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난 병에 걸려도, 차에 치여도, 뺨 한 대라도 맞아선 안 된다. 이 큰 저택과 재력을 감안했을 때 일백 명의 '군대' 가 필요하다. 보안 업무의 특성상 2 교대로 근무조를 짜야하고, 휴일과 병가를 고려하면 상주인력이 40 명......40 명이면 저택 보안과 외부 수행시 필요한 인력이 될 것 같다. 비상시 전원근무 땐 일백 명이 철통 경비해야 한다. 보안을 위해서 정문 앞 골목을 사이에 두고 집 두 채를 미리 매입했다. 리모델링 확장을 해서 한 채는 직원들 체력 단련실로 쓰고, 한 채는 직원 식당과 숙소로 개조했 다. 그러나 무엇보다, 이런 실질적 이용 용도보다는 저택 주변의 외곽 경비 개념 차원에서 외부 주택 은 필요했다. 앞으로 더 주변 주택을 매입할 계획이다. 그런데 누굴 보안실장에 앉힐 것인 지가 고민이다. 경호능력과 두뇌가 동시에 필요한데...... 청와대 출신 중에 알아볼까? 아! 그렇지! 그 사람을 왜 잊고 있었지? 과거 종교 문제로 교도소에 있을 때였다. 스므 살짜리 호리호리한 꽃미남-내가 생각해도 난 충분히 여자들의 주목을 받을 만큼은 생겼다.- 이 신입으로 들어오자, 몇몇 거물급 재소자들이 자기 방에 넣어 달라고 근무자에게 말하고 있었 다. 원칙적으로 신입이 들어오면 신입방에서 며칠 대기하다가 작업장이 배치되면 정식으로 방이 배정 된다. 그런데 이 곳도 나름 사회인지라 은밀한 거래와 어물쩍거림이 있었다. 그래서 이런 소란이 가능한 것이다. 그 중에 인천의 주먹 '왕갈' 이란 사람이 날 지목하며 반 강제로 끌고 들어가려 했다. 마침 복도엔 입방시간-하루 작업을 마치고 방에 들어가는 시간- 이라 재소자와 근무자들이 몰려 서 좀 혼잡스러웠고, 난 이 상황이 뭘 뜻하는 지 몰라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 그러지 마십시오!" 누군가 우렁찬 목소리로 제지하고 나섰다. 돌아보니 180 센티미터 키에 선 굵은 얼굴을 한 자가 서 있었다. 왕갈과 그 남자는 서로 얼굴을 노려보다 이내 돌려버렸다. 나중에 알았다. 몇 년간 그 안에 있다보면, 게이가 아니더라도 예쁘고 호리호리한 남자애를 타겥으로 삼는다는 걸...... 이후 난 '사식' 이란 곳에 배정받아 일하는데 재소자들이 영치금으로 라면과 아이스크림 같은 걸 사먹는 곳이다. 근데 이 곳이 아주 묘한 곳이다. 그 안에 갇혀 있는 재소자들 입장에서 보면 최고의 낙은 먹는 것 밖에 없다. 그렇다고 영치금이 많다고 해서 마음대로 사먹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보니 대전 교도소 오천 명 재소자 중 소위 잘 나가는 '왈왈이들'-거물급 내지는 목소리 큰 장기수- 의 로비도 들어왔고 '정치적인 판단' 을 해야 하는 때도 있었다. 난 이 곳에서 두 달만에 반장 자리를 제안 받았다. 이 곳은 특이하게도, 현금을 다루는 곳이라 양심수들만으로 구성돼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인정 받은 건 아니지만 하나의 문제를 처리해 주자 즉각 내가 책임자로 부상한 것 이다. 사식은 1 년전부터 재고와 회계가 맞지 않아 항상 근무자로부터 질책을 받아왔다. 문제는 간단했다. 컵라면 한 박스가 들어오면 여분으로 두 개가 더 들어온다. 아이스크림도 마찬가지고 과자도 마찬가지다. 사식에서 일하는 재소자 7-8 명이 이 여분을 항상 먹어 왔는데 문제는 여분만 먹는 게 아니라 정 규제품까지 먹어왔기 때문에 재고가 늘 맞지 않았다. 원인을 아니까 먹는 걸 통제만 하면 해결될 문제지만, 당시 반장은 이걸 묵인하고 있었고 관행이 라며 개혁의 선봉(?) 에 서길 꺼려 했다. 난 몇 가지 회계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강력한 통제를 해야한다며 반장과 언쟁을 했고 이걸 전 해들은 근무자는 주저없이 날 반장자리에 앉혔다. 전 반장은 다른 작업장으로 전출되었다. 난 여분 먹는 걸 일절 금지했고, 재고부족으로 사식이 없어질 수도 있다고 반 협박을 하며 내부 불만을 잠재웠다. 전 반장이 전출되는 걸 직접 본 동료들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따를 수밖에 없었다. 얼마후에 재고와 회계가 일치하고, 또 얼마가 지나자 재고가 남기 시작하자 남는 여분 한도내에 서 동료들이 먹는 걸 허락하자 사식의 분위기는 예전의 활기로 돌아갔다. 근무자는 날 신뢰한 나머지 교도소 전체를 혼자서 돌아다닐 수 있도록 독보권을 주었다. 사실 대전 교도소는 중구금 형무소로 지정되어 장기수들의 비율이 높았다. 복도가 얼마나 큰 지 탱크가 지나가도 될 정도다. 난 활동이 자유로워지자 이전에 날 보호해 주었던 그 남자를 찾았다. 최 형우. 선반 공장 반장이었다. 특전사 중위 출신으로 아내와 아내의 정부를 죽이고 무기수로 지내고 있었다. 라면과 아이스크림, 사제 김치를 박스에 담아 그를 찾아 갔다. 금세 난 그와 친해졌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았지만 친형제같이 지내며 좋은 일이 있으면 항상 날 불렀다. 선반 재소자중 중국집 주방장이었던 사람이 하루는 자장면을 만들었다. 재료는 근무자에게 부탁했고 그 정도의 융통성은 발휘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 먹는 자장면의 맛이란!....... 대단한 특권이다. 겨울에 난로를 때면 계란 후라이까지 해 주었다. 일반 재소자는 상상할 수도 없는 호사다. 운동을 할 때면 그는 나와 함께 편을 짜고 시합을 했다. 난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이란 걸 알고 그와의 끈을 놓고 싶지 않았다. 내가 출소하는 날, 그는 내게 양말을 선물로 주었다.-구할 수 있는 게 제한되므로 흔히 선물 용 도로 쓰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집 주소를 알려 주었다. 비록 무기수이지만 모범적이고 규율을 잘 지키면 14-17 년이면 가석방이 가능하다. 그럼 지금쯤이면 출소했을 가능성이 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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