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우석 칼럼] (6)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경기여고 이야기
[조우석 칼럼] (6) 청록파 시인 조지훈과 경기여고 이야기
  • 조우석 칼럼니스트
    조우석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2.0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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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태열 새 외교장관의 선친이 시인 조지훈

-그는 고려대 호랑이상 비문 전에 경기여고 교훈 만든 분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는 지금도 너무 멋져
동탁 조지훈 선생

전에 없던 일이다. 우린 요즘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68) 이야기를 여의도 국회와 신문 칼럼 등에서 자주 접하고 있다. 일단 좋다. 시끄럽고 공격적인 정치언어의 소음 속에서 우리 문학사의 큰 이름이 간혹 등장하니 그 자체로 신선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의 막내아들(조태열)이 얼마 전 외교부 장관으로 입각한 뒤끝이라서 그럴 것이다.

사실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도 시인 조지훈에 대한 여야 의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그때 “아버지 명예에 누를 끼치지 않는 게 인생의 목표다”는 조 장관의 다짐도 명문가다웠다. 그러다가 장관 취임사의 일부 문장이 알쏭달쏭해서 무슨 난수표 같다는 애정 섞인 비판도 얼마 전 제기됐다. 좋다. 시인 조지훈의 아들쯤이 되니까 그런 지적도 나오는 게 아닐까?

오늘은 시사 칼럼으로선 좀 이례적으로 시인 조지훈과 한국의 명문학교 경기여고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며칠 전에 읽었던 책 영향 때문이다. 내 경우 지난 주말 국문학자 강인숙(91) 전 건국대 교수의 8년 전 책을 꺼내 읽다가 뒷부분에서 조지훈 이야기를 발견하고 무릎을 쳤다. 강인숙 교수는 얼마 전 타계한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부인이다.

그가 쓴 책은 <서울, 해방공간의 풍물지>(박하 펴냄)이다. “나랑 비슷한 세대라서 그런지 꼭 내 얘기처럼 들리더라”는 사학자 이인호 서울대 명예교수의 말을 듣고나서 당시 바로 구입해놓았다. (참고로 이인호 교수는 1936년이며, 경기여고가 아닌 서울대사대부고 출신이다.) 그 책에 담긴 해방 전후의 풍속도 흥미롭지만, 유심히 봤던 건 시인 조지훈 얘기다.

그가 고려대 교수로 옮겨가기 전 경기여고 교사 시절의 스토리가 인상적이다. 강인숙 교수는 그로부터 국어 과목 수업을 받았던 적은 없지만, 뜻밖에도 시인 조지훈이 만들었던 교훈(校訓)과 교가 얘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북이 고향인 강인숙 교수의 경우 해방 이듬해인 1946년 경기여중(현 경기여고)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인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그 시절 회고다.

“경기여고에서의 나의 문학 수업은 교훈과 교가 수업으로 시작된다.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이게 우리 학교 교훈이다. 처음 교훈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너무 세련되어서 좀 놀랐다. 세상에 이런 교훈도 있구나 싶으니 눈앞이 환해졌다. 내게 원하던 세계가 열릴 것 같은 느낌이 왔던 것이다.”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다. 보통 학교 교훈은 지덕체(智德體), 경천애인(敬天愛人) 등 진부한 어휘의 나열이기 마련인데, 경기여고는 저렇게 달랐다니 경이롭다. 알고 보니 그건 국어교사 조지훈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진선미(眞善美)란 세 글자를 시인의 감각으로 풀어쓴 게 전부다. 그런데도 완전히 새롭게 들리고 너무도 찬연하게 다가온다.

80년이 다 된 지금도 낡았다는 느낌을 전혀 안 준다. 확인해보니 경기여고는 지금까지도 이 교훈을 그대로 이어서 쓴단다. 너무 당연한 게 아닐까? 이 이상 가는 교훈이 세상에 없는데 왜 바꿀까? 이쯤에서 떠오르는 게 있다. 시인 조지훈 하면 떠오르는 게 그가 고려대 교수로 옮겨간 1965년도에 썼다는 호랑이상 아래의 명문(銘文), 즉 그 유명한 호상비문(虎像碑文)이다.

“민족의 힘으로 민족의 꿈을 가꾸어 온/민족의 보람찬 대학이 있어/너 항상여기에 자유의 불을 밝히고/정의의 길을 달리고 진리의 샘을 지키느니/지축을 박차고 포효하거라/.../너의 기개 너의 지조 너의 예지는/조국의 영원한 고동이 되리라...”

어떠신가? 고려대 출신들이 들으면 좀 섭섭하겠지만, 경기여고의 교훈이 윗길이다. 꽤 긴 문장인 호상비문 전체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라는 글자 단 11개를 못 당한다는 게 내 판단이다. 그런데 시인 조지훈은 경기여중의 교가까지 한 세트로 작사했는데, 이 또한 좋다. 내 경우 몇 차례 낭송하니 건국 전후 당시의 사회와 교육계 분위기까지 전해져와 가슴이 저릿해왔다.

“이 겨레 귀한 뜻 이 나라 힘으로 높이 이룩한 배움의 전당/슬기에 굶주린 자 이끌고자 우리들 모여서 큰길을 닦네/전통에 빛나는 그 이름 경기여고/.../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솟아오른다, 빛은 어둠에서.”

“무슨 산 정기 받아 자라난 우리” 식의 진부한 표현은 당연히 없다. 무엇보다 “슬기에 굶주린 자 이끌고자 우리들 모여서 큰길을 닦네”가 특히 좋았다. 그 말에 많은 게 함축돼 있다. 맞다. 굳이 경기여고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이 나라 건국의 아버지들과, 우리 부모세대가 세우려하던 나라 대한민국의 무엇인가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 건국 2~3년 전 우린 이미 앞세대들은 그렇게 멋진 교가를 만들고 여성교육을 시작했다. 그 이전 구한말과 일제시대 경기여고의 교훈은 무엇이었을까? 확인해보니 부덕(婦德) 함양 즉 ‘여자의 길’을 가르쳤단다. 건국 전후로 우린 비로소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의 근대적 전인교육으로 방향을 대거 틀었으니 이거야말로 대단한 역사의 점프가 아닐 수 없다.

그런 멋진 변화를 가능케 했던 시인 조지훈의 역할을 잊을 수 없는 이유다. 고백하자. 이 칼럼은 나로서도 좀 뜻밖의 내용인데, 쓰고 보니 만족스럽다. 그래서 한 두 달 뒤에 두세 개 관련된 얘기를 더 하려 한다. 명문 서울고의 전설인 김원규 교장 이야기도 전하고 싶고, 대구 경북지방 교육계의 큰바위얼굴인 원암 이규동 선생 얘기도 할까 한다. 관심 바란다.

칼럼니스트 소개 

조우석 

현) 평론가

전) KBS 이사

전) 박정희대통령기념재단 이사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전) 문화일보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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