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치카표 라면 드셔보셨나요?
빼치카표 라면 드셔보셨나요?
  • 김봉건
    김봉건
  • 승인 2019.01.12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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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군 내무반에 언제부터 보일러가 보급됐는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적어도 내가 입대할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제대한 뒤에도 한동안은 내무반 내의 난방시설이라고 해봐야 고작 러시아식 벽난로인 페치카가 전부였다. 물론 이를 페치카라는 이름 그대로 부를 리 만무했다. 빼치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리고 고작이라는 표현은 빼치카를 향한 모욕에 다름 아니다. 왜냐하면 생각보다 성능이 무척 뛰어나기 때문이다.

동계 기간으로 접어들면(대략 9월 하순쯤이었을 것 같다) 각 내무반에는 이 빼치카를 관리하는 병사 한 명씩을 의무적으로 두게 된다. 부대에서는 이들을 빼치카 당번의 약자인 ‘빼당’으로 불렀는데, 이들에게는 특수 임무와 동시에 특전이 부여된다. 이에 당첨되면 각종 훈련 등 모든 일정에서 열외가 된다. 아침 점호를 위해 일찍 일어날 필요도 없다. 오로지 겨우내 빼치카만 꺼뜨리지 않고 관리하면 나머지 시간은 잠을 자든 헛짓거리를 하든 모든 게 자유다. 덕분에 고참들이 서로 이 빼당에 눈독을 들이면서 이를 놓고 치열한 쟁탈전이 벌어지기도 한다.

각설하고, 이 빼치카는 군에서 보급해준 검은 색 탄가루(정확한 이름은 잘 모르겠다)를 물과 일정한 비율로 잘 섞어 찰지게 반죽하는 게 핵심 포인트다. 그래야 불이 한 번 붙은 뒤 웬만해서는 잘 꺼지지 않기 때문이다. 너무 되게 해서도 안 되고, 물론 너무 물러도 좋지 않다. 가장 적합한 황금 배합이 바로 빼당의 실력을 좌우하는 요소다. 대개 도시 출신보다는 시골 출신들이 이 빼치카에 강한 면모를 드러내곤 한다.

빼치카의 화력은 어마어마하다. 한 번 생각해보라. 한 내무반에 적으면 2,30명부터 많게는 6,70명까지 동시에 생활해야 하는 공간이거늘, 이 공간 전체를 오롯이 빼치카 하나로 훈훈하게 하려면 얼마나 성능이 좋아야겠는가 말이다. 빼당의 실력이 너무 좋으면 겨우내 속옷 바람 만으로 내무반에서 생활해야 할 정도로 화기는 대단한 종류의 것이었다. 너무 더워 정신이 혼미해지고 잠을 잘 수 없는 지경으로까지 만든 빼당도 간혹 존재했다. 그런데 그분이 나보다 훨씬 계급이 높은 고참이라면 끽소리도 못한다는 사실은 안 비밀이다.

지금도 빼치카 하면 아련하게 떠오르는 사실 하나가 있다. 반합을 이용하여 끓여먹는 라면의 맛이다. 영하 20도를 하회하는 겨울철 새벽, 보초근무를 마치고 내무반으로 복귀하여 빼당과 함께 끓여먹는 라면의 맛은 지금도 잊히지를 않는다. 반합 뚜껑을 열고 물을 적당히 부어 라면과 스프를 한꺼번에 넣은 뒤 빼치카의 불구덩이 속으로 반합을 밀어 넣으면 사방으로부터 열이 가해지면서 순식간에 라면이 익는다.

일반 조리도구를 통해 라면을 끓일 경우 바닥면만 화기가 닿게 되나 빼치카는 사방에서 열을 가하기 때문에 라면을 순식간에 익히게 하는 효과가 있다. 그 맛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조리한 라면과 절대로 비교할 바가 아니다. 과학적으로 어떤 효과 때문이라고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어쨌든 빼치카 라면만큼은 ‘엄지 척’이자 진리임이 틀림없다.

ⓒ국방일보

여기에 몰래 숨겨놓은 소주라도 가져와 한 잔 걸치는 날에는, 이곳이 과연 군대인지 아니면 천국인지 헷갈리도록 만들기에 꼭 알맞다. 심지어 라면 한 개로 소주를 각 1병씩 해치우는 괴력도 발휘된다. 물론 지금 그렇게 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수 없다는 건 역시 안 비밀이다.

제아무리 맛있게 조리한 라면이라고 해도, 그러니까 그 안에 온갖 재료와 양념 등을 추가로 넣어 다양한 기교를 부린 라면이라고 해도, 아무것도 넣지 않은 채 오롯이 라면과 스프만 달랑 넣은 이 빼치카 라면의 맛을 결코 당해낼 수가 없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빼치카표 라면 드셔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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