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16)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부러진 나의 소총
[연재칼럼](16)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부러진 나의 소총
  • 박재균 기자
    박재균 기자
  • 승인 2022.02.07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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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 파이낸스 투데이는 월남전의 영웅 서경석 장군(예비역 중장)의 승락 하에 저서 '전투 감각(Feel for Combat)'을 연재합니다. '전투감각'은 월남전 파병 당시 소대장, 중대장 시절의 전투 현장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경석 장군의 역작으로, 현재까지 초급장교의 전투 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명저입니다. 월남전 파병 장병의 고뇌와 어려움, 전투 현장의 숨막혔던 순간을 더 많은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파병 애국 용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격려하자는 파이낸스 투데이의 취지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 서장군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머나먼 타국에서 뜻하지 않게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 장병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사진 자료를 제공해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 감사하며, 참전자회에 독자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중대 전초진지인 16고지의 1969년 7월 9일 아침은 맑고 쾌청했다. 내가 이 중대의 중대장이 된 지 꼭 100일이 되는 날 아침이었다. 어린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석 달 열흘을 죽거나 병들지 않고 건강하게 잘 보내면 부모들이 백인잔치를 베풀어주고 이를 축하해 준다. 고지에서 병사들과 레이숀 깡통을 함께 뜯어 먹으면서 우리들끼리 백일을 손가락으로 세어보며 자축했다.

오전 10시경으로 기억된다. 포대경으로 고지 밑의 개활지를 관측하던 포병 관측병이 소스라치게 놀라 나를 불렀다. 그가 초점을 맞추어 놓은 곳을 들여다본 순간 나 역시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군장을 한 월맹정규군이 아군정찰기에 발각되지 않도록 위장하기 위하여 야자수 나뭇가지들을 어깨에 둘러매고 북쪽의 ‘캇숀’ 계곡에서 우리 중대의 전투책임지역 내로 일렬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 둘, 셋…’ 세기 시작했다. 나는 적이 지나가는 것을 계속 세면서 대대상황실에 적의 이동상황을 자세히 중계했다. ‘100, 101, 박격포 짊어진 놈, 300, 301, 기관총 짊어진 놈, 400, 권총찬 장교, 401…’

이후 적들은 관측된 위치에서 약 3km를 이동하고 나서, 대숲속으로 숨어버렸는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내 중계를 믿지 않았다. 심지어 연대에서는 교신내용을 듣고 있다가, 내가 소대장과 교신하는 소대망 무전기로 나를 찾은 뒤 과장된 보고가 아니냐고 오히려 꾸짖기만 했다. 지금까지의 여러 가지 첩보를 종합해 보아도 월맹정규군 400여 명이 그곳에 나타날 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월맹정규 군 400여 명, 일개 대대규모가 만약 이 지역에 나타나면 앞으로 전투양상이 달라질 테니 놀랄 만한 일이었다. 확인을 정확히 하기 위해서 나를 다그치는 것도 이해할 만했다.

내가 중계했던 내용은 삽시간에 사단사령부까지 발칵 뒤집어 놓았고 대대나 연대에서는 우리보다 더 분주했다. 특히 연대본부 옆에 있는 미군의 팬텀전투기 비행장은 더욱 더 긴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까지 적의 상황은 많아야 수십 명 정도 움직이는 것이 고작이었고, 대대규모의 적이 공용화기를 소지하고 나타난 일은 근래에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똑같은 내용을 묻는 사람이 많아 여러 번 되풀이했다. 날더러 과장된 허위보고를 한다고 다그치니 이건 내 자존심과 명예에 관한 중대한 문제였다. 더구나 적은 우리 중대책임구역으로 들어와 잠적해 버렸기 때문에 다른 중대에 확인할 책임을 넘길 수도 없었다. 대대장님과 연대장님도 내게 직접 전화를 하시어 중계한 내용이 사실이냐고 되물으셨다. 일이 이쯤 되니 적을 잡아 오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다.

“정 그렇게 못 믿으시면 제가 저놈들을 잡아오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렸다. 내 말을 누구도 믿지 않고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맹호 제11호 전투에서
맹호 제11호 전투에서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경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리하여 나는 중대장 취임 백 일 째 되는 날 적을 잡으러 출동하게 되었다. 점심 전에 중대기지로 내려와 출동준비를 서두르고 적을 습격할 계획을 수립하여 대대장님께 보고를 드렸으나 승낙하지 않으셨다. 적 일개 대대 400명 가까운 정규군을 일개 중대로 어떻게 습격하느냐는 것이었다. 계속 허락받지 못하다가 다섯 번째 건의를 드리고서야 겨우 승낙을 받게 되었다. 네다섯 시간 동안 다섯 번을 졸라댔다. 하도 졸라대니까 전차나 장갑차를 갖고 들어가면 허락하시겠다는 간곡한 말씀이 있었지만 나는 이를 거절했다. 소음으로 기습을 달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은 무거운 짐을 지고 월맹에서 출발하여 호지명 루트를 따라 산악정글을 거쳐 수십 일을 걸어왔다. 미군의 융단 폭격과 말라리아 같은 풍토병에 시달리면서 그들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들의 행군이 오늘 오전에 우리 중대 지역까지 오는 것으로 끝났다면 야간행군을 했음이 분명했고, 내일 아침 새벽이 가장 취약한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나는 적이 은거해 있을 것으로 예상되는 지점에서 약 1km 정도 떨어진 곳까지 밤에 이동하여 숨어 있다가 새벽 네 시에 포위권을 형성하면서 적을 습격하기로 결심을 했다. 습격계획을 보고 받으시던 대대장님께서 ‘그렇게 싸우고 싶으냐?’고 물으시며 습격작전이 성공하기를 빌어주셨다.

밤 아홉 시에 관측장교를 포함하여 장교 여섯 명, 하사관 및 병 89명이 중대기지를 나섰다. 다음날 새벽 두 시경, 임무지원지점에 도착하여 땅이 푹 패인 곳에 숨은 뒤 마지막 점검을 하면서 네 시가 되기를 기다렸다. 네 시 반, 두 명의 병사를 선발하여 폐허가 된 논을 통과시켜 건너편 숲 속으로 보냈다.

약 삼십 분 후에 개활지 건너에는 적이 없다는 연락이 왔다. 기다리던 시간이 왜 그리 초조하고 지루한지 안절부절못했다. 어디선가 자고 있을 적을 찾기 위해 중대는 횡으로 전개하여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야간이라 말을 함부로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무전기 키를 두 번 씩 누르면 적이 있다는 신호로 서로 약속되어 있었다. 좌측에서 전진하던 3소대로부터 적 발견 신호가 왔다.

‘칙칙, 칙칙, 칙칙’

먼동이 트기 시작했다. 우리가 적과 접촉하기 바랐던 바로 그 시간이었다. 이제는 3소대장이 싸우는 것을 기다리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한참 동안의 침묵이 흘러갔다. 대대장님이 출동하지 말라고 말리실 때 못이기는 척하고 그만둘 것이지 무슨 기발한 재주가 있다고 고집을 부려 여기까지 와서 이처럼 야단법석을 친단 말인가? 앞으로 전개될 전투에 대한 불안감이 엄습해 왔고, 고국에 두고 온 아름다운 산하와 부모님 얼굴이 눈앞에 선했다.

‘꽝, 꽝, 다르륵 드르륵, ……’

3소대 지역이었다. 소대가 전진하다가 분대별로 통로개척을 하기 위해 앞서 가던 첨병이 대나무 숲 속으로 살금살금 기어 들어가 보니, 길게 뻗어 있는 대나무 숲을 이용하여 잠을 자기 위해 만든 대나무 터널식 숙영지가 나타났다. 대나무 숲을 따라 사람이 드러누울 수 있을 정도의 폭으로 대나무를 잘라내고, 대나무 위쪽의 양끝을 휘어서 가운데 부분을 끈으로 묶어 놓으니 대나무 터널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터널은 완전히 위장될 수 있었고 적들은 그 속에서 아무 것도 모르고 태연히 잠을 자고 있었다.

이 대나무 터널 속에 적들이 주욱 드러누워 잠을 자는데 워낙 길이가 길어서 3소대가 접적한 지역은 그 터널의 끝부분에 불과했다. 우리가 조금만 더 위쪽으로 전개했더라면 경계병도 제대로 없이 곯아떨어진 적들을 한 명도 남김없이 섬멸시킬 수 있었을 텐데…….

맹호 제12호 전투에서
맹호 제12호 전투에서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놀란 적들은 대부분 산 위쪽으로 도망갔고 좌측 3소대에게 일격을 당한 적은 십여 구의 시체를 남겨놓고, 혼비백산하여 도망간다는 것이 마침 중대가 형성해 놓은 포위권으로 30여 명이 들어왔다. 우리가 전진하는 개활지 건너편에는 ‘루시엠’(Lusiem)이란 하천이 흘렀고, 하천을 따라 1소대가 개인거리 30m 정도를 이격한 채 숨어서 적이 하천 속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1소대가 배치된 하천 쪽은 지대가 낮아서 수색부대가 아무리 소총사격을 해도 안전했기 때문에 포위권을 압축하면서 마음 놓고 사격할 수 있었다.

해는 이미 중천에 떠올라 오고 있었다. 포위권 내부의 적은 한 두길 정도의 낭떠러지가 있는 하천 쪽으로 사격을 피해 도망갔다. 낮은 위치에서 기다리고 있던 1소대 병력은 하천 속으로 기어 내려오는 적을 조준하여 내려오는 대로 사살했다. 두 번째 기습사격을 받은 적들은 상당한 사상자를 버려둔 채 숲과 논둑을 따라 도망하다가 1소대 선임하사조가 대기하고 있는 살상지대로 들어가 기습사격을 받았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방향도 못 잡고 지휘자도 없이 개 뛰듯이 뛰어다녔다.

나는 1소대장의 요청에 따라 적이 뛰어 내려오는 소로를 막기 위해 중대의 포병 관측병과 내 전령을 시켜 논둑을 따라 개활지를 건너 소로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적이 오면 기습사격을 가하도록 명령했다. 포위권 내의 적은 세 번씩이나 두들겨 맞아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하였고, 덤벼들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한 채 이리저리 뛰어다닐 뿐이었다.

두 명의 부하가 개활지를 건너가서 소로에 도착했거니 하고 있는데, 별안간 “손들어, 손들어, 적이다!” 하고 고함치는 소리가 났다. 아니나 다를까, 두 명의 병사는 소로에 도착하자마자 위에 서 내려오는 적과 정면으로 부딪쳤다. 그들은 적과 마주치자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나 실탄이 나가지 않았다. 당황한 나머지 “손들어!” 하고 소리만 버럭 질렀던 것이다. ‘손들어’ 소리를 월맹군이 알아들을 리도 없었지만, 총을 들이대고 고함을 버럭 지르는 관측병의 위세에 놀라서 들고 있던 총을 한 발도 쏘지 못하고 뒤돌아 달아났다. 중대 관측병은 그때야 정신을 차리고는 자물쇠를 풀고 마구 갈겨댔다.

전장의 행동은 반사적으로 즉각 행동화되도록 숙달되어야지 그렇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병사들은 훈장은 몰론 잘하면 전공에 의한 본국 휴가도 갈 수 있었을 텐데 그놈의 자물쇠를 풀지 않고 방아쇠를 당기는 바람에 모든 것을 놓치고 말았다.

나는 밭의 둑 밑에 엎드려 있었다. 별안간 우측의 대나무 숲속에서 관측병에게 놀란 적 십여 명이 뛰어나와 40~50m 전방의 논둑 뒤를 따라 상체를 구부리고 뛰면서 개활지를 건너가고 있었다. 나와 무전병, 관측장교가 사격을 퍼부었지만 논둑에 가려서 잘 맞지 않았다 .사격지시를 하기 위해 예광탄을 갖고 다녔기 때문에 살탄 날아가는 것이 보이는데도 ‘땅’ 하면 논둑을 넘어가서 박히고, 다시 조준해서 ‘땅’ 하면 논둑에 '팍’ 박히고, 들락날락거리며 뛰는 적의 등을 도무지 맞힐 수 없었다.

중대본부와 화기소대 병력 십여 명이 쏴댔는데도 두 녀석만 쓰러졌고 나머지 십 수명은 논을 건너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적이 숨어들어간 뒤쪽에 있는 소대에서 적을 발견하지 못한 것을 보면 대나무 숲에 적이 숨어 있었을 것이므로, 적이 숨은 것을 확실하게 본 화기소대에 수색을 지시했다.

선임하사가 병력을 인솔하여 대나무 숲 속을 뒤지기 시작했다.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3개조가 숲 속으로 들어갔고, 마지막 조로서 선임하사가 들어가려는 순간, 바로 그 숲에 숨어있던 열 두 명의 적으로부터 집중사격을 받아 선임하사는 여덟 발의 적탄을 가슴에 안고 그 자리에서 전사했다. 선임하사가 적탄에 쓰러졌다는 고함소리를 듣고 대숲에 들어가 있던 병사들과 화기소대의 잔여병력이 뛰어나온 적을 행해 총을 쏘며 달려들었다.

‘땅땅 따다당….’

그리고는 적과 아군이 뒤엉켜 버렸다. 나와의 거리는 20~30m 정도, 중대본부 병력과 나도 뛰어 가서 달라붙었다. 치고받고 차고 찌르고, 선임하사를 잃은 화기소대원과 중대본부 인원이 적과 뒤엉켜서 정신없이 광란의 난장판을 벌이고 있었다. 소설책이나 영화에서 보던 백병전이 내 눈앞에서 전개되었던 것이다. 나는 자기 동료들이 두들겨 맞는 것을 멀거니 구경만 하면서 겁에 질려 손들고 서 있는 놈들을 조준사격했다.

“땅 땅땅당.”

방아쇠를 당기는 대로 그 자리에 푹푹 쓰러졌다.

손들고 투항하는 척하다가 방심하는 눈치가 보이면 쏘고 달아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신속하게 무장을 해제시키고 묶어두던가 쏴버려야 한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적도 무기를 갖고 있었고 착검까지 했는데도 워낙 우리 병사들이 거세고 무섭게 달려드니까 반항 한번 하지 못하고 총을 든 손으로 얼굴과 머리를 막으면서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고만 있었다.

총을 들고 벌벌 떨고 있던 녀석들도 동료가 퍽퍽 쓰러지는데도 총을 쏠 생각은 아예 하지도 못한 채 그냥 몸이 굳어져 있었다. 기선을 제압당하고 겁에 질리면 저런 꼴이 되고 마는 모양이었다. 적은 열두 명, 우리 병사도 십여 명 정도뿐이었다. 그러는 사이에 두 녀석이 내 옆으로 뛰어 달아났다. 선임하사를 잃은 화기소대 대원들이 너무 두들겨 패니 매에 못 이겨 비록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지만 맞아죽을 바에야 기를 쓰고 뛰어 달아난 것이었다. 대충 어깨에 거총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찰칵’ 소리만 나고 실탄이 나가지 않았다. 소총에 끼워진 탄창은 이미 실탄이 없는 빈 탄창이었다.

부러진 개머리 판

나는 도망가는 두 명의 적을 쫒아갔다. 앞서 뛰는 녀석은 무전병이 쏴서 쓰러뜨렸다. 내가 두 발짝 차이로 적을 쫓아갔으므로 뒤에 오던 무전병이 적을 쏘려니까 내 등이 조준구로 왔다 갔다 하니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어 그냥 총을 든 채 내 뒤를 따라 뛰어왔다. 내가 소총에 착검을 했더라면 창을 던지듯이 도망가는 적의 등에다 내리찍으면 끝나는데 안타깝게도 착검이 되어 있지 않았다. 적과 마주치면 착검부터 해야 하는데 이미 늦었다. 탄창을 갈아 끼우려고 뛰어가면서 탄입대 뚜껑을 열어 탄창 한 개를 꺼내려 했으나 잘 빠지지 않았다.

적의 머리를 후려칠 때 부러진 M16소총을 살펴보시는 대대장님 노태우 중령 [사진:서경석 장군 제공]
적의 머리를 후려칠 때 부러진 M16소총을 살펴보시는 대대장님 노태우 중령 [사진:서경석 장군 제공]

뛰어가는 논바닥에는 물이 조금 고여 있었고, 산 밑의 논이라 계단식으로 되어 있어 아fot 논과 윗 논의 차이는 1m 높이 정도로 높낮이가 있었다. 20여 m의 논을 따라 도망가는 적을 뒤쫓으니 적은 아랫 논으로 뛰어내렸다. 순간적으로 뛰어내리는 머리통 우측을 겨냥하여 소총을 거꾸로 잡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야구방망이로 작은 공도 쳤는데 저 큰 머리통을 못 맞추겠나?'

‘탁’ 하면서 내 M16 소총의 개머리판이 부러져 멜빵 끝에 달라 매달린 채로 튕겨나갔다. 맞는 손간 적의 팔다리에 힘이 쭉 빠지고 의식을 잃어 몸의 중심이 흐트러지는 것을 의식할 수 있었다. 적은 뒤통수 우측을 정통으로 맞아 머리에 피를 흘리면서 물이 흥건히 고여 있던 논바닥에 철퍼덕 나가자빠져 버렸다. 대검을 뽑아 벌렁 자빠진 적을 올라타고 좌측 이마와 목 그리고 명치를 있는 힘을 다해 찔렀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칼을 뽑으려고 부르르 몸을 떨며 나를 노려보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평소 야구를 매우 좋아했다. 방망이를 휘둘러 단단한 공에 맞혀 멀리 날려 보낼 때 느끼는 상쾌한 기분은 언제나 나 에게 매혹적이었다. 그러나 보니 틈나는 대로 야구를 즐겼고, 지금도 공 맞추는 솜씨는 보통 수준이 넘는다.

뒤 따라 오던 무전병은 중대장과 적이 함께 논둑 밑으로 뛰어내린 것을 보고 혹시 중대장이 잘못되지나 않았나 걱정하면서 곧바로 뛰어와 논바닥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게 되었다. 순간적으로 너무 흥분해서 머리가 돌아버렸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우리 중대장님이 이겼다!” 라고 소리소리 질렀고 무전기를 들고 마구 울면서 대대에 상황보고를 했다.

"우리 중대장님이 이겼습니다. 우리 중대장님이 이겼습니다……."

나는 적의 AK 소총을 들고 계속 싸웠다. 내게 머리를 맞아 죽은 적의 소총에는 착검도 되어 있었고 약실에 실탄이 장진된 채 방아쇠 안전장치도 풀려 있었다. 쫓겨 가다 돌아서서 방아쇠만 당겼으면 나는 그때 죽었다.

내 생애 최고의 영어, 군사영어 평소에 준비하자

3소대는 더욱 복잡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산으로 도망간 대부분의 적이 전열을 정비해서 3소대에 달려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적은 산 위쪽에서 집중사격을 하면서 3소대가 배치되어 있는 지역으로 압박해 들어왔다. 안에는 뛰어다니는 적이, 밖에는 산에서 내리쏘면서 압축해 오는 적이 있어 그 가운데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던 실정이었다.

다행히 근처에 푹 파인 도랑이 있어 그 속에 엎드려 응사하고 있었지만 고개만 들면 적의 사격이 집중되었기 때문에 나오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있었다. 소대장과 교신해보니 적도 대부분 노출되어 있어서 아군 포사격을 가까이 끌어들인 뒤 적이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병력을 위험지역에서 빼내는 방법밖에 없다고 보고해 왔다.

관측장교의 요청으로 최초 탄이 날아왔으나 포탄이 너무 이격되어 떨어지므로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군으로부터 600m이내에는 절대 사격을 못한다는 것이었다. 소대장도 적탄에 맞아죽으나, 아군 포탄에 맞아죽으나 죽기는 마찬가지이니 제발 소대가 배치되어 있는 쪽으로 포탄을 끌어들여 달라고 요청해왔다. 나는 관측장교에게 현재 포탄이 떨어지는 곳에서 소대 쪽으로 500m 근접시키도록 지시했다. 탄착지점을 500m 옮기면 현 소대배치선 바로 곁에 포탄이 떨어지는 판이었다. 그는 책임질 수 없다며 완강히 거절했다. 나는 그의 무전기를 빼앗아 포병에게 3소대를 그대로 나두면 적탄에 다 죽으니 제발 아군 쪽으로 500m 당겨서 빨리 쏴달라고 애원했다. 적탄에 맞아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군 포탄에 맞아 죽더라도 모험을 할 수밖에 없었다.

제1탄, 백린연막탄이 떨어졌다.

155mm 포대는 우리와 한 울타리 안에서 늘 함께 생활하였으므로, 그들이 쏴주는 포탄은 중대원의 행동과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그들의 솜씨를 믿었다. 포대에서는 안전을 고려하여 200m를 수정하여 제2탄을 쏘았고, 제3탄을 다시 수정하여 300m 근접시켜 쐈다. 거의 병력배치 선에서 150~200m 이격되어 포대효력사로 병력배치선을 따라가면서 포사격을 계속했다.

100~200 m 옆에 포대효력사가 터지니 천지가 찢어져 터져나갈 정도였다. 적도 아직까지 이런 포탄세례를 받아본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산 위의 나무 뒤에 숨어서 우리에게 접근하려던 적은 정확하게 보면서 유도하는 아군 포탄 때문에 완전히 노출된 상태였는지라 많은 사상자를 내고 혼비백산하여 산속으로 도주해 버렸다.

백 명의 베트콩보다 한 명의 양민을 안전지대로
백 명의 베트콩보다 한 명의 양민을 안전지대로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쌍안경으로 포탄이 터지는 것을 지켜보던 나는 대대에 공격을 건의했으나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포탄이 작렬하자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적이 뛰어 달아나다 계속 떨어지는 포탄에 쓰러지는 것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에 곧바로 공격을 개시하면 적의 사상자를 확인할 수 있었는데 현장을 모르는 대대에서는 적의 역습이나 역매복에 걸려들까 걱정되어 절대 못하게 했다. 날더러 욕심 부리면 너도 죽고 부하도 죽게 되므로 그만하면 목적은 충분히 달성했으니 전장 정리를 하고 빨리 빠져나오라는 명령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월맹군이라는 사실만 확인하면 출동목적은 충분히 달성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사상자를 주워올 수 있었지만 그만두고 마지막 전장정리를 하기로 했다. 좁은 도랑에 푹 박혀 있던 병력들은 아군포탄이 가까이 쏟아지자 폭음과 함께 튀어 날아오는 파편 때문에 아군 포에 다 죽는 줄 알고 자기 소대장에게 포격을 중지시켜 달라고 아우성이었지만, 침착하게 부하를 지휘하여 한 사람의 사상자도 발생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어떤 병사는 포탄이 20~30m 옆에 떨어져 터진 일도 있었으며 방탄조끼와 철모 전투복 등에 파편을 맞았고 어떤 병사는 가벼운 찰과상을 입기도 했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155mm 곡사포는 우리가 유도하는 대로 몇 십 m의 편차도 없이 정확하게 사격해 주었다 .그 고마움이 없었으면 아마 많은 내 부하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포사격도 끝내고 적에게 몰려 있던 3소대도 빠져나왔다. 병사들은 시체와 전리품을 중대장이 있는 곳에다 모으기 시작했고, 나는 여자 한 명이 포함된 포로 네 명에 대해 간단한 현장 심문을 하고 있었다.

도망간 것으로 판단했던 적이 다시 사격해 왔다. 처음보다는 훨씬 조직적인 것 같았다. 높은 지역으로 올라갔다가 중대 전 지역을 관측했는지 중대본부 지역과 다른 소대에도 적탄이 정확하게 날아왔다. 포로가 되거나 포사격에 쓰러진 동료들을 구출하기 위해 우리 병력이 빠져나오자마자 전열을 정비하여 다시 덤벼드는 것이 틀림없었다.

다시 포병을 불러서 총소리 나는 지역에 포사격을 실시했다. 대대상황실에서는 미군의 무장헬기가 곧 도착할 것이니 유도해서 운용하라는 연락이 왔다. 당시 헬기는 대부분 미군 측에서 우리를 지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군 승무원과 한국군 사이에 언어의 장벽으로 인해 임무수행 중 마찰도 생겼고 웃지 못할 일들이 많이 일어났다. 특히 부상자가 발생했을 때 보급용 헬기의 조종사를 총으로 위협해서 사용하는 경우와 적전 시 적의 지상화기만 올라오면 아무 곳에나 병력을 내려놓고 가려고 했을 때 마찰이 많이 생기곤 했다.

무장헬기 두 대가 공중에 나타났다. 대대에서 우리 중대 호출부호와 주파수를 알려주면서 중대장이 미군 헬기 조종사와 의사소통 을 할 수 있으니 직접 날아가서 지원하라고 요청해서 왔던 것이다. 지난 번 미군 전차가 지원되어 함께 작전을 한 적이 있었는데, 이때 주섬주섬 미군 전차 소대장과 몇 마디 주고받은 것을 보고 의사소틍이 가능한 것으로 판단한 모양이다. 아는 체도 함부로 하면 이렇게 난처하게 되는가 보다.

사실 무장헬기가 지원 온다는 연락을 받고 무척이나 고민했다. 우리 작전에 지원받는 것은 고사하고, 잘못하면 오폭을 받을 수도 있었고, 무장 헬기를 사용하지 못하고 돌려보내면 중대장이 말 한마디 못해서 지원 차 나온 헬기가 빙빙 돌다가 그대로 돌아갔다고 알려지면 상급부대와 중대원에게 고개를 들지 못하는 창피와 망신을 당한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나는 중대원이 배치된 선을 따라서 여러 개의 좌표를 따놓고 그 점을 따라 원을 그렸다. 그리고 원을 따라서 중대가 갖고 있는 녹색연막을 분대별로 한 발씩 터뜨렸다.

나를 찾는 조종사에게 내 말을 알아듣거나 말거나 세 번 반복했다.

“You see green smoke, smoke inside my soldier, you no fire. smoke outside enemy, you fire. Mountain enemy, you fire……."

조종사가 알았다고 주위를 빙빙 돌더니 우리가 포를 쏘던 쪽으로 로켓과 기총소사를 해주었다 .몇 바퀴를 돌면서 지원사격을 하고는 날아가 버렸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엉터리 같은 영어 솜씨라 부끄럽지만 의사소통은 그런대로 된 것 같아 정말 다행이었다. 공지작전이나 항공의 운용 및 군사영어교육은 전혀 받은 일이 없었기 때문에 얼마나 당황하고 쩔쩔 맸는지 모른다. 당해 본 사람이 아니면 그 고충을 이해하지 못한다.

번개 23호 작전 중
번개 23호 작전 중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전쟁터에서는 훈장에 대한 욕심을 버려라

포로가 된 적들은 우리 중대원들과 치고 찌르고 하며 싸우다가 잡힐 때 매를 많이 맞았고, 복부를 칼에 찔리는 등 중상을 입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같이 불가사의했던 일은 그 혼돈과 혼란의 와중에서도 내 부하들은 한 사람도 다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적들은 싸울 의지를 완전히 상실한 채 포위망을 뚫고 도주할 생각만 하다 보니 덤벼들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얻어맞기만 했다.

다리에 총상을 입고 드러누워 있는 포로가 나를 찾는다기에 왜 나를 보자는지 호기심이 생겨 포로에게 갔다. 나에게 지휘관이냐고 물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보고는 유창한 영어로 “제네바 협정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의 유창한 영어 실력에 놀라 대답도 제대로 못하고 고개만 끄덕이자, 자기는 장교인데 제네바 협정을 지키도록 중대원에게 명령하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판쵸우의에 둘둘 말려 있는 선임하사의 시신을 보고 왈칵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었다.

열두 명의 적이 한곳에 몰려 숨어 있다가 선임하사 가슴에 집중사격을 한 것은 바로 저 녀석이 사격명령을 내려 일제사격을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다 죽여버리고 싶은 충동마저 생겼다. 적들을 죽여버린다고 죽은 부하가 살아날 리 없었지만, 바로 코앞에서 장렬히 쓰러진 선임하사를 생각할 때 앞에 있는 적들을 그의 영전에 제물로 바치고도 싶었다. 이런 심정을 눈치 챈 상급부대에서는 포로가 꼭 필요하니 반드시 후송하라는 엄명을 내렸다. 앞으로 상급부대작전을 위해 적정을 확인해야 했으므로 가능하면 첩보를 많이 알고 있는 장교가 필요했다. 나는 주절거리는 적의 입에다 정글화 뒤꿈치를 쑤셔 넣고는 몇 바퀴 비틀어 버렸다.

산 쪽의 적은 어딜 달아났는지 더 이상 저항은 없었다. 총만 쏘면 머리위에 포탄이 정확하게 쏟아지고 무장헬기까지 찾아와 쏴대니 이제는 포기한 듯했다. 그러나 직접적인 공격은 받지 않은데다 포와 항공기에 의해서만 사상자가 발생했으므로 그들을 그대로 놔두고 도망갈 리는 없었다.

분명히 어디엔가 숨어서 우리의 행동을 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일단 적과의 접촉이 단절된 이상 신속히 이 지역을 이탈하든지, 아니면 적과 재접촉을 시도하든지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행동해야지 여기서 우물우물하다가는 적에게 역습 기회를 제공하기 쉬웠다. 신속히 전장정리를 해야만 했다. 주변 일대에 빈틈없이 경계병을 배치하고 산속의 적으로부터 기습적인 역습을 방지하기 위하여 의심나는 곳에는 계속산발적인 포사격을 하면서 적의 시체와 장비를 한곳에 모았다.

포로 4명, 사살 38명, 이외에 소총과 장비, 문서 등 상당량의 전리품을 노획했다. 그 가운데는 군용 더블백에 월남돈과 달러가 가득 들어 있는 돈 자루도 있었다. 우리에게 얻어맞은 적들이 먹고 살 군자금이었다.

현지에서 지역주민을 이용하여 물자를 조달해서 먹이고 입혀야 할 적에게는 이 돈 보따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이토록 많은 돈을 노획하기란 평생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할 정도로 희귀한 일이지만, 간수하기도 어렵고 사용 또한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군 규정에는 전부 반납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반납하지 않았다. 전부 현장에서 공을 세운 대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번에는 너무 많아서 노획하여 온 분대원에게 큰 주먹으로 두 주먹씩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중대로 가져와 돈 사용위원회를 편성하여 그들의 결정에 따라 사용했으나 대부분 부대원의 사기를 고양시키기 위해 사용했다. 어찌나 많았는지 일대 분대 인원에게 두 주먹씩 나누어 주고도 자루를 흔들어 놓으니 역시 한 자루가 그대로 있었다.

전쟁터에서 금기로 되어 있는 것이 여러 가지 있지만, 그 중 하나는 상훈과 훈장에 욕심을 부리고 돈을 챙기는 사람들은 잘 죽는다는 사실이다.

선임하사 ! 안녕히……

전사한 선임하사를 후송하기 위한 헬기가 도착했다. 그는 박봉을 저축하면서 욕심 없이 살았으며,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소대장 공석으로 대신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다. 그의 소대원들은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펄펄 뛰던 그를 판초우의에 싸서 헬기에 옮겨 싣게 되자 자기들 대신 죽었다고 울부짖었다. 우리 곁을 떠나는 그에게 거수경례를 하면서 멀리 헬기가 가물가물하게 보일 때까지 보고 있었다.

바로 이때 등 뒤에서 어수선하게 떠드는 소리가 들리기에 돌아보았다. 방금 전까지 선임하사를 마지막 모습을 보면서 울먹이던 병사들이 포로들을 가만 두지 않았다. 누가 말릴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포로가 생기면 반드시 책임자를 임명하여 감시를 철저히 해야 한다. 도주의 우려보다 오히려 무자비한 보복을 예방하기 위해서다. 제네바 협약에 의하면 포로는 누구나 인도적인 대우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전투지대내에서는 최소한으로 지체한 후 곧 후방으로 신속히 후손되어 상급부대 수용소에서 포로생활을 하게끔 명시되어 있다.

포로. 싸우다가 손을 들거나 숨어 있다가 붙들린 사람들. 아군의 피해가 전혀 없이 잡힌 포로들은 사기가 충천한 대원들에 의해서 대우도 잘 받고 보호받았지만, 아군의 피해가 있거나 특히 직속상관의 사망 후 그의 부하에게 붙들린 포로들은 성난 병사들에 의해 학대받는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피로 얼룩진 전투에서 응어리 맺힌 부하들의 분노, 선임하사의 죽음에 대한 죄의식과 애절함……. 아무리 교육을 시키고, 스스로 지키려고 애를 써도 인간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격해지면 이성을 상실하여 난폭해지는 전장의 속성을 뛰어넘기 힘들었다. 전장 정리를 끝내고 중대원과 철수를 시작했다.

시간은 1969년 7월 10일 12시 30분, 적과 싸우기 시작한 지 일곱 시간 반이 지났다. 수통의 물을 마시니 몇 모금에 다 들어갔고 구역질이 어찌나 나는지 몽땅 토해버렸다.

다음 날 중대기지에는 부사단장남이 직접 오셨으며, 내 목에는 충무 무공훈장이 걸렸고, 지난번 수색작전의 전공으로 이미 상신된 화랑 무공훈장이 가결되어 가슴에는 화랑 무공훈장을 다는 영광을 갖게 되었다. 또한 우리 중대는 소대장, 관측장교 등을 포함하여 많은 부하들이 훈․표창을 받았다. 아무리 훈․표창을 받아도 부하를 잃고 돌아온 지휘관은 비록 전쟁터라 하더라도 그리 떳떳하거나 자랑스럽지 못함은 물론 군대생활 기간은 말할 것도 없고 평생 가슴에 죄책감을 갖고 살 수밖에 없다.

언론에 보도된 훈장 수여 [사진:서경석 장군 제공]

이번 우리 중대의 습격작전은 중대가 단독으로 출동하여 실시한 중대단위 독립작전으로는 처음 있었던 일이며, 최초의 야간전투를 했다는 의미 있는 전례를 남겨놓았다. 또한 나는 포로 학대죄로 그 책임을 지고 사단군법회의에 회부되었으며, 최초에는 을지무공훈장과 미국 은성무공훈장, 월남최고훈장 이 공시에 상신되었으나 미국 은성훈장과 월남훈장은 취소되었고, 을지무공훈장도 충무무공훈장으로 격하되어 버렸다. 대신 군법회의 법정에 서서 재판을 받는 불운만은 면했다.

세월이 지나면서 우리 중대는 새로운 고민거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전투에서 다소 거칠기는 했지만 순박하고 착하기 만 했던 내 부하들이 타 부대 사람들에게 함부로 대들어 싸움박질을 하는 등 망나니짓을 많이 했다. 이 모두가 몸서리치는 전투에서 얻은 충격과 고뇌를 잘 소화하지 못한 인간적인 갈등이라고 생각되어 안타까웠다. 잔인하고 고약한 중대로 소문이 나서, 때때로 득도 있었지만 손해도 많이 보았다.

나는 수기를 한 번도 쓰지 않았다. 수기를 자주 쓰면 죽는 다는 미신이 있기 때문에 여러 번 권유를 받았어도 쓰지는 않았다. 이번 작전도 수기를 써주지 않았는데 상급부대 정훈부서에서 수기처럼 만들어 국내 일간지와 잡지에 기사를 작성하여 실리게 하였고, 이 때문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이 그 내용을 보시고 밤잠을 못 주무시는 엉뚱한 결과를 가져오게 하기도 했었다. 미혼이라는 내용이 기재되어 미혼 여성들의 격려 및 위문편지가 하루에 한 자루씩 쏟아져 들어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며칠 후 주월 한국군 사령관님의 부름을 받고 신나게 비행기를 타고 사이공으로 날아갔다. 백병전에서 적의 머리통을 후려쳐 개머리판이 부서져버린 내 M 16 소총이 사령부 내에 있는 기념관에 진열된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 태극 및 을지 무공훈장을 받은 사람들의 명단과 사진이 걸려 있는 유리 진열장 바닥에 하얀 조약돌이 깔려 있었고, 그 조약돌 위에 내 소총이 깨끗하게 진열되어 나를 기다리고 있다가 반겨주었다. 총 앞에는 우리 중대가 싸운 내용이 요약되어 있었고 ‘서경석 대위가 적과 싸우다가 백병전에서 부서진 총‘이라는 간단한 설명이 깨끗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내가 소총 중대장에 처음 부임한 지 꼭 백일과 백 하루 째 되는 날에 일어난 싸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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