한 증거들이다. <중략> 이와 같이 병의 원천이 거의 없었으므로 자연 상태의 인간에게는 약이 거의 필요 없었고 의사는 더더욱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치료허무주의, 의학완성주의, 루소의『인간 불평등의 기원론』을 살펴보면 의학이 진보했는지 모호 할 뿐 아니라 진보의 필요성까지 의심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서양 의학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던 근대후기와 현대 초기에 있었던 획기적인 발견과 발명을 보면 그들 덕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생각과 의학은 역시 계속 진보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천연두를 퇴치한 종두법의 제너, 식수오염원을 찾아 수인성 전염병을 예방한 존 스노우, 탄저균 콜레라균 결핵균을 발견한 로베르토 코흐, 저온 살균법과 광견병 백신을 발명한 파스퇴르, 세포병리학의 루돌프 피르호, 엑스선을 발견한 륀트겐, 소독제를 개발하여 창상의 감염을 획기적으로 감소시킨 조지프 리스터, 전신마취제와 국소 마취제의 개발한 윌리엄 모턴, 제임스 심슨, 카를 콜러는 근대의학의 영웅이었다. 그러나 병소와 병인을 정확히 알게 되고, 백신의 개발로 질병을 예방하고, 환부를 소독하여 감염을 예방하게 되었지만, 이미 병균에 감염된 사람은 여전히 치료할 수 없었다. 아직까지 근대의학은 치료의 황무지였고, 치료허무주의는 황무지에 무수히 피어난 잡초였다.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1차 세계대전 후 현대의학은 드디어 항생제라는 결정적 치료제를 내놓아 치료허무주의 잡초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게르하르트 도마크는 설포닐아마이드, 즉 설파제 개발하였다.(1939년). 그리고 알렉산더 플레밍(영국),하워드 플로리(호주), 에른스트 체인(영국)은 페니실린을 개발하여 1945년에 노벨의학상을 받았다. 그 후로 항결핵제 스트렙토마이신(1950)이 개발되면서 불과 몇 년 전 만해도 목숨이 위태롭던 장미가시에 찔린 사람, 산욕열에 걸린 여성, 상처가 곪은 사람, 콜레라에 걸린 사람, 결핵에 걸린 사람, 매독에 걸린 사람이 수주에서 수개월안에 완치되었는데 그것은 기적이었으며 희망이었으며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라는 자신감이었다. 근·현대의학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의 평균 수명이 25~30세 머물러 있었던 것을 3배 이상 늘려 80세로 만들었고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의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환자수도, 병원 수도, 의사 수도 적어져야 하는데 그 반대의 일이 벌어진 것이다. 환자수가 엄청나게 늘어났으며, 대도시의 건물 중에 크고 웅장한 건물은 병원 건물이 되었고 대로변에는 병의원이 즐비하게 되었다. 의사가 너무 많아서 친척 중에, 혹은 친구의 친구 중에 의사가 없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당뇨, 고혈압, 관절염, 현기증, 배뇨장애가 있는 노인 환자 한명은 종합병원에서 내분비 내과, 순환기 내과, 정형외과, 이비인후과, 비뇨기과에 간다. 한곳에서는 피를 뽑고, 다른 한곳에서는 뇌 MRI를 찍고, 다른 곳에서는 무릎 CT를 찍고 다른 곳에서는 전립선 초음파 검사를 받는다. 종합병원은 1명의 노인 환자로 5명분의 돈을 버는 것이다. 가는 곳마다 검사를 받고, 약을 처방받아 집에 돌아오는 노인은 기진맥진하지만 올 때 받아오는 한보따리 약이 자신을 건강하게 만들어 줄 것 같아 하루의 노고가 풀린다. 그러나 보따리를 풀고 약을 먹으려 하지만, 헷갈려서 어느 약은 먹지 못하고, 같은 약을 또 먹어서 나중에는 약 때문에 병이 도지고 약을 잘못 처방받아 몸이 상했다며 약을 쓰레기통에 버린다.

의학은 분명 진보하였다. 그러나 의료는 정치에 물들고, 상업화에 물들어 순수성을 잃었다. 지나친 세분화로 효율성은 물론 인간성마저 잃었다. 대부분의 병은 자신의 잘못으로 생기기 때문에 우선 자신의 잘못부터 고쳐야 옳다는 양심은 점점 퇴화되어 극소수의 교양 있는 사람에서만 흔적으로 남아 있다. 의학은 진보했으나 의료는 퇴락하였다.

칼럼니스트 소개

오순영 원장

가정의학과 전문의,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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