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23)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내가 본 월남전쟁(2)
[연재칼럼](23)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내가 본 월남전쟁(2)
  • 박재균 기자
    박재균 기자
  • 승인 2022.03.03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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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남전은 내란이 아니다. 국민의 의지는?

* 파이낸스 투데이는 월남전의 영웅 서경석 장군(예비역 중장)의 승락 하에 저서 '전투 감각(Feel for Combat)'을 연재합니다. '전투감각'은 월남전 파병 당시 소대장, 중대장 시절의 전투 현장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경석 장군의 역작으로, 현재까지 초급장교의 전투 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명저입니다. 월남전 파병 장병의 고뇌와 어려움, 전투 현장의 숨막혔던 순간을 더 많은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파병 애국 용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격려하자는 파이낸스 투데이의 취지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 서장군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머나먼 타국에서 뜻하지 않게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 장병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사진 자료를 제공해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 감사하며, 참전자회에 독자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집중, 절약, 기동의 원칙 적용은?

집중은 결정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우세한 전투력을 결정적인 시간과 장소에 집중시키는 것이며, 절약이란 무조건 절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결정적인 지점에 전투력을 충분히 집중하기 위하여 조공지역이나 방어, 엄호 및 기만작전, 후퇴이동 같은 부차적인 작전에서 최소의 필수적인 전투력만을 적절히 할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기동의 목적은 움직임으로써 행동의 자유를 유지하고 적의 취약점을 이용, 적을 불리한 상황으로 몰아넣는 데 있다.

집중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충분한 전투력이 필요하고, 결정적인 목표에 집중을 하기 위해서 결정적이지 못한 지역의 전투력을 과감하게 절약해야하며, 기동이 보장되지 못하면 전투력 집중이 불가하니 이 세 원칙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법이다.

모든 전투력은 적의 힘의 중심으로 지향되어야 한다. 모든 국가의 힘의 중심은 전쟁 지도본부, 정치나 군사의 중심지인 수도, 때에 따라서는 군대 자체 또는 지도자나 군 지휘관이 될 수 있으며 특히 그 나라의 자원과 국민의 지지여부 즉 여론이 힘의 중심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미국의 당시 전략은 월맹본토를 공격하지 않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월맹의 힘의 중심이 되는 수도나 군대, 전쟁지도본부 등을 지향하지 못했다. 지향해야 할 힘의 중심이 없어졌으니 전투력을 절약하여 신속한 기동으로 집중할 대상이 없는 전쟁을 한 셈이다. 더구나 미국은 보잘것없는 월남 내의 분산된 게릴라를 힘의 중심으로 보았기 때문에 대상선정의 잘못으로 전투력을 낭비하는 전쟁을 했다.

폭발 1초 전(약진 15호)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폭발 1초 전(약진 15호)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월맹은 결정적 시기에 전투력을 집중 투입하기 위해 월맹 내에 수준 높은 정규군을 확보하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면에 월남 내에서는, 병력 절약부대로 사용된 게릴라들의 위장작전으로 인해 월남군으로 하여금 대게릴라작전을 수행하도록 전투력을 분산시켰으며 대게릴라작전만 수행하면 되는 군대로 만들어 버렸다.

기동의 원칙면에서 보더라도 월남군은 다른 나라의 정규군과 달랐다. 일부 공수부대와 해병대를 제외하고는 집 근처에 배치되거나 또는 아예 부대 영내에서 가족을 데리고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부대 주변의 대게릴라작전은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전투지역에 가족을 비롯하여 돼지 같은 가축까지 함께 있었으므로 부대 이동시에는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가족은 물론 세간 및 가축까지 싣고 다녀야 했기 때문에 신속한 기동이 상실되었고, 월맹군과 싸우기 위한 병력집중이 사실상 불가능 했다. 월남의 패배는 월남군의 미약한 전투의지도 문제였지만 군대의 분산된 배치와 무거운 짐, 전투보다는 가족의 안전을 더 걱정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의 여건이 더 큰 원인이 되었다고 본다.

지휘통일은 되었는가?

한국전에서는 유엔군이 단일 지휘체제하에 있었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 최고사령부에서 한국군까지 작전지휘를 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반면 미군이 월남전에 참전했던 기간 중 월남은 지휘의 통일을 기하지 못함으로써 전쟁의 기본원칙 가운데 하나를 위배하게 되었다.

단일화한 지휘체제 대신 협동 및 협조라는 새로운 원칙이 상호이해와 친선을 통하여 각 제대에서 활용되었다. 각급 지휘관들은 충돌을 회피하도록 신중하게 노력했으나 전투력 운용이나 작전수행에서 그 효율성은 크게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휘통일을 이루지 못해 발생하는 비효율성은 단기간 작전 시는 별로 문제점이 없으나 수년간 계속되는 전쟁에서는 사소한 갈등과 불협화음이 누적되어 나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단일 지휘체계가 없음으로 인해 부적절한 결심, 결심의 지연, 전투력 및 자원의 낭비 등을 초래하였고 타국군과의 사이에서 감정적 대립문제까지 야기되었다.

경계 및 기습의 원칙은?

경계는 전투력을 보존하는데 긴요하다. 경계는 우군부대에 대한 적의 정보활동을 거부하여 행동의 자유를 유지하고 적으로부터의 기습을 방지한다. 전쟁이란 원래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주의를 소홀히 하든지 모험을 회피해서는 안 된다. 경계는 과감한 행동과 기선제압으로 더욱 증진된다.

푸캇 훈련소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푸캇 훈련소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기습은 전세를 결정적으로 우군에게 유리하도록 전환시켜 주며 제공된 노력 이상의 성과를 획득할 수 있다. 기습은 적이 예상치 못한 시간과 장소 및 방법으로 적을 강타함으로써 달성할 수 있으며 적이 모르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적이 알았다 하더라도 효과적으로 대처하기에는 너무 늦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경계와 기습은 서로 상반된 관계에 놓여 있다. 기습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철저한 경계를 유지해야 하며, 기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적의 경계심이 이완된 시기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기습은 주로 전술적 차원에서 많이 사용되고 전략적인 기습은 힘들다. 한 국가를 공격하기 위해서 상대국이 모르도록 전쟁준비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부대전개와 보급품의 저장 및 이동은 적에게 쉽게 탄로 날 수밖에 없다. 작전적, 전술적인 기습은 각 전선에서 수없이 많은 예가 있었지만 전략적인 차원의 기습은 그리 많지 않았다.

첫 번째 전략적 기습은 1965년 미국이 처음으로 월남전에 뛰어들 때였다. 하노이 정부의 정책결정자들은 미국이 월맹에 폭격을 하지 않을 것이며 월남에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왜냐하면 미국의 군사 지도자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아시아대륙의 지상전에 미국이 개입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생각해 왔고, 또한 정치가들은 미국이 월남전에 말려들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특히 1964년 존슨대통령은 월맹에 대한 폭격은 전혀 고려한 바 없다고 공언하면서 ‘아시아국가의 자국방위는 자신들이 책임져야 하며 미군을 파병하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공식 발표했기 때문이다. 마치 1950년에 미군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김일성이 믿었던 것처럼 월맹도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미군이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던 월맹의 지도자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으며, 미 지상군의 상륙은 전략적인 기습을 충분히 달성했다.

이는 미국이 국민의 여론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었으므로 국가의 정책이 언론에 공개됨으로써 생기는 전략적 보안 및 경계에 대한 허점이 역으로 적으로 흘러들어가게 되었고, 적에게 흘러 들어간 미국 내의 여론과 의회의 정보를 월맹측이 액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기습이 가능했다. 최고 결심권자인 대통령의 입장에서 볼 때, 미 지상군을 월남에 파병해야겠다는 대통령의 결심을 적이 눈치 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국회와 여론에 정보를 누설한 시기적절한 기만작전으로 볼 수 있다.

푸퐁강 도하작전(구정공세작전)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푸퐁강 도하작전(구정공세작전)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두 번째는 월맹의 전략적 기습이었다. 1965년 미 지상군이 월남에 상륙한 이후 곧이어 벌어진 ‘라디앙’(LaDiang) 전투에서 월맹의 침공을 격퇴하면서부터 상황은 연합군에게 유리해져 갔다. 모든 지상전투에서 연합군측이 승리했으며 화력이나 기동력은 월맹과는 비교가 안되게 우세했고, 시간이 가면서 월맹군은 점점 더 비틀거렸고 연합군측의 전투력은 극에 달했다.

연합군측은 전쟁에 대해서 낙관적인 전망을 하면서 한국이나 다른 여러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전쟁이 곧 끝날 것으로 판단했다. 미국의 정책수립자도 그렇게 믿었고, TV를 보는 미국 국민들도 다 그렇게 믿었다. 지리멸렬해진 적들이 다시 살아나서 일격을 가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적의 공격징후는 있었지만 모두들 믿지 않았다. 이처럼 연합군이 방심하는 동안에 공산국은 월남 내부에 있는 게릴라의 역량을 총동원, 마침내 1968년 설날을 기해 미군기지와 도시 및 지방 행정기구를 목표로 총공세를 감행했다.

공세는 적보다 월등히 우세한 전투력으로 행하는 것이 상식이나 그들은 3내지 5명 정도의 소규모 단위의 자살공격까지도 전개했다. 이것이 소위 1968년의 설날공세로서 월맹군, 특히 게릴라들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월남 내의 공산주의자가 전부 노출되어 체포되는 등 조직이 와해되었고 그간 구축해 둔 공산주의 세력의 뿌리까지 흔들리게 되었다. 이처럼 전술적으로는 완전히 월맹측이 실패했으나, 한편으로 설날공세 현장이 미국 TV에 방영되자 참혹한 전선의 모습을 직접 본 국민들이 정부의 낙관적인 발표를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아 불신만 가중되었다.

전쟁은 살생을 하지 않을 수 없으며 살생의 현장은 매우 비참하기 마련이다. 그 비참한 현장이 TV스크린을 통해 안방에 전달되자 전쟁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는 미국 국민들, 특히 남편을 전쟁터에 보낸 부인들과 자녀들, 나이 어린 학생들, 자식을 전쟁터에 보낸 어머니들, 그들은 누구나 남편과 자식 및 친구들이 그런 비참한 죽음을 당할지 모른다는 착각에 깊게 빠져들게 되었다. 이것이 확산되어 미국 내 반전운동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연합군은 훌륭하게 전투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지만 미국 국민들과 많은 지도자들은 월남전을 희망 없는 불합리한 전쟁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군사적 수단을 통해서는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라고 믿게 되었다. 전술적으로는 적이 실패한 공세였으나 전략적으로는 완전히 성공한 셈이었다.

세 번째 기습은 미군측이 1972년에 감행했던 소위 크리스마스폭격이다. 이는 하노이(Hanoi)와 하이퐁(Haiphong)시에 대해 B-52 폭격기가 대거 동원되어 월맹이 월남을 무력으로 정복하려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해서 1972년 12월 29일 까지 11일간에 걸쳐 실시한 폭격이었다.

적 본토의 힘의 중심지를 집중 강타함으로써 정치, 경제, 군사적인 부분을 대량 파괴할 수 있었고, 월맹을 이듬해인 1973년 1월 15일 평화협정 테이블로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미국의 매스컴이 피폭현장의 참혹한 모습을 TV에 담아 미국 각 가정의 안방으로 보내자, 비인도적 행위라는 비난이 일어 여론을 등에 업고 의회는 대통령에게 폭격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가하게 되었다. 대통령이나 전쟁 지도본부 지도자로 하여금 전투력을 집중 사용하는데 제한을 주는 결과가 되었을 뿐 아니라 승리를 목전에 두고 전쟁을 이해 못하는 사람들의 눈치마저 보게 되었다.

호이안 마을 민가 주간 정찰 중 소대장에게 상황 보고 중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호이안 마을 민가 주간 정찰 중 소대장에게 상황 보고 중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간명(簡明)의 원칙은?

간명이란 계획과 명령이 간단하여야 혼란을 감소시킬 수 있다는 뜻이다. 목표만 보더라도 월맹은 월남의 정복이라는 단일목표에 집중하였으나 미국은 외부침략의 저지와 내부의 대게릴라전이라는 혼돈된 두 개의 목표를 위해 싸웠으며, 주월 미 군사지원단도 군사적인 문제에만 전념한 것이 아니라 월남건설이라는 복잡한 정치적 임무까지 떠맡고 있었다.

반면 월맹의 정치국과 중앙당 군사위원회는 국가적 차원에서 호지명의 일사불란한 지도아래 계획을 작성하고 전쟁을 수행했으므로 노력의 통합이 용이했으나, 미국은 소련을 견제하고 중공을 두려워했으며 전략적 지시는 워싱턴, 호놀룰루, 사이공 등에서 단편적이고 통일되지 못한 채 하달되었고 자유우방군 사이의 지휘권이 분산되어 효율적이지 못했다.

경계면에서도 역시 월맹은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전혀 알 수 없었던 반면, 미국은 의회와 매스컴에서 떠들어 댔으므로 국가기밀이 적에게 전부 노출되는 동시에 일사분란하고 조직적인 군사정책을 실행하지 못하고 혼란만 거듭했다.

또한 생활조건에서도 적은 제대의 크기에 관계없이 형편없는 환경과 열악한 조건에서 싸웠으나, 미군은 사이공을 비롯해서 호화로운 캠프의 사령부생활과 야전병사들의 생활이 현저하게 대조되었고, 이 때문에 전투원의 사기저하는 물론 월남국민들의 혐오감마저 불러일으켰다. 부대기지는 가정집처럼 쾌적함을 느낄 수 있도록 훌륭하게 만들어서 병사들을 기지 방어 작전에 묶어 놓았고, 전투력의 신속한 재배치 능력을 감소시켰다.

장차 전투지역에서 부대원의 생활기준은 적절한 선에서 선정되어야 한다. 전선의 진흙탕에서 싸우는 부하를 의식해서 간소하게 기준이 설정되어야 하며, 부대장들은 필수적인 것만으로 만족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미련 없이 버려야 하며 불편을 예사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미군과 연합군은 이를 지키지 못했다.

국민의지는?

군대는 국민의 군대이며 행정부의 군대는 될 수 없다. 국민의 지지와 참여 없이는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다. 그러나 미국은 국회의 동의 없이 월남에 군대를 보냈고, 선전포고 없이 전쟁에 참여했다. 따라서 미국의 입장에서만 보더라도 국민이 참여하지 않는 전쟁을 한 셈이었다.

월남의 입장에서도 미국이 월남건설이라는 정치적 목적까지 짊어지고 전쟁을 시작했으므로 월남국민은 전쟁뿐 아니라 나라의 정치, 경제와 같은 내치 문제까지 미국에게 떠맡겨 벼렸고, 월남의 주요 지도자는 전쟁의 승리는 뒷전에 미룬 채 정치적 분쟁만 계속했다. 공산주의와 싸워서 이길 생각은 않고 거리로 뛰쳐나와 민주화라는 명분으로 정치싸움만 반복했으며, 짧은 기간에 여러 번 정권이 바뀌었다. 일반대중은 오랜 전쟁에 지친 나머지 이데올로기에는 관심 없이 전쟁이 끝나기만 바랬다. 월남국민의 참여 없이 미국행정부가 단독전쟁을 했던 셈이다.

호이안 부대 연병장에서 작전을 떠나는 순간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호이안 부대 연병장에서 작전을 떠나는 순간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힘의 중심에 대한 방어대책은?

특히 미국이 전장에서 손을 떼고 월남이 공산화되도록 내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TV카메라 때문이었다. TV카메라의 출현은 그 특성상 종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큰 영향을 가져다주었다. 카메라는 거짓말쟁이 중에서 가장 그럴 듯한 거짓말쟁이다. 월남전 이전에는 전황보도를 라디오만으로 음성을 통해 전달하였지만 TV의 등장으로 생생한 현장사진이 안방에까지 전달되었다. 전쟁에 승리하기 위해서는 싸우려는 적의 의지를 파쇄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적의 전투력과 군사 지도본부를 파괴하지 않을 수 없다. 전쟁 자체가 살생이고 파괴이다. 따라서 비참하고 잔인하다.

그런데도 월맹의 수도인 하노이 폭격이 생생한 현장사진을 TV를 통해 보고 비인도주의라는 여론이 일어났다. 미 공군의 폭격으로 네이팜을 뒤집어쓰고 울어대는 소녀의 모습은 미국 국민으로 하여금 자국 군대의 잔인성에 대한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오류를 낳았다. 월남전쟁을 부도덕한 전쟁, 더러운 전쟁으로 여론이 들끓게 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 셈이었다.

국익을 챙기지 않고, 흥분되는 순간과 특종만을 찾아다니는 TV카메라가 이적행위를 했다. TV화면이 등장한 이후 민주주의국가에서는 전장의 생생한 상황이 세계의 각 가정에 즉시 보이게 되므로 국민여론이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렸다. 월맹측은 힘으로 싸워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미국의 힘의 중심점이 되어버린 국민여론을 향해 맹렬한 공격을 했으며, 국내 TV마저 여론을 적에게 유리하게 전개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말았다. 공산진영의 거대한 선전매체는 이에 호응하여 사실을 확대 과장하여 그들의 전쟁을 정당화시켰고, 연합군의 참전을 비인간적이며 추악한 행위로 간주케 하였으며 월남정부는 부패하여 지원과 원조의 가치가 없는 나라로 부각시켰다. 힘의 중심인 여론을 파괴하기 위해 무섭게 달려드는 적 앞에서 미국의 정신 나간 대학교수, 주교, 목사, 수녀 등 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반전단체는 월남지원을 종료시킴으로써 세계 평화를 달성하자는 악명 높은 호소문인 ‘목사의 편지’를 널리 유포시켰다. 마침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 및 청년학생들의 반전시위로 인해 힘의 중심이 된 여론은 자기 정부가 아닌 적 월맹 측으로 넘어가고 말았다.

위험에 대한 극복노력은?

공포와 위험에 대한 선입관을 가져서는 안된다. 전쟁은 언제 어디서나 공포와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며, 더 중요한 것은 상대국의 어떤 위협요소나 공포요소에 집착한 나머지 선입관이나 편견 때문에 고정관념을 갖게 되면 매우 위험하다는 사실이다. 이는 사고의 기능을 마비시켜 영원히 상대국의 위협을 극복하지 못한다.

한국전쟁 시 최초에는 위험과 공포를 느끼지 않고 오직 북괴군을 격멸하기 위한 전쟁을 수행했으나 중공군이 개입하여 인해전술로 덤벼들자, 중공본토를 공격하지 않는 이상 중공군 격멸이 어렵다고 판단한 미국은 휴전이라는 카드를 내놓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다.

2차 대전 이후 미국이 핵의 힘을 전적으로 믿고 있을 때, 1964년 10월 16일 중공에서도 핵실험에 성공했다. 이러한 중공이 월남전에서도 한국전의 예를 들면서 월남전에 개입하겠다고 위협하자 미군이나 연합군은 핵공격을 우려하여 중공이나 소련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했다.

호이안 반견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호이안 반격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특히 미국이 가장 무서워한 두려움의 대상은 소련이나 중공 및 월맹보다도 자국내의 여론이었다. 많은 미국인이 전장에서 죽거나 부상했으며, 반전운동 및 공산주의자의 선전선동 활동 때문에 미국 행정부는 자국 국민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다. 민주주의국가인 미국은 이처럼 여론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지 못했지만, 반면 공산주의 국가는 보도를 통제하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철저히 봉쇄함으로써 극복했다. 마침내 미국은 월맹본토에 대한 과감한 공격을 못한 채 월남 내부의 분산된 게릴라만 상대로 싸우는 전쟁을 하다가 끝내는 휴전협정 카드를 던져 놓고 전쟁을 마무리지어 버렸다.

부자의 전술, 가난뱅이 전술

미국의 전술은 과학기술과 장비에 바탕을 둔 전술이며 기계가 인력을 대신하니 부자가 아니면 싸울 수 없는 부자전술이었다. 당시 월남군은 미국의 원조 하에 보병은 행군하는 대신 트럭이나 장갑차를 탔으며, 최후의 돌격은 충분한 공격 준비사격이 선행된 이후에 실시하였다.

그러나 미국의 군사원조가 삭감되자, 월남군은 물자 풍족상태에서 궁핍상태로 전락했으며 월남군의 전투능력과 사기가 크게 저하되었다. 공군의 지원과 육군항공 및 포병 화력지원에 익숙해진 월남군은 미군철수로 작전지원이 중단되자 새로이 가난한 전술과 상황에 익숙하려고 노력했지만, 부자의 작전에서 가난뱅이작전으로 전환하기에는 적응시간이 너무 없었다.

반면에 적은 외국의 원조가 없을 때와 있을 때 어떻게 싸웠는가? 인도차이나 전쟁 때 처음 월맹이 온갖 수단을 다하여 입수할 수 있었던 화기는 고작 일본군이 유기한 것이거나 프랑스군에게서 노획한 소총류뿐이었다. 월맹군은 무에서 시작하여 궁핍과 고난을 겪으면서 점차적으로 성장하고 단련된 군대였다. 그들의 전쟁수행 능력은 장비에 의존하지 않고 전쟁 그 자체에만 목적을 둔 정신적인 면이 강했고 전쟁수행면에서는 가난과 궁핍을 면치 못했다. 인력으로 장비를 대신했으며 장비보다는 손과 발로 전쟁을 했다. 월남 내에서는 월맹으로부터 보급이 거의 없이 지방 주민 속에 기생(寄生)하면서 얻어먹는 전쟁을 했다. 중국 본토가 공산화되자 그때서야 중국 및 소련 양측으로부터 군사원조를 받기 시작했으며 1970년 이후에는 더 적극적인 원조를 받았다.

그러나 월남은 처음부터 적극적인 미국의 원조가 있다가 나중에는 미군도 철수하고 원조도 대폭 줄어들게 외었으므로, 월남과 월맹이 정반대 형태의 외국원조를 받았다. 월맹 측의 사기와 전투의지 및 효율성은 증대된 반면 월남군에서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났다.

국내조건은?

지형적인 조건을 보더라도 그리스,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의 나라는 반도가 아니면 섬나라이기 때문에 외부로부터 인원 및 물자가 침투되는 것을 제한하거나 방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월남은 월맹, 라오스, 캄보디아와 연하여 1천마일 이상의 국경을 접하고 있었으며, 국경지역은 분단됨이 전혀 없이 원시림과 산악지대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은 이곳을 이용하여 월맹의 지원을 받았다.

화랑무공훈장 하사송수호(번개23호훈장)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화랑무공훈장 하사송수호(번개23호훈장)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반대로 월남군은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공격하고 싶어도 미군 때문에 못했다. 또한 중요한 군사 및 민간시설을 경계하고 확보하기 위해 많은 부대가 필요했다. 촌락과 주민도 보호해야 했으며, 수색 및 공격적전을 수행하면서 예비 병력도 보유하고 있어야 했다. 전투력을 집중하지 못하고 전국 각지에 분산시켜 월맹군 공격 시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각개격파 당했다.

월남은 독립국으로 탄생된 이래, 국민의 대다수가 교육 및 지식의 수준이 낮은 가난한 나라였다. 국민들은 오랜 기간의 전쟁으로 누가 이기냐, 지느냐 하는 문제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당시 경험해 보지도 못한 완전히 생소한 정부형태인 민주주의를 채택하기엔 여건이 전혀 맞지 않았다. 민주주의 원칙을 준수하려는 노력은 있었지만 이것이 오히려 전쟁을 수행하는데 많은 곤란을 주었다. 병력동원, 탈영, 징병기피 등 국가적인 철저한 통제와 질서 확립을 해결해야 했고, 패배주의적 반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처럼 반드시 강한 통제를 취해야 할 대상에 대해서도 강압적인 조치는 할 수 없었다.

국민의 민주주의 수준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성급하게 통제력이 미흡한, 걸맞지 않는 민주주의적 방식을 채택했다. 이런 제도로는 월남국민 속에 섞여서 생활하는 친공분자를 통제하고 무력화시키는 데는 많은 결함이 있었다. 공산주의와 싸우는 나라에서 공산당 간부의 가족이나 친인척 상당수가 월남 내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었고 직간접으로 월남정부와 군부에까지 침투하여 있었다.

월남공산화 이후 상당수의 월남 잔류 언론인, 예술인, 공무원, 정치가, 고급장교들이 공산주의자로부터 그들의 공로와 자질에 상응한 보직을 받은 것만 보아도 얼마나 많은 공산주의의 첩자가 월남정부와 군부 등 도처에 잠입해서 활동했는가 하는 것을 알려준다. 월남정부는 동원정책으로 소요자원의 반 정도를 충족시켰으며, 탈영병 통제가 부실했고 징집자체가 극도로 부패했으며, 병력이 부족하여 부대교대나 휴식이 거의 없었다. 물론 군인 및 가족의 생활수준도 말이 아니었다.

인사정책면에서도 민간정부 및 군부는 다 같이 엄청난 과오를 범했다. 보직과 승진은 능력이나 업적 또는 청렴도에 근거를 두기보다는 가족이나 혈연 등 개인적 관계에 의 해 더욱 좌우되었으며, 장교나 관리들의 범법행위에 대한 처벌이 단호하지 못했고 형식적이거나 연기되었다. 아니면 적당히 넘어가버리곤 하여 기강이 확고하지 못했고 범죄예방도 제대로 되지 못했다.

환송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환송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월맹도 월남과 마찬가지로 일반 동원으로 병력을 충당했으나 월남의 제도와는 대조적으로 동원령을 엄격히 이행하였으므로 징집기피자는 거의 없었으며 징집연령 미달자도 대거 그들의 대열에 참가하였다. 일반적으로 월맹의 공산주의자들은 전체주의적 사상과 공산당이 통제하는 경찰국가의 통치방식을 통하여 전쟁하는 나라답게 후방지역의 정치적 군사적 안정 등 국내적인 질서와 평온을 유지함으로써 남과 북이 아주 대조적인 후방현상을 나타내고 있었다.

<계속>

*다음 회는 [전투감각]의 마지막회으로, 전투감각을 집필한 서경석 장군의 소회가 담긴 에필로그가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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