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1)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두고온 철모(상)
[연재칼럼](1)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두고온 철모(상)
  • 박재균
    박재균
  • 승인 2022.01.01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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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우물하면서 적인지 아군인지를 확인하려는 몇 초의 시간이 절호의 기회이다."

* 파이낸스 투데이는 월남전의 영웅 서경석 장군(예비역 중장)의 승락 하에 저서 '전투 감각(Feel for Combat)'을 연재합니다. '전투감각'은 월남전 파병 당시 소대장, 중대장 시절의 전투 현장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경석 장군의 역작으로, 현재까지 초급장교의 전투 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명저입니다. 월남전 파병 장병의 고뇌와 어려움, 전투 현장의 숨막혔던 순간을 더 많은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파병 애국 용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격려하자는 파이낸스 투데이의 취지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 서장군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머나먼 타국에서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 장병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사진 자료를 제공해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 감사하며, 참전자회에 독자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아침 일찍 중대기지에서 대대본부까지 도로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밤사이 지역 내의 베트콩들이 도로에 지뢰나 부비트랩을 매설하여 우리 부대 차들에게 피해를 입히곤 했다. 특히 새벽에 람브레타(삼륜소형트럭)를 몰고 시장에 가거나, 논밭으로 일을 나가는 월남인들에게 자주 피해를 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반개 소대 규모의 도로정찰조를 편성해 지뢰탐지기와 제거 기구를 휴대하고 아침마다 도로정찰을 실시했다.

그날도 나는 내 차례가 되어 소대원들과 도로정찰을 했다. 밤에 매복을 한다거나 정글 속으로 작전을 나가면 햇빛을 피할 수 있어서 시원하지만 아침 햇살에 군장을 메고 방탄조끼를 입으면 어찌나 더운지 돌아오면 항상 전투복이 흥건히 젖고 심지어 방탄조끼에까지 땀이 베어들 정도였다. 각 중대에서 도로정찰을 마치기 전까지는 부대의 군용차량은 움직이지 않아 우리의 피해는 별로 없지만 민간인차량은 아침 일찍부터 돌아다니다 대전차용 지뢰나 고성능 부비트랩을 밟아 차에 탄 사람들은 물론이고 차체마저 박살나는 일들이 지역 내에서 자주 일어나곤 했다.

1중대 관측반 맹호부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1중대 관측반 맹호부대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정찰한다 하더라도 10㎞가 넘는 거리여서 그냥 부지런히 걸어도 2시간은 족히 걸렸는데 이것저것 수상한 것을 확인하면서 가자면 거의 3시간 정도는 걸렸으므로 통상 아침 9시쯤 되어야 도로 확인을 끝낼 수 있었다. 서로 뻔히 다 알고 있는 같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끔찍한 살상을 자행함으로써 무서움과 두려움으로 꼼짝도 못하게 하고는 밤만 되면 생쥐나 족제비같이 기어 들어와서 식량과 의약품을 약탈해갔다. 장정은 물론 여인네마저 동원하고 심지어 철없는 어린 아이들까지 총알받이로 내모는 공산당의 만행에 우리는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 정찰을 다녀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때 방심하기 쉽다

처음 도로정찰을 나갈 때는 작은 숲이나 둑 뒤에서 저격을 받을 것 같아 걱정도 많이 되었고, 발밑에서 바로 지뢰가 터질 것 같아 앞의 병사가 밟고 간 발자국만 그대로 밟고 가기도 했다. 차라리 신임 소대장 때처럼 이런 걱정 저런 걱정을 하면서 필요한 조치를 하고 가면 피해가 별로 없었고 어떤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하여도 동시에 많은 피해를 보는 것을 예방할 수 있었다.

계속 다녀도 아무런 일이 발생하지 않을 때 방심하기 쉬우며, 어제도 별일이 없었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겠는가 하는 안이한 생각이 죽음을 자초하는 법이다. 도로를 따라가면서 길 위에 이상한 것이 있는가 확인하고 저격이 날아올듯한 의심나는 곳을 일일이 확인하면서 전진하면 시간이 많이 소요되어 짜증스럽기도 하거니와 대원들이 귀찮아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는데 이때 자칫 인솔자는 전술적 제반 조치사항을 무시해 버리는 수가 있다.

이때가 제일 위험한 시기이다. 흔히들 이야기하기를 처음 소대장으로 부임하여 3개월만 총에 맞지 않고 무사히 지나면 위험한 고비는 넘긴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보면 정 반대였다. 처음에 이곳에 오면 전투와 정글 및 지형과 상황에 익숙지 못해 조심을 많이 하며, 다음날 있을 작전 준비를 위해 인접 소대장이나 소대선임하사, 고참병의 의견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게 된다. 차라리 이때가 제일 안전한 시기이다.

3차 공세로 화염이 오른 도심[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제공]
3차 공세로 화염이 오른 도심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약 3개월 정도 지나서 수색정찰, 매복 등을 몇 번 다녀오게 되면 작전회의 시간에 아는 체나 하고, 꾸중하면 말대답이나 하면서 고집을 부리고, 우쭐대기 시작하는데 이때가 제일 위험하며, 죽기 꼭 알맞은 시기이다.

새로 전입 온 박소위도 3개월 정도는 선배 소대장들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듣더니 그 후 작은 전과를 올리고는 자만에 빠지기 시작하여, 중대장님과 함께 하는 작전회의 석상에서까지 말이 많아지고 신중론을 펴는 선배 소대장들에게 ‘겁 좀 내지 말라’고 오히려 나무라기까지 했다. 막내둥이 소대장이라 그러려니 하고 이해하려고도 했으나 막무가내로 말을 듣지 않아 우리 소대장들은 물론 그의 소대원들까지도 그의 독주와 무모함을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푸캇산 작전에서 철모도 쓰지 않고 본국에서 갖고온 미제 빵모자만 쓰고는 전진 속도가 느리다고 소대 첨병보다 앞장서서 산을 기어오르다가 정수리에 저격탄을 맞고 말 한마디 못한 채 전사했다. 철모를 썼거나 제 위치에서 사격과 기동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전진했더라면 그토록 값없이 허무하게 죽지는 않았을 텐데,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한번은 또 이런 일이 있었다.

내가 소대장을 마친 뒤 연대로 떠나고 나서 일어난 일인데 내가 있던 중대에 새로 오신 중대장님도 적에게 변을 당하고 말았다. 중대장님은 귀국을 얼마 앞두고 좀처럼 가기 힘들었던 태국 방콕 휴양을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여행의 들뜬 마음이 채 가시지 않은 탓인지 복귀 도중 연대에서 지프차를 타시고는 무전병도 경계병도 없이 운전병과 단 둘이서 부대로 가시다가 적의 저격을 받아 총 한발 제대로 쏴 보지도 못한 채 안타깝게도 순직하셨다. 만일 필요 인원을 대동하고 무전기를 개방하여 부대와의 교신과 위협요소에 대한 사전 판단 및 상황조치 등 만반의 태세를 갖추었더라면 그처럼 불행한 변을 당하지는 않았을 텐데⋯⋯.

105mm는 내 생명과 같이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제공]
105mm는 내 생명과 같이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부하에게 어려운 임무를 부여할 때는 직접 찾아가 즐거운 마음으로 나서게 유도하라

내가 파월된 지 약 4개월 정도 지났을 때였다. 1968년 6월 말 쯤으로 기억된다. 아침 일찍 도로정찰을 끝내고 부대로 복귀하여 땀에 흠뻑 젖은 채 식사를 마친 다음 우물가에서 찬물로 대충 씻고 소대막사로 들어왔다. 도로정찰 때 땀을 너무 많이 흘려 피곤했다.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쉬고 있는데 밖에서 계속 ‘맹호! 맹호!’ 하면서 병사들이 경례하는 소리가 들렸다. 경례하는 소리가 늘 듣던 소리가 아니고 큰 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것을 보니 우리 중대 식구는 아니고 대대나 상급부대에서 꽤 높은 사람이 온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 소대장들은 월남에서 나름대로 고생을 제일 많이 했을 뿐 아니라 실제 적과 싸우면서 언제 죽거나 부상당할지 모르는 가운데 임무를 수행한다는 우쭐대는 마음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행정을 다루는 상급부대의 참모 방문 정도에는 누구하나 내다보지도 않는 건방진 습성에 젖어 있었다. 그날도 밖에 찾아온 사람 역시 상급부대에서 소총중대의 사정을 한번 살피러 나온 정도로 생각하고 그대로 침대에 벌렁 누워 있었다. 내가 나가지 않더라도 중대장님이 계시니까 누군가가 중대본부로 안내하겠지 생각하면서…….

그 당시 소대 막사는 적의 직사화기에 대비하여 땅을 파고 들어가 마대를 차곡차곡 쌓아서 지었으며, 곡사화기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도록 지붕 또한 마대로 몇 겹을 싸서 두텁게 하고 살았다.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막사 안은 항상 어두웠고 밤에는 적의 포탄을 맞지 않으려고 등화관제를 해야 했기 때문에 문을 닫으면 더위에 찌들어 빵 찌는 찜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아예 불을 끄고 문을 전부 열어 놓고 지냈다. 밤만 되면 초소에서 근무하는 것 외에는 자는 거밖에 할 일이 없었다.

소대 막사로 여러 사람이 들어왔다. 뜻밖에도 그들은 중대장님의 안내를 받은 대대장님과 대대 정보장교였다. 소대원들이 전부 놀라 허둥대는 가운데 대대장님이 침상에 걸터앉으시더니 나더러 앞에 앉으라고 하셨다. 지도를 꺼내 내 앞에 펴 놓고 대대본부 뒤쪽의 산속을 가리키며 입을 떼셨다.

“그 지역에 현재 적정이 많이 발견되어 앞으로 사단 또는 연대규모의 작전을 전개하려고 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적정을 갖고 대부대가 함부로 행동할 수 없으니 자네가 침투해 들어가서 적정을 확인해 오게.”

나를 더욱 꼼짝 못하게 만든 것은 대대장님께서 직접 찾아 오셔서 내게 임무를 주시는 것도 황송한데 이렇게 덧붙이셨기 때문이다.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봤고, 책상 위의 장교 직위표 사진을 보면서 어느 소대장이 이 임무를 잘 해낼 수 있을는지 소대장 개개인을 비교도 해봤는데 역시 서중위가 제일 적임자라고 판단되어, 이렇게 직접 찾아왔네.”

대대장님께 그 많은 소대장 중에서 왜 나를 골랐느냐고 되물어보고도 싶었고, 몸이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이번만은 다른 소대장을 보내달라고 말씀드릴까 하는 생각도 머릿속으로 휘익 지나갔다. 분위기를 보니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좋고 야단맞을 때도 기분 좋게 맞으라고 하는데, 대대장님과 중대장님께서 그 많은 소대장들 가운데 나를 뽑아주신 이상, 무한한 자랑과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꼭 성공하겠다고 다짐했다.

이때 내가 받은 신선한 충격

부하를 사지로 보내는 지휘관의 진지한 자세, 마음속으로부터 즐겁게 복종시키는 기술, 죽을 줄 알면서도 기꺼이 자기 지휘관을 위하고, 나를 인정해 주는 사람 앞에 감격하는……

이때의 감명 깊었던 순간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으며, 이 순간은 내 평생 군대생활을 좌우해 왔다. 그 후 내가 진급되어 월남에서 계속 중대장을 할 때에도, GOP에서 대대장을 하던 시절 고왕산 계곡에 지뢰를 매설할 때에도, 나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른 후, 반드시 찾아가서 대대장님께서 하셨던 방법 그대로 했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신이 나서 즐거운 마음으로 나서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호이안 해변가에서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호이안 해변가에서 고향에서 온 편지를 읽으며[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침투시 제일 두려운 것은 예기치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적과 조우하는 것이다

우리가 침투해 들어갈 푸캇산에는 제일 높은 정상에 여자의 유방과 같은 바위가 있어 이를 ‘젖 바위산’이라고 불렀다. 이 산 정상은 워낙 우뚝 솟아 있어서 산 주위 어디를 가나 밤낮으로 관측되기 때문에 방향 유지를 한다거나 자기 위치를 모를 때 지도판독의 기점으로 늘 이용되었다.

소대원들에게 제일 어려운 야간 방향유지 요령을, 방위각을 사용하는 것과 젖바위를 이용하는 두 가지 방법으로 숙달시켰다. 무전기는 교전이 있기 전까지는 일체 사용을 금지시켰으며, 식량은 고기류를 중심으로 2박 3일분을 준비토록 했으나 유사시를 위하여 아껴 먹도록 지시했다.

실탄과 수류탄, 크레모아는 휴대했으나 조명지뢰는 휴대하지 않았으며 유사시 헬기 퇴출 때 이용하기 위하여 수타식 조명과 연막탄 몇 발만 휴대했다. 포병사격과 항공기 사격유도를 위해 지역 내에 여러 가지 확인점을 부여하였으며 특히 우리가 침투해 들어가는 침투로 상에는 자기위치 확인과 적과 조우 시 접촉점 또는 재집결지의 개념으로 사용하기 위해 여러 개의 확인점을 선정하여 사전에 준비를 했다.

통상 6부 내지 7부 능선을 이용하여 침투하도록 교육을 받았지만 낮에는 능선으로부터 관측을 당해 제압사격을 받을 위험이 있고, 칠흑 같은 어두운 밤에는 능선을 이용하여도 방향유지가 어려운데 능선 중간부분을 따라 이동하다가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해 길을 잃고 밤새도록 헤매기 일쑤였다. 그래서 적들도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길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았다.

2일 동안의 짧은 예행연습기간 동안 소로를 따라 이동하면서 앞서 가는 통로개척조가 적의 발소리와 음성 등을 이용하여 적을 먼저 발견하고 즉시 숲속으로 숨어버리는 훈련을 많이 했다. 침투 시에 제일 두려운 것은 예기치 않은 시간과 장소에서 적과 조우하는 것이다. 침투의 목적이 포로획득이라면 하체를 쏴서 잡아오면 그만이지만 이번 임무같이 적의 소굴로 들어가서 적의 전반적인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침투하는 경우에는 도중에 적과 조우했을 때, 침투 그 자체를 포기하고 돌아올 경우도 생기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조우를 피해야 했다. 2일간의 예행연습을 마치고 침투 당일 날은 오전에 군장검사를 포함해서 최종 점검을 마친 뒤 오후에는 모두 잠을 잤다.

조우 시 먼저 사격하는 쪽이 기선을 제압하게 되어 있고, 일단 기선을 제압당하면 함부로 덤벼들지 못 한다

침투 시 달빛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달이 뜨고 1시간 정도 후가 가장 적합하므로 밤 9시 정도를 출발시간으로 정했다. 달빛 아래 중대기지를 조용히 빠져 나와 산속으로 접어드니 예상했던 대로 방향유지가 거의 불가능했다. 1㎞도 채 전진하기 전에 거의 한 시간 정도가 지나가버렸고 땀이 어찌나 쏟아지는지 방탄조끼까지 흥건하게 젖었다. 떠날 때부터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방탄조끼를 벗어버리려고 했으나, 중대장님의 엄한 지시 때문에 입고 나왔는데 중량이 무거워 행동에 제한을 줄 뿐 아니라 직격탄에는 무용지물인데도 벗어버리지 못하고 입고 나온 것이 후회스러웠다. 그 후 나는 매복시를 제외하고는 두 번 다시 방탄조끼를 사용하지 않았다.

능선 접근로를 이용하여 통로개척조의 유도에 따라 구간전진을 하다 보니 속도는 느렸지만 적과의 조우 없이 첫날 이동해야 할 지점에 거의 도착하였다. 대략 7시간 정도 능선을 따라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적과 전혀 접촉 없이 첫날에 산속으로 무사히 은밀하게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은 매우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침투를 시작하고 처음 2시간 정도는 병사들의 행동이 지나치게 신중해서 전진이 무척 힘들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야간 행동에 익숙해지니 이동속도도 빨라졌고 행동도 경직되지 않고 태연하고 민첩해져갔다.

침투해 들어가면서 적과 조우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왜냐하면 능선을 따라 길이 나 있지 않았으며 적이 다닌 흔적도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적도 이 캄캄한 밤에 길도 없는 곳으로 다닐 이유가 없었다. 적들은 우리가 주로 주간에 활동하면서 밤에는 움직이지 않고 중대기지 근처에서 매복이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적들은 게릴라기지 지역 내에서는 낮에 활동하고 밤에는 잠만 잤다. 단지 밤에 움직이는 것은 보급품 조달이나 암살, 납치, 테러, 습격 등의 작전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마을로 내려갔다가 새벽에 돌아오는 적들뿐이었다. 그들은 통상 저지대의 계곡 통로를 이용했다. 통로가 없는 험한 밀림지역이나 높은 산의 능선을 넘는 통로는 시간적 제한과 짐을 지고 넘어 다니기 힘들어서 사용하지 않았다.

60B 10만발 발사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60B 10만발 발사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산속의 적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물이었다. 물과 멀리 떨어져서는 산속에서 생활할 수가 없었다. 적들의 중요한 부서는 거의 대부분 물가에서 50~100m 이내에 자리 잡고 있었다. 동굴도 물과 떨어진 곳은 임시 피신지로나 쓰일 뿐이며 그들이 늘 사용하는 중심굴이 될 수 없었다. 임시 은거지도, 인공동굴도, 지휘부도, 야전병원 시설도, 보급품 창고나 총기 탄약 시설도 전부 물가에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산 위에 올라가 지도를 펴 놓고 물과 보급품을 조달할 수 있는 마을과 사람이 걸어 다니기 편리한 계곡 통로를 연관시켜 보면, 적이 사용하는 주통로와 은거지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자신이 생겼다.

이 산속은 적이 밤이나 낮이나 구분 없이 자유롭게 행동하는 그들의 활동구역이었다. 한국군은 헬기로 착륙하여 작전을 실시해 왔지, 육로로 도보이동해서 작전을 한 경우나, 이번같이 야음을 이용하여 침투한 경우는 없었다. 따라서 비록 적의 주활동 지역이었지만 움직이는 것은 전부 적으로 간주할 수 있는 우리가 유리했고, 적은 오히려 우리를 만나더라도 자기네 편인지 적인지 판단이 순간적으로 되지 못하고 우물우물하게 되어 있다. 우물우물하면서 적인지 아군인지를 확인하려는 몇 초의 시간이 절호의 기회이다. 이 순간에 먼저 정확히 쏘는 편이 조우전에서 이기는 법이다. 먼저 사격하는 쪽이 기선을 제압하게 되어 있고, 일단 기선을 제압당하면 아무리 강심장을 가진 사람이라도 함부로 덤벼들지 못한다. 더구나 사상자가 발생하면 그 혼란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게 되는데, 내가 겪은 바에 의하면 적들은 저항을 포기하고 도망가기 급급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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