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꺼풀강사 역사탐방 - 4]수원 화성(華城)에서 마주한 보물 제14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우리 곁에 살아 숨쉬는 수원시 도심속 보물문화재, 진각국사탑비를 찾다!

2018-08-08     양평호

8월 7일. 고려 말 활동했던 고승 진각국사(1307-1382) 천희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보물 제14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를 찾았다. 

보물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는 도심속 보물문화재로 수원 화성(華城)의 북암문과 동암문 사이 삼일상업고등학교 맞은 편인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 13-1번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양평호강사의

의도적인 만남은 아니었다. 노사발전재단 경기중장일자리센터에서 퇴직자 . 퇴직예정자 . 구직자를 대상으로 인간관계교육 & 인맥관리교육이 있었고, 강의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국으로 많은 강의를 다니며 그 지역에 있는 문화재를 찾아 떠나는 역사탐방이 매 순간 즐거움과 행복으로 다가온다.

진각국사탑비는

강의를 마치고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찾았고, 탑비 옆에 주차장이 있어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하지만 도로변 인도 윗쪽으로 비각 하나만 덩그러니 서 있을 뿐 어떤 안내 표지판도 보이지 않았다. 주변을 한참 둘러본 후에야 혹시 저것이 '보물 제14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인가?' 하는 생각으로 다가갔다. 사전에 계획하지 않으면 이것이 우리의 소중한 도심속 보물문화재라는 것을 알 수 없을 듯 했다. 

고려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는 진각국사(1307-1382) 천희의 출생에서 입적하기까지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하고 있는 탑비로 입적한지 4년이 지난 1386년 창성사 경내에 세어졌다. 진각국사 천희는 1307년(충렬왕 33)에 출생하여 1319년에 출가하였으며 1367년 (공민왕 27) 국사로 봉해지고 1382년(우왕 8) 76세의 나이로 광교산 창성사에서 입적하였다. 한편 이 탑비는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4호에 지정되었다.

비각

비각 안에 있는 진각국사탑비의 모습으로 비각 문이 굳게 닫혀 있어 전체 모습을 담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직사각형의 비받침 위에 비몸돌을 세운 다음 지붕돌을 올려놓았다. 비문을 새긴 비몸돌은 마멸이 심하고 오른쪽 모서리가 떨어져 나갔으며,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비문에는 진각국사가 13세(1319년-충예왕 6)에 입문한 뒤 여러 절을 다니며 수행하고 부석사(浮石寺)를 중수하는 등 소백산에서 76세에 입적하기까지의 행적이 실려있다.

보물

간략화된 고려 후기 석비의 형식을 보이고 있으며, 칠곡 선봉사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와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보물 제229호), 여주 신륵사 대장각기비(보물 제230호) 등과 비교할 만 하다. 글씨는 고려 전기의 힘있는 풍모가 사라진 투박한 것으로, 고려 후기의 글씨가 퇴보하였음을 보여준다. 비문은 이색이 짓고 승려인 혜잠이 글씨를 새겼다.

수원

8월 7일. 노사발전재단 경기중장년일자리센터에서 대인관계교육 & 인맥관리강의를 마치고, 도심속 보물문화재 보물 제14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를 찾았다. 무더운 날씨에 땀은 흘러내리고, 비신에 새겨진 비문을 읽고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의 소중한 보물문화재를 소개하는 것으로 행복하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의 말처럼, 우리의 소중한 역사요, 자긍심인 우리 문화재를 우리들 스스로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남들 눈에는 단순한 돌덩이로 보일 수 있지만 나에게는 후대에 온전한 모습으로 물려주어야 할 우리의 소중한 문화재이다. 보물 제14호 수원 창성사지 진각국사탑비 역사탐방을 마치면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다른 문화재들로 볼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불어 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찬란한 문화재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재 보호에 앞장서며, 후대에 소중한 우리 것을 물려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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