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추스를 시간

2019-03-27     박다빈

   어제 같이 있던 사람이 별안간 짜증을 벌컥 내며 혼자 저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시뻘게진 얼굴로 경보하듯 걸어가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나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느릿느릿 걸었다. 원래 걷던 대로 걸었다. 우리의 산책인 동시에 내 산책이기도 한 그 시간을 망치지 않았다. 그 사람이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지는 것이겠거니 싶어 하면서. 나는 나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걸었다.

   그 사람의 갑작스러운 반응이 약간 의아하긴 했지만 딱히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그 사람을 당장 따라가 왜 그러냐고 묻거나 왜 느닷없이 짜증냈냐며 도로 짜증을 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는 그러지 않는 스스로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명상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추슬러야만 하는 일’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런 일은 친절한 예고를 하고 오지 않는다는 것도. 누가 특별히 나를 자극하는 발언을 한 것도 아닌데, 어디에 있다가 난데없이 기분이 확 비틀려 버리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 내 마음으로 ‘스스로 추슬러야만 하는 일’이 올라왔다. 오래 묵은 기억에 묻어 있는 무거운 감정이랄지, 나 자신에 대한 과도한 요구들이랄지. 그런 것들은 내 눈앞에 있는 상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저 툭 튀어 올랐을 뿐이다. 그럴 때 나는 혼자 있고 싶어 했다. 엉뚱한 데 화풀이 안 하려면 혼자 있어야 하기도 했고.

   명상을 시작하기 전에는 마음이 불현듯 어질러질 때마다 단순히 혼자 있기만 했다. 누구한테 폐 끼치고 싶지 않으니 혼자가 되긴 했는데, 뭘 어쩔 줄을 모르겠으니 혼자서 낑낑 앓기만 했다. 추스르지를 못했다. 명상을 하면서 그것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조금씩 배워 나갔고, 지금은 그것들이 나를 찾아올 때 이전보다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고마운 진전이다.

   이런 작업을 하면 할수록, 사람이 혼자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게 참 중요하다는 점을 절감한다.

   관계 안에서 일어난 문제들 전부가 관계 문제인 건 아니었다. 그 중 일부분은 각자의 문제였다. 각자의 문제가 관계 공간 안에 쏟아진 것이었다. 그 부분을 인지하고 나니, 상대의 돌발적인 짜증이나 분노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행동하니, 상대도 내 갑작스러운 감정 변화를 만날 때 나에게 틈을 내어 주었다. 혼자 있을 틈. 혼자 생각할 틈. 혼자 추스를 틈. 그것은 회피가 아니라 배려였고, 무시가 아니라 존중이었다.

   인간관계라는 게 예전에는 두 개의 직선이 나란한 모습인 것 같더니, 지금은 두 개의 지그재그가 나란한 모습인 것 같다. 서로의 상태에 따라 서로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면서 나란히 걸어 나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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