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21)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장기가 노출된 부상병
[연재칼럼](21)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장기가 노출된 부상병
  • 박재균 기자
    박재균 기자
  • 승인 2022.02.26 15: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전우가 부상 당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인접 전우나 위생병의 현지 응급조치다.

* 파이낸스 투데이는 월남전의 영웅 서경석 장군(예비역 중장)의 승락 하에 저서 '전투 감각(Feel for Combat)'을 연재합니다. '전투감각'은 월남전 파병 당시 소대장, 중대장 시절의 전투 현장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경석 장군의 역작으로, 현재까지 초급장교의 전투 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명저입니다. 월남전 파병 장병의 고뇌와 어려움, 전투 현장의 숨막혔던 순간을 더 많은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파병 애국 용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격려하자는 파이낸스 투데이의 취지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 서장군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머나먼 타국에서 뜻하지 않게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 장병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사진 자료를 제공해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 감사하며, 참전자회에 독자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사단작전에 투입된 지 며칠 지나 중대는 ‘루시엠’강 상류 지역에서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았다. 우리가 수행해야 할 임무는 산 하단 부에서 강을 끼고 숨어 있다가 산에서 빠져나오는 적들을 잡는 것이었다. 연대의 다른 대대들은 고지능선을 따라 포위망을 형성하고, 위에서 아래로 적을 몰아 내려오면서 수색활동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소위 토끼몰이식 수색작전이며, 이를 위해 우리 중대는 궁지에 몰린 토끼를 최종적으로 잡아들이는 사냥꾼이었다. 이러한 작전은 통상 산 위에 헬기로 투입된 병력이 능선을 따라 서로 연결하여 포위권을 형성한 후 그 포위망을 압축하면서부터 작전이 전개된다.

수색부대는 정밀수색을 했기 때문에 전진속도가 느리므로 평상시 걸으면 몇 시간 이내에 올 수 있는 거리를 최소한 3일 이상 지나야 산 하단 부에 도착하게 된다. 그러나 언제 적과 조우하게 될지 모르는 긴장된 상황이 계속 되었으므로 수색부대는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았다. 반면에 산 하단 부에 숨어서 수색부대가 몰아주는 적을 잡기 위해 며칠씩이나 기다려야만 했던 우리로서는 말할 수 없이 지루했다.

철수도하작전(약진14호)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철수도하작전(약진14호)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전장 군기를 철저하게 준수해야 하고,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 외에도 숨어서 대기하던 부대는 견디기 힘든 일이 많았다. 모기의 극성은 말할 나위 없었고, 독충이나 거머리가 득실대는 지역에 배치된 부대의 경우는 고전을 많이 했다. 개활지에 배치된 부대는 나무 그늘이 전혀 없어 한낮의 뙤약볕을 참기가 끔찍할 정도로 힘들었다. 늪지에 배치된 부대는 하루만 지나도 발가락 사이와 사타구니가 헐어버렸다.

그렇기 때문에 통상 흙을 파서 높이 쌓은 다음 우의를 깔고, 그 위에 앉아서 임무를 수행했지만 자세가 높기 때문에 적에게 쉽게 발견됐다. 또한 크레모아를 막대기에 매달아 땅에 박아 놓으면 몇 시간 뒤에는 슬그머니 늪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수류탄을 던지더라도 흙에 묻혀버렸으므로 터져도 흙만 많이 튈 뿐 파편효과는 거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적은 발가벗은 채 얼굴에 늪흙을 바르고 지렁이 기듯 기어왔다. 코앞에 오기 전까지는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중대는 저지대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산 쪽에서 숨어 내려올지도 모를 적에게 먼저 발견되지 않도록 위장을 잘 해야 했으며, 작은 호안에서 다리도 제대로 뻗지 못한 채 며칠씩 버텨야만 했다. 호를 파고 들어가 버티는 것 자체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어떻게 버티느냐 하는 수행방법이 더욱 중요하다.

전장 군기를 철저하게 준수해야 한다. 엄하게 다스려야한다. 함부로 움직여서는 절대 안 된다.

포위권을 빠져나가야 하는 적들이 우리가 배치되어 있는 지역을 눈치채게 되면 우리의 배치공간을 이용해 야음을 틈타 우회하여 빠져나가기도 했고, 약한 곳을 찾아서 기습적으로 집중돌파하는 경우도 발생했다. 특히 적의 집중돌파는 늘 예상해야 한다. 주간에는 말할 것 없고 야간에도 조기경고를 할 수 있는 조치를 해야 한다. 평상시 기지에서 소대단위로 매복 나갈 때는 적의 주 접근로 상에 조명지뢰를 설치하면 안 된다. 그러나 적의 대병력을 포위했을 경우 집중돌파를 방지하기 위해서 적의 주접근로 상에 조명지뢰를 설치해야 한다. 밤과 낮이 따로 없다. 오히려 주간에 더욱 조심해야 한다. 주간에는 쉽게 위치가 노출되고 근무자세가 이완되기 쉽기 때문이다.

적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 포위 당하면 굴속으로 잠적하던가, 삼삼오오 조를 나누어 분산하여 도주하던가, 집중하여 약한 곳을 골라 돌파하려고 하지 않겠는가? 호 앞에 위장을 위해 꽂아둔 나뭇가지나 풀이 시들지 않았는지, 호를 팠던 흙들이 노출되지나 않았는지, 대소변 때문에 냄새가 풍기지는 않는지 등을 세심하게 확인해야 한다.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것이 상책이므로 재보급도 횟수를 최소화시켜야 한다. 만약 꼭 움직여야 할 일이 있다면 서서 다니지 말아야 하며 무릎으로 기든지 포복으로 이동하든지 해서 적에게 절대로 노출되지 않도록 각별히 주의하고, 나 하나 어떠랴 하는 방심은 전장 군기 확립을 위해서 엄하게 다스려야 한다.

청룡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청룡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밤에는 긴장하지만 해만 뜨면 긴장이 풀어지기 쉬운 법이다. 낮에도 똑같은 요령과 방법으로 근무하고 감독해야만 한다. 만약 이러한 사항들이 조금이라도 소홀하게 되면 적의 집중돌파로 진지가 유린당하는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밤보다 낮을 더 조심하라.’ 낮이 되면 병력배치를 재조정해야 한다. 밤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하지만 낮에는 적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나무라든지 숲에 숨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최우선이다.

주민의 슬픔

투입된 지 이틀째 되던 날 아침, 중대의 우측 끝에서 나이가 많이 든 촌로 2명이 강을 따라 걸어 내려오다가 중대원에게 생포되었다. 통상 한국군은 아침 먼동이 틀 때쯤 매복을 마치고 철수한다는 것을 알고, 이를 피해서 내려오다가 잡힌 것이다. 우리에게 어찌나 부들부들 떨면서 빌어대는지, 고향에 계신 아버님 생각이 저절로 나면서 몹시 불쌍하고 측은해 보였다.

며칠 전 마을에서 지방 게릴라들의 강요로 보급품을 짊어지고 적의 소굴까지 운반해 준 뒤 집으로 돌아가는 촌로들이었다. 적은 산 속에서 살다보니 보급품 조달이 곤란하여 아녀자들까지 동원하여 보급품을 운반시켜 왔는데, 이들에게 한번 끌려가면 상당한 기간 동안 산 속의 적 소굴에 머무르면서 사상교육을 강요받았고, 게릴라 활동에 적극 참여하도록 위협받았다. 아마 자발적으로 나서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나이가 환갑이 넘어 머리가 하얗게 세고 주름살이 푹 패인 노인네의 이마에서 이 나라의 슬픔을 보는 것 같았다. 강압에 못 이겨 보급품을 운반해 주고 오는 길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산 속에 있는 아들이나 딸 또는 손자 손녀를 만나려고 자기 스스로 다녀오는 길인지도 모른다.

이 나라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1945년 8월 연합군의 승리로 일본이 패망하자 그들의 점령 하에서 해방되었다. 거대한 중국대륙의 남단 돌출부에 위치한 조그만 나라 월남은 외세의 끊임없는 침략 위협 속에서도 나름대로 전통과 명맥을 이어온 나라였다. 천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을 중국에 예속되어 있었고, 그 후 백년은 독립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또 다시 거의 백년의 세월을 프랑스 지배 하에 있었으며,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일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2차 대전이 끝난 뒤에도 30 여 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치른 것이 이 나라 역사의 전부이다.

1945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와의 전쟁, 그 이후에는 남북으로 갈려 북쪽에는 소련과 중공이 지원하는 공산정권이, 남쪽에는 미국과 자유진영이 지원하는 민주주의 정권이 수립되어 완전히 국가가 양분된 채 1975년까지 싸웠다.

이 노인네들은 나이로 보아서 프랑스 식민지시대에 태어나 유년과 장년시절을 보낸 후 2차 대전을 겪었고, 지금까지 30년 전쟁의 와중에서 고통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불행한 사람들이었다. 낮에는 정부군의 통제를 받았으며 밤이면 공산주의자들에게 시달렸다. 우리가 아무리 작전활동을 적극적으로 한다 하더라도 주로 주간에 많이 이루어졌고 야간에는 대부분 매복작전만 수행하고 기지로 돌아왔다.

청룡2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청룡2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월남군 역시 주간에만 활동했고, 밤이 되면 행정기관을 경계하든가 주요 교량 및 시설방호 임무만 수행했을 뿐 적의 목을 차단해서 잡으려는 야간행동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러니 밤만 되면 마을은 적의 수중으로 들어가게 되고, 양쪽 장단에 맞추자니 주민들만 고통을 받게 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서 살았다. 이념이나 체제는 알 바 아니었으며 오로지 살기 위해 줄타기를 계속하고 있는 셈이었다.

같은 마을 내에서도 정부군과 게릴라에 참여한 집들로 서로 나뉘어 있었고, 심지어 한 집안에서도 정부군과 게릴라로 나뉘어서 활동하는 일이 허다했다. 형과 동생이 서로 적이 되어 총을 겨누기도 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하는 수 없이 이런 식으로 말려들어 갈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부쪽에 협조하면 게릴라에게 시달렸고 게릴라에게 협조하면 정부군에게 시달렸으니, 모두들 무표정하고 마을 사람들은 물론 식구들끼리도 비밀이 많았다. 농사를 지으면 정부에 세금을 내고, 게릴라에게는 약탈을 당해야 했다. 농촌은 황폐해졌고 농민은 농사를 회피한 채 도회지로 떠났다. 도회지도 마찬가지였지만.

때로는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서 게릴라에게도 세금을 내야만 했다. 30년의 전쟁은 사람들을 너무 지치게 만들었고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에 대한 감각마저도 둔하게 되었다. 마을에 들어가 보면 젊은 남자가 없었다. 일은 대부분 여자와 노인이 하고 있었으며, 여자들은 전부 과부나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죽었든지 전쟁터에 갔든지 둘 중 하나였다. 그 지방 출신의 지방군인들은 아내를 보통 3명씩 데리고 살았으며 또 그것이 허용되고 있었다. 수십 년 간 전쟁으로 불가피하게 받아들여진 관습이었다.

또한 사람값이 가장 싼 편이었다. 소를 죽이면 쌀 30포대, 돼지를 죽이면 쌀 50포대에 모두 해결된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면 쌀 10포 내지 20포를 주면 오히려 고맙다고 인사를 하는 판이었다. 프랑스 식민시대부터 저항과 전쟁이 130여 년간 계속되면서 슬프게 굳어버린 인명경시 풍조였다.

이 할아버지는 이념이 무엇인지 냉전체제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단지 그의 아내와 아들 딸, 손자들 모두 함께 무사히 살아가는 것이 소원이었을 뿐이다.

우리가 주둔해 있던 지역에는 월남지방군 훈련소가 있었다. 그 훈련소의 간부들이 훈련소 뒤쪽에 있는 산 속의 적에게 탄약과 식량, 의약품 등을 뒷문으로 빼내서 트럭으로 수없이 실어다 준 사건이 있었다. 그 후 주동자가 색출되기는 했지만 사형시키거나 감옥으로 보내지 않은 채 적당히 얼버무려 버렸다는 후문이 들렸다.

출동 전 기지요란사격(약진72-1호)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출동 전 기지요란사격(약진72-1호)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푸캇’군의 군수는 육군 중령이었다.

그는 사무실에서 행정만 담당하였고 작전과 전투활동은 부군수인 어느 대위 한 사람이 전담하고 있었다. 언젠가 월남지방군의 회식장소에 초대되어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그 군수도 참석했었다. 그의 모습은 군인이 아니었다. 몸에서는 향수 냄새가 났으며, 작은 키에 가누기 힘들 정도로 살이 쪄서 배는 함지박만하고 신사복 기지로 만든 군복에 군화가 너무도 빛났다.

그를 따라온 두 딸은 화려한 옷에 귀걸이까지 치장했고 향수냄새는 주위를 진동시켰다. 이들은 싸우면서도 적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지냈다. 아버지와 자식이 피아로 섞여 있었으니 모를 수밖에. 적개심도 없었다.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싸워 이기겠다는 의지가 빈약했다. 밤이면 기지나 지키고 건물 내에서 편안히 잠이나 잤다. 목을 지키고 적과 싸울 생각조차 안했다. 밤이 되면 게릴라가 마음 놓고 돌아다니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그들은 적에게 곤경을 당하면 의례 한국군이 찾아와서 구출해 주는 것으로 늘 믿고 살았다. 밤이고 낮이고 적만 나타나면 우리를 불렀다. 보복이 두려워 모든 경계를 한국군에게 떠넘기려 한 점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그들에게는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던 것이다. 패망의 길로 빠져든 제일 큰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장기가 노출된 부상병

그 날 오전, 중대지역 전방의 고지군을 빙빙 선회하며 저공비행을 하던 미군 경비행기가 흰 종이 뭉치를 떨어뜨리고 지나갔다. 찾아서 읽어보았더니 우리 앞의 산 너머에 박격포를 짊어진 수명의 적이 이동하고 있다는 메시지였다. 즉시 대대에 보고했다. 대대에서는 전방의 고지군을 사전에 점령해서 적의 이동을 탐지하고 필요시에는 타격 하라는 새로운 명령이 하달되었다.

2개 소대규모로 책임지역을 담당하도록 하고 나머지 1개 소대와 화기소대 병력으로 새로운 임무를 수행토록 했다. 적에게 노출되지 않기 위하여 폭이 10m 정도 되는 하천을 이용해 병력을 이동시키고 매복지점을 재조정했다. 고지로 올라 갈 병력을 하천 속에 집합시켜서 새로운 임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앞산의 와지선까지는 200~300m의 개활지가 있었기 때문에 2개 소대가 전개하여 수색을 겸해 전진하다가 산 아래 와지선부터는 분대별로 작은 능선들을 따라 상호지원하면서 고지로 올라가도록 했다.

대원들이 100m정도 전진해 나갔을 때, 우리가 오르려던 산 위에서 ‘퍽’ ‘퍽’ 하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에 미군 경비행기가 알려준 적의 박격포가 순간적으로 떠올랐다. ‘ 산 위의 적이 개활지에 전개하여 움직이는 우리를 보고 박격포 사격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옆에 있던 무전병에게 적이 쏘는 박격포 소리가 아니냐고 묻는 순간, 제 1탄이 전진하던 우리 병력의 앞쪽에서 ‘꽝’하며 터졌다.

계곡에서 [사진:서경석 장군 제공]
계곡에서 [사진:서경석 장군 제공]

포탄의 분포거리가 길고 여기저기서 터지는 것을 보면 포다리 없이 포신만 가지고 사격하는 수형박격포 사격이 분명했다. 당시 적들은 운반하기 편리하도록 박격포의 포판이 손바닥만 하고 포신만 있는 61mm 박격포를 많이 갖고 있었다. 이것은 포다리와 전륜기가 없어 정확한 조준은 할 수 없었지만 구경이 60mm인 우리 측 포탄을 이용할 수 있었고, 비행장이나 부대 주둔지 등 비교적 표적이 크고 넓은 지역에 교란용으로 주로 많이 사용됐다.

적과 우리의 거리는 약 500m정도, 일부 소총사격도 날아왔다. 나는 대원들의 전진을 중지시키고, 포복자세로 최초 배치되어 있던 하천 쪽으로 다시 되돌아오도록 큰 소리로 지시했다. 즉시 포병사격을 유도하여 앞에 있던 고지를 향해 사격을 시작했다. 그러나 미처 우군의 포탄이 채 고지에 떨어지기 전에 적이 쏜 박격포탄 파편에 병사 한 명이 부상당했다.

“소대장님, 소대장님, 총에 맞았어요. 저 좀 살려주세요.”

가슴이 찡하게 저리도록 피 끓는 절규가 계속해서 들렸다. 이미 대부분의 병력은 최초의 매복진지로 돌아와 호 안으로 들어간 상태였다. 60mm 박격포 소대원들이 사격을 시작했다. 고지 정상부분에 포병화력과 중대의 박격포탄이 작렬하기 시작하면서 적의 사격은 뚝 끊어졌다.

부상당해 쓰러진 전우의 애절한 절규를 가만히 듣고 앉아 있을 사람이 있겠는가. 소대 위생병이 기어 들어가 부상병을 끌고 하천까지 돌아왔다. 소대장이 부상병을 데리고 있을 수 없어 중대장 있는 곳으로 데리고 오도록 지시했다.

계곡을 수색 시는 반드시 능선의 우군엄호를 받아야 한다.

나의 호 뒤에는 하천이 흐르고 있었고, 모래가 쌓여 있는 곳이 있어서 위생병이 부축해 온 부상병을 거기에 옮기도록 했다. 하천 옆에는 한 두길 정도 높이의 둑이 있어서 직사화기 사격을 받을 염려는 전혀 없었고, 박격포탄이 떨어지더라도 하천 가의 울창한 나무 때문에 나무 위에서 터져버리므로 안전한 지대였다.

그는 위생병에게 부축 받아 힘없이 걸어오면서 왼쪽 배를 움켜쥔 채 나에게 거수경례를 했다. 그리고는 “중대장님, 이 소란한 통에 부상당해 죄송합니다”라고 말하자마자 여기까지 잘 걸어왔던 친구가 갑자기 눈을 감고는 모래 위에 힘없이 펄썩 쓰러져버렸다. 창백한 얼굴로 겁에 질려 있었으며 하복부에서는 피가 많이 흘렀다. 상의 단추를 풀어 제치고 응급처치를 위해 매어놓은 개인 압박붕대를 풀었다. 그의 배에는 포탄파편이 치면서 날아간 상처 사이로 허연 창자가 확 쏟아져 나와 있었다.

나는 인간의 장기(臟器)가 그토록 반짝이며 은빛 찬란한지 미처 몰랐었다. 전투 시 복부 부분에 부상당하면 금방 장기가 노출된다. 병사들은 누구나 쏟아져 나온 자신의 창자를 보게 되면 기겁을 하고 놀라서 이젠 죽나보다 생각하고 법석을 떨게 되지만 실제로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 비록 장기가 손상을 입더라도 물만 먹이지 않으면 생명에는 전혀 지장이 없기 때문이다.

드러누운 병사는 눈을 감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워낙 창백하여 혹시 다른 파편이 머리나 가슴의 급소부분에 박히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자세히 확인하였고, 등 쪽도 염려되어 등 뒤까지 확인했다. 복부 이외에는 상처가 없는데도 마치 의식을 잃은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다시 복부의 상처를 확인했으나 장기가 파열되면서 쏟아지는 지저분한 오물은 전혀 흘러나오지 않았으며 부상 시에 묻은 상처 부위의 핏자국만 보였다. 선뜻 죽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 때문에 나는 그의 얼굴을 마구 때렸다.

“이 녀석아, 10분만 살아 있어. 바로 헬기가 오면 응급 처치한 후 병원까지만 가면 너는 산다구!”

아무리 때려도 죽은 사람처럼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벌떡 일어나서 군화발로 찼다.

“이 녀석아 정신 차려! 정신 차려...너 이러면 죽는다!”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인공호흡을 할 환자도 아닌 것 같은데 위생병은 그의 입을 벌리고 인공호흡을 실시했다. 그런데도 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변의 병사들이 몇 명 몰려왔다. 한 병사가 그의 왼쪽 손목을 잡더니 맥박을 짚었다. 한참 눈을 감고 맥박을 확인한 병사가 맥박상태는 극히 정상이라고 보고했다. 그 병사가 다시 내 손을 부상당한 병사의 손목에 얹어주면서 확인하라는 대로 나는 엄지손가락으로 그의 맥박을 짚었다. 그리고 내 손목의 맥박과 비교해 보았다. 죽는 줄 알았던 부상병의 맥박이 나보다 더 세게 뛰었다. 그때 마침 환자후송을 위한 헬기가 도착하여 헬기에 태워 후송병원으로 보냈다. 그는 헬기에 실릴 때까지 완전히 의식을 잃은 상태였고, 눈을 감은 채 동료 전우들의 안타까운 전송을 받으며 떠나갔다.

당시 환자 수송용 미군헬기에는 한국인 2세의 미군병사가 타고 있었는데 우리말이 다소 서툴러서 전사와 사살을 잘 구분하지 못하여 아군 전사자를 태우고 가면서 사살 몇 명, 부상자 몇 명하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지곤 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우리에게 헌신적으로 봉사했으며 한국군의 중대장, 소대장 및 환자들은 누구나 그의 목소리만 들리면 구세주를 만난 듯 반가워했다.

츄라이에서 주간 수색정찰 중에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츄라이에서 주간 수색정찰 중에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이날도 환자 수송을 위해 헬기가 접근할 때 폭이 10m조금 넘는 하천을 따라 지상에서 5m 정도 높이로 낮게 떠서 날아왔다. 고지에서 적의 저격이 있을지 모르므로 하천 양쪽의 빽빽하게 우거진 나무숲을 이용하여 그 사이로 아슬아슬하게 접근하여 환자를 태우고 날아갔다. 나뭇가지가 조금만 헬기의 프로펠러에 닿아도 위험한데,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고 과감하게 하천으로 들어와 임무를 수행하는 조종사에게 비록 다른 나라 군인이지만 경의를 표하고 싶었다.

우리는 산을 정면으로 오르지 않고 박격포와 기관총으로 적을 제압하면서 측방의 능선을 따라 고지로 올라갔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있던 적은 전부 도주한 후였다.

나는 재임기간 동안 몇 번 사격을 받아보았지만 병력을 전개시켜서 전진하다가 박격포사격을 받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우리는 적이 사격을 할 때 반격할 수 있는 박격포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일이 벌어지자 적시에 사용하지 못했다. 최초 작전 전개 시에는 박격포 진지를 고지 위에 편성하여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효과적인 사격을 해야겠다고 판단하고 60mm 박격포와 포탄을 전부 배낭 속에 짊어지게 했으며, 마침 우리가 적의 사격을 받았을 때 화기소대 박격포 요원들은 개활지의 한가운데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의 포탄이 많았거나 조준능력이 우수했더라면 많은 피해를 당할 뻔했다. 적의 사격을 받고 포병사격을 유도하여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응사를 했지만, 지도만 보고 포병사격을 유도해서 필요한 시간과 장소에 명중시킨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횡으로 뻗어진 고지의 능선을 포병화력으로 명중시키기는 더욱 어려웠다. 사거리가 조금만 길면 능선 너머로 떨어지고 조금만 짧아도 앞쪽에 떨어지고 만다.

600m 정도 사거리에서는 60mm 박격포가 가장 효과적인데 포와 포탄이 전부 이동 중인 병력의 배낭 속에 있었으니 그 답답함이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되었다. 눈앞에 주어진 임무만 생각하고 고지에 오르는 도중에 발생할지 모를 상황은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큰 재앙을 초래할 뻔했다.

미군 경비행기가 알려준 적의 위치는 상당히 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비록 우리 앞의 고지에 적이 있었다 하더라도 소대규모를 측방으로 우회시켜 긴 능선을 따라 고지에 오르도록 하고, 박격포는 지원사격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하여 사전에 기점확인까지 해두었으면 지금 같은 혼란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박격포나 기타 곡사화기로 평지가 아닌 경사가 심한 고지에 사격을 할 때는 조심해야 할 사항이 있다. 우리가 무심코 지도를 보면서 사거리를 계산할 때 평지나 산악이나 같은 요령으로 한다. 그러나 박격포는 포물선을 긋고 날아가며, 산의 전사면이나 후사면은 경사가 심한 곳이 많았다. 따라서 사격지점에서 고지를 바라보고 전사면에 사격할 때는 어느 정도 근탄이 생기기 때문에 우군머리 위를 넘어서 근접지원을 할 경우 조심해야 한다. 반면에 산악의 후사면에 사격할 때는 약간의 원탄이 생긴다는 것을 인지하고 사격해야 한다.

이번에 우리에게 사격을 가한 적들은 분명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사격을 했겠지만, 거리가 멀리 이격되어 있을 때 사격했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로서는 다행이었다. 만일 적들이 고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바로 앞에까지 바싹 유인해서 기습사격을 했더라면 틀림없이 더 많은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퀴논 서북방 60km 지점에 있는 61대대 제1포대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퀴논 서북방 60km 지점에 있는 61대대 제1포대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전우가 부상 당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인접 전우나 위생병의 현지 응급조치다.

작전이 끝나고 중대가 기지로 돌아온 지도 상당한 시일이 지났다. 지난 작전에 있었던 일들을 거의 잊고 있을 때 장기노출로 후송 갔던 병사가 중대를 찾아왔다. 다행히 그는 장기손상도 내출혈도 크지 않았기 때문에 복부의 외상만 치료하고 연대 의무대로 돌아왔던 것이다. 상처 부위는 꿰맨 자리가 많아 비록 흉측했지만 정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나게 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나는 그에게 궁금한 것이 많았기 때문에 부상당할 당시의 상황을 세밀하게 물었다.

바로 좌측에서 ‘쨍’ 하고 폭발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가 왼쪽 배를 쇠뭉치로 때려 몸이 두 동강 나는 것처럼 아팠고, 자기는 그 자리에 푹 쓰러졌다고 했다. 아픈 곳을 움켜잡으니 손에 무엇이 뭉클하면서 잡혔는데 무엇인가 하고 상의를 열고 들여다보니 자기 창자가 한바가지 쏟아져 나온 것을 본 것이었다. 아마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치고 자기 창자가 한바가지 쏟아진 것을 보고 놀라 기절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위생병이 뛰어와서 그를 끌고 갈 때까지 꼼짝하지도 못하고 소대장만 불러댔다. 그 와중에서도 탄띠에 매달려 있던 작은 개인 압박붕대를 뜯어서 쏟아진 창자를 덮어 움켜쥐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소원은 개활지 50여m를 빨리 벗어나 하천의 낮은 곳으로 들어가면 살게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무사히 하천까지 기어 나와 동료 전우들의 간호를 받을 때는 살았구나 싶었고, 평상시 빈둥대기만 하던 소대 위생병이 뛰어와서 자기를 부축할 때 신을 만난 것처럼 미더웠고,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중대장이 있는 곳까지 와서 중대장을 보니 이제는 살았구나 하고 안심이 되어 긴장이 확 풀리면서 정신을 잃고 푹 쓰러졌다. 그리고는 눈을 뜨지 않았다. 그는 얼굴을 때리고 인공호흡한 것도, 발길로 엉덩이를 걷어찬 것도, 정신 차리라고 소리 지른 것도 다 기억하고 있었다. 오히려 자기 엉덩이를 세게 걷어차서 아팠다고 했다. 헬기에 실려갈 때까지 있었던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부상당했을 때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여 위험지대는 빠져나온 뒤 자기 지휘관 앞에 와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는 것이 병사다. 또한 아프고 괴로울 때 믿고 의지하며 기대고 싶어 한다. 능청스러운 어리광이다. 부상당해 놀라 당황한 상태에서 중대장이 있는 곳까지 기어오면서 얼마나 운동량이 많았겠는가! 맥박이 나보다 더 세게 뛸 수밖에․․․․․․

전우가 부상당했을 때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 또는 인접 전우나 위생병의 현지 응급조치이다. 상체에 총상이나 파편상을 당하면 피가 호흡기 계통으로 흘러들어 갈 수 있다. 이때는 목에서 ‘가르륵’ 소리가 난다. 코고는 소리나 가래가 끓는 소리와 비슷하다. 피가 응고되거나 호흡을 못하게 되어 잘못하면 숨이 멎어 죽게 된다. 이때는 즉시 고개를 옆으로 돌려서 숨통을 터주어야 한다. 기도가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호흡이 원만하지 못하면 인공호흡을 실시해야 한다. 중간에 포기하지 말고, 군의관이 진료할 때까지 환자의 입에다 대고 구강 대 구강 호흡(mouth to mouth)을 계속해야 한다.

다음은 혈액순환이 되도록 조치해야 한다. 출혈을 많이 하면 쇼크를 일으켜 사망하게 되므로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 머리 부분의 상처나 흉부, 복부의 총상 시는 대량 출혈이 반드시 따라 오므로 비록 오염된 천이나 붕대라도 출혈부위를 압박하여 쇼크에 빠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오염된 도구를 사용하면 부작용이 따르므로 각 개인의 압박붕대는 가능한 한 더럽혀지지 않도록 잘 보관하여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상황이 위급한 경우 오염의 부작용보다는 지혈이 우선이다.

<계속>

 

후원하기

Fn투데이는 여러분의 후원금을 귀하게 쓰겠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제호 : 파이낸스투데이
  • 서울시 서초구 서초동 사임당로 39
  • 등록번호 : 서울 아 00570 법인명 : (주)메이벅스 사업자등록번호 : 214-88-86677
  • 등록일 : 2008-05-01
  • 발행일 : 2008-05-01
  • 발행(편집)인 : 인세영
  • 청소년보호책임자 : 장인수
  • 본사긴급 연락처 : 02-583-8333 / 010-3797-3464
  • 법률고문: 유병두 변호사 (前 수원지검 안양지청장, 서울중앙지검 , 서울동부지검 부장검사)
  • 파이낸스투데이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파이낸스투데이. All rights reserved. mail to news1@fntoday.co.kr
ND소프트 인신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