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칼럼](13)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매복전투(상)
[연재칼럼](13) 서경석 장군의 "전투감각(Feel for Combat)" : 매복전투(상)
  • 박재균 기자
    박재균 기자
  • 승인 2022.01.26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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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우전, 먼저 보고 먼저 쏴라. 그리고 과감하라

* 파이낸스 투데이는 월남전의 영웅 서경석 장군(예비역 중장)의 승락 하에 저서 '전투 감각(Feel for Combat)'을 연재합니다. '전투감각'은 월남전 파병 당시 소대장, 중대장 시절의 전투 현장 경험을 상세하게 기술한 서경석 장군의 역작으로, 현재까지 초급장교의 전투 교육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명저입니다. 월남전 파병 장병의 고뇌와 어려움, 전투 현장의 숨막혔던 순간을 더 많은 국민에게 알림으로써, 파병 애국 용사를 조금이나마 더 이해하고 격려하자는 파이낸스 투데이의 취지에 흔쾌히 동의해 주신 서장군님께 감사의 뜻을 전하며, 연재를 시작합니다. 아울러, 머나먼 타국에서 뜻하지 않게 유명을 달리하신 애국 장병의 명복을 충심으로 빕니다. 사진 자료를 제공해준 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에 감사하며, 참전자회에 독자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모든 준비는 출발 전에. 다음은 믿고 맡겨라. 쓸데없는 간섭은 금물이다

1969년 11월경이었다. 나는 중대의 전초진지인 166고지에 올라가 있었다. 오늘은 지난번 수색정찰 때 적의 흔적을 발견한 고지 밑의 교통호에 매복하기로 했다. 이 교통호는 월남인들이 프랑스군과 싸울 당시, 월남 민병대들이 파놓은 교통호였다. 폭 3m, 깊이 4m정도로, 항공기가 뜨면 대피소로 사용했고 지상군이 공격하면 일종의 함정으로 사용했던 곳이었다. 사각형으로 된 넒은 면적의 외곽에 교통호가 파져있었고, 호는 동서남북으로 연결되어 한쪽 면이 500m정도로서 전체 길이는 약 2km정도나 되었다.

우리는 이 지역 일대를 수없이 지나 다녔지만 그 호 안에 들어가 보는 것은 몹시 싫어했다. 그곳은 너무 깊었을 뿐 아니라 때로는 물이 차서 들어가기 곤란했고, 심지어는 바닥에 청독사나 독충이 많았으며, 풀이 양쪽 벽면이나 밑바닥에 무성하게 자라나 있었기 때문이다. 밖에서 보기에도 우중충하고 기분 나쁜 곳이었다.

하루는 주간수색을 하다가 사태가 나서 무너진 곳을 이용하여 밑으로 내려가 보았더니 호 바닥에 사람 다닌 흔적이 많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166고지로 다시 올라와 수색을 함께 나갔던 3소대장 한중위를 불러 매복을 지시했다. 소대를 2개조로 나누어서 조편성을 하고, 사각형의 교통호를 살상지대로 하여 적이 교통호 내로 들어오면 충분히 유인하였다가 교통호 위에서 크레모아와 수류탄으로 적을 격멸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2명을 1개조로 하고 조와 조간을 30m 이격했으며, 교통호 위쪽에 크레모아를 설치해서 위에서 아래로 타격하도록 계획했다. 수류탄은 개인당 5발 이상을 휴대시켰다.

갓손 계곡을 한눈에 내려다보는 166고지 정상. 우리 중대는 이 고지에 전초진지를 설치하고 계곡을 감시하였다. 좌로부터 대대 작전장교 서용원 대위, 12중대장 박귀순 대위, 11중대장 서경석 대위. [사진:서경석 장군 제공] 

한 중위가 내려간 지 한 시간이 좀 지났을 때였다. 고지에서 교통호 매복지점까지 5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기 때문에 1시간 남짓 지난 지금쯤은 병력배치를 하면서 호를 파고, 크레모아를 설치하는 등 매복 준비를 한참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이렇게 매복준비 중일 때가 가장 취약한 시간이었다.

별안간 소대장 조가 있을 것으로 예측되는 곳에서 총소리 한발이 “땅”하고 났다. 그리고는 또 조용했다. 경계병이 쏘았거나 오발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무 소식이 없었다. 답답해서 무전기로 물었다. 예측한대로 한중위 역시 경계병을 배치한 곳에서 총소리가 한발 났는데 자기도 지금 무슨 영문인지 전혀 모르니 확인될 때까지 기다리라는 대답이었다.

이럴 때는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 하고 싶은 지시사항이 있으면 간략하게 요점만 전달해야 한다. 지휘관이 서두른다거나 중언부언 말을 많이 하면 절대 안 된다. 무전통화 때문에 귀중한 즉각조치 시간을 놓치기 때문이다. 소대장도 자기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 그의 능력을 믿고 조치하기를 기다려야한다. 소대장을 믿기 어려우면 떠나기 전에 예행 연습과정을 통해서 철저하게 사전지도를 해야 한다.

답답한 시간을 얼마나 보냈을까? 산 위에서는 박격포 차단사격과 조명준비를 완료하고 박격포 사격요원들이 명령만 기다리고 있었다. 소대장으로부터 보고가 왔다.

“적의 안내를 담당한 첨병이 다가오는 것을 경계근무자가 자기 앞에 올 때까지 기다린 후, 적을 코앞에다 놓고 한발로 심장을 뚫어 사살했으며 시체를 끌어다가 소대장호 옆에 놓고 나뭇가지로 덮어 두었습니다”

이어서 소대장은 매복진지 점령 완료보고를 했다. 나는 반드시 그 교통호 속으로 적이 빠르면 30분 정도 후에, 늦으면 내일 새벽에 올 터이니 눈 똑바로 뜨고 근무하라고 경고했다.

소대장과 마지막으로 교신한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서 적이 접근한다는 신호가 왔다. 적이 접근하면 기도비닉 유지를 위해 무전기로 말은 하지 않고 무전기 송수화기를 가슴속에서 두 번씩 연속하여 키만 눌러야 했다.

“칙칙, 칙칙, 칙칙……”

산위에 있던 우리들은 긴장과 흥분 속에 조명탄사격과 차단사격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하고 대기했다. 이처럼 결정적 시기에 무전통신은 절대 금물이다. 적이 듣고 도망쳐 버릴 뿐 아니라 소대장과 무전병이 교신 때문에 즉각조치에 차질이 생길 수 있고 또한 현장 감각이 없는 중대장이 자칫 엉뚱한 지시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통상 이 정도 상황이 전개되면 무전병은 아예 무전기를 꺼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그들을 믿고 차분히 기다려야 한다.

노획품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드디어 크레모아와 수류탄이 터지고 수타식 조명이 공중에서 ‘팍’퍼졌다. 박격포 조명탄이 날아갔고 주변이 대낮같이 밝아지면서 무전교신도 정상적으로 되었다. 바로 우리가 정찰했던 그 장소, 그 자리, 우리 병력이 기다리고 있는 교통호 안으로 들어온 적을 100여m의 살상지대에 정확하게 집어넣고 교통호 위에서 크레모아와 수류탄으로 완전히 섬멸해 버렸다. 30여명의 적을 사살했던 것이다.

한 중위는 이 작전으로 충무 무공훈장을 받았고, 적의 안내병을 한발에 쓰러뜨린 경계병은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으며, 다른 장병에게도 많은 포상이 수여되었다. 2년여의 소대장, 중대장 시절을 통틀어 내가 가장 완벽하게 수행했던 매복작전이었다. 나는 이번 매복작전에 성공한 한 중위를 더 데리고 있다가는, 나와 중대로서는 좋지만 그가 몸성히 귀국할 것 같지 않아 상급 지휘관에게 건의하여 연대 전투지원 중대 소대장으로 전출시켰다.

조우전, 먼저 보고 먼저 쏴라. 그리고 과감하라

1969년말경, 이 시기에 우리 중대지역에는 많은 월맹정규군이 나타났다. 하루는 아침나절에 고지근무 교체병력 1개 소대와 함께 166고지로 올라가다가 하단부 근처의 개울 숲에서 약 150명 정도의 월맹정규군 이동병력과 조우했다.

우리 중대의 선두 병력이 이동하는 적 무리를 발견하고 월남어 통역병을 시켜서 확인하는 사이, 적이 먼저 사격하는 바람에 교전이 붙었다. 적과의 거리는 약 200m정도, 서로 조준사격이 가능한 거리였다. 나는 적을 발견한 순간 잠시 머뭇거렸다. 산위에 있는 중대원이 마중을 나온 것이 아닌지, 혹시 지역 내의 월남 지방군이 수색을 나온 것은 아닌지 등을 생각하는 사이에 적이 먼저 총을 쏘게 하는 기회를 주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총에 맞은 사람은 없었지만 적을 빤히 보면서도 판단착오로 먼저 쏘지 못했다는 것은 큰 실책이었다.

고지에서 박격포 사격을 실시하고, 포병사격을 유도하여 지역일대를 사정없이 두들겨 패니 적은 응사도 제대로 못하고 곧 도주하여 버렸다. 포병사격을 중지시킨 후 중대원을 이끌고 공격을 했다. 하천을 건너가 보았더니 적은 이미 도주하고 없었으나 여기저기에 메고 왔던 배낭을 버려둔 채 부상병을 둘러업고 도주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개울을 따라 한참을 추격했으나 적의 꼬리를 잡지 못하고 피 묻은 붕대와 헝겊조각만 한 보따리 회수해서 고지로 되돌아 왔다. 상급부대에서는 피묻은 배낭과 붕대를 보고는 약 30명 정도의 비전투손실이 난 것으로 판정했다.

노획품 정리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조우전, 순간적인 판단이 빨라야 한다. 그리고 먼저 쏴야 한다. 과감하게 덤벼들어야 한다. 피차 전투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므로 과감한 쪽이 승리하는 법이다. 우물우물하면 호기를 상실한다. 군복 색깔, 군화 철모, 배낭 등을 보고 직감으로 첫눈에 적인지 아군인지 구분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번의 경우, 출발 전에 이미 대대에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판단이 늦었다. 중대장이 166고지에 올라간다고 통보하면 고지에서 안내병이 하천까지 내려왔던 일이 가끔 있었고, 이따금 월남 지방군과 이 지역 수색을 함께 한일이 있었기 때문에 ‘혹시 오인사격을 해서 우군을 죽이면 어찌하나’하는 우려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항상 생각하면서 걸어야 한다. ‘늘 다니는 길인데 무슨 일이 있으려고’하는 안일한 생각이나 행동은 절대 금물이었다.

고지에 도착하고 난 그날 오후 뒤늦게 대대에서 중요한 첩보가 전달되었다. 당시 월맹정규군에는 북괴에서 파견된 장교들이 월맹군과 함께 무전기로 우리의 통신 내용을 도청해서 그들의 작전을 도와주는 한편, 삐라나 선전문을 우리 한글로 만들어 심리전을 전개하고 있다는 첩보가 입수되어 있었다. 바로 그 북괴군이 월맹군과 함께 우리 중대지역을 통과한다는 첩보였다. 그렇다면 오전에 조우한 월맹군 무리 속에 북괴군이 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되었다. 잘 하면 잡을 수도 있었는데 모두들 몹시 아쉬워했다.

166고지에 올라온 첫날부터 중대는 ‘캇숀’ 계곡을 완전히 틀어막고 이곳을 지나갈지도 모를 북괴군을 잡으려고 전 중대가 매복작전에 들어갔다. 첫날 들어가자마자 임 중위가 지휘하는 제2소대에서 적게릴라 한 명을 사살하고, 권총을 찬 간부 한 명의 다리를 맞춰 부상을 입히고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바로 같은 날 밤이었다. 10시쯤 되었을 때였다. 나와 함께 매복하고 있던 제1소대의 선임하사조에서 적 발견신호가 왔다. 곧 이어서 길을 안내하는 적의 첨병 한 명이 우리 앞을 덜렁덜렁 지나갔다. 조그만 배낭을 하나 짊어지고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가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숲속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후속하는 본대가 있을 것으로 믿고, 쏘지 않고 그대로 살려서 통과시켜 주었다. 15분 정도 지나자 똑같은 길로 5명이 걸어서 내려왔다.

좌우의 매복조는 중대장 지시가 없으면 크레모아를 누르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5명의 적 뒤에 더 많은 적이 오는지를 기다렸다. 좌측 소대의 선임하사조에서 전혀 소식이 없었으므로 후속해서 오는 적이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우측조에 크레모아 사격신호를 보냈다.

“쾅 쾅…….”

조명탄을 띄워 놓고 총을 쏘면서 전방으로 나가 확인했다. 5명의 적은 전부 사살되었다. 우리는 시체를 끌어다가 호 뒤쪽에 놓고 풀로 덮어두고 밤을 보냈다. 다시 올지도 모를 적에 대비하여 크레모아를 재조정하고 소로에 흩어진 적의 배낭과 신발, 소총들을 전부 치웠다.

중대장인 나의 생각으로는, 침투하자마자 두 곳에서 적과 교전을 하여 탄약을 많이 소모했고 피로도 겹쳤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므로 적과 접전이 없었던 일개 소대규모만 남겨서 잔류 매복을 시키고 남아 있는 크레모아와 실탄 등을 모두 인계한 뒤, 적과 접전이 있었던 조는 다음날 아침 일찍 철수시키기로 결심했다.

늪지대를 건너는 장갑 소대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확인 사살, 안하면 당한다

아침이 되었다. 날이 밝자 연대장님과 대대장님이 현장으로 격려차 오신다는 전달이 왔다. 전리품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소총과 배낭 및 시체들을 정리해야 했다. 어젯밤에 사살했던 적의 시체를 개활지로 옮겨 놓으려고 덮어두었던 풀과 나뭇가지를 걷었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내 눈으로 시체가 다섯 구인 것을 분명히 확인했는데 하나가 없어지고 네 구뿐이었다.

도대체 죽은 놈이 어디로 갔단 말인가?

여기저기 찾아보았으나 연대장님이 현장에 오셨을 때까지도 찾아내지 못했다.

중대장인 나는 허위 과장보고나 하는 실없는 중대장이 되고 말았다. 연대장님도 대대장님도 시체가 밤사이 증발해 버렸다는 보고는 귀담아 들으시지 않았다.

“4명이나 5명이나 무슨 차이가 있나?”

“여하튼 수고했다.”

내가 네 명을 잡아 놓고 하나 정도 덤으로 붙여서 다섯 명으로 보고한 것으로 생각하셨던 모양이다.

현지 격려를 마치시고 떠나시기 직전에서야 비로소 주변을 수색하던 중대원에 의해서 가시덤불 속에서 증발했던 적을 다시 찾아냈다. 크레모아 파편을 가까이서 맞은 모양이었다. 허벅지 이하에만 많은 파편이 박혔고 허리 위에는 한발도 맞지 않았다. 하체에서 나는 피를 얼굴과 가슴 등에 자기 손으로 바르고는 죽은 체하고 있다가 밤에 몰래 빠져나가 가시덤불 속에 숨어 버렸던 것이다. 그는 자기 옷을 찢어서 상처부위의 지혈을 잘했기 때문에 밤새 살아 있을 수 있었다.

“너희 중대는 안 해보는 것 없이 다해보는구나. 확인을 확실히 해야지.”

연대장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남기시고 연대로 돌아가셨다. 그렇다. 반드시 확인사살을 해야 한다. 적의 후속제대가 뒤따라올지도 모른다는 조급함 때문에 시체를 옮기는 데만 정신이 팔려서 순간적으로 잊어버려 생긴 실수였다. 연대장님이 떠나신 후 전과 정정보고를 했다. 생포 1명, 사살 4명으로…

잃었다가 다시 찾은 전투음어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희망을 버리지 마라.

중대장 시절 우리 중대에는 내가 파월되기 전에 15사단에서 최초 소대장을 할 때 함께 근무하던 제OO 중사가 있었다. 내가 소대장 시 그는 분대장을 했으나, 우리 중대로 파월된 후 중사로 진급하여 소대 선임하사를 했다. 제중사는 내가 이곳에 있는 줄도 몰랐고, 1연대까지 전입 와서야 옛날 소대장이 중대장으로 근무하는 것을 알았다. 연대 인사과에서 부탁도 하고 나에게도 연락이 왔기에 다른 중대로 갈뻔한 것을 우리 중대로 데리고 왔다.

제중사는 눈이 커서인지 겁이 많은 편이었고, 머리에 상처가 있어 땜질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사람이 착하기가 이를 데 없었으며, 마음이 너무 좋아서 늘 손해를 보며 지냈다. 항상 성경을 가까이 했고, 부대 내에서도 병사들과 함께 찬송가를 부르며 가끔 기도도 하곤 했다. 자기 소대원에게 한 번도 욕하는 법이 없었으며, 남에게 싫은 소리하기를 무척 꺼려했다. 위험한 일은 겁이 나서 덜덜 떨기는 했지만 누구보다도 앞장서기를 잘했다. 그렇지만 언제나 주위가 산만하고, 태평스럽고, 세상에 바쁜 일이라곤 없었으며 어디든지 가면 무엇을 흘리고 다니기를 잘했다. 우리 중대에서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지만 그는 수난을 많이 겪었다.

대민 의료 지원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그가 일으킨 사전 중 제일 큰 것은 매복을 나갔다가 전투음어를 분실하고 돌아온 사건이었다. 당시 월남전에는 북괴군 고문관이 월맹군 측에 참전하여 우리의 무선교신을 도청하면서 월맹군 작전을 지원하고 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으므로 전투음어를 제작하여 사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복 나갔다가 이 전투음어를 어딘가에 흘리고 돌아 왔다. 그는 전날 밤 중대기지에서 약 4km 떨어진 숲 속에서 매복하다가 혼자 오는 적을 사살해서 크게 망신을 당했다.

원래 우리 중대는 혼자 앞에 오는 첨병을 쏘는 사람을 두고, ‘겁장이’요 ‘비겁한 군인’이라고 비난했고, 비록 적을 잡더라도 자기 소대나 분대의 수치로 간주해 왔었다. 적을 처음 발견한 병사가 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적 첨병을 통과 시켰는데 중앙 지점에서 근무하던 제중사가 자기 조 앞에 적이 지나갈 때 크레모아를 눌러버렸다는 것이다. 대원들이 선임하사 때문에 망쳤다고 빈정대면서 ‘중대장이 꾸짖으면 무어라고 대답하겠느냐?’고 묻는 고참병들에게 ‘빈손으로 가는 것 보다는 낫다’는 식으로 말할 만큼 태평스러운 사람이었다.

다음날 새벽에 적의 시체를 땅에 묻어주고 매복했던 자리를 정리 한 뒤 중대기지로 돌아 왔다. 중대에 도착하자마자 전투음어를 반납해야 되는데 찾아보니 없었다. 나는 그길로 중대원을 인솔하고 잃어버린 전투음어를 찾으려고 어제의 매복지점으로 다시 갔다. 어제 매복했던 호를 다시 파보기도 하고 적을 묻었던 장소도 파 보았지만 찾을 길이 없었다.

그러나 매복 병력이 철수한 후 이곳에 몇 명의 적이 왔다간 흔적을 발견했다. 즉 우리 병사들은 국산담배나 양담배를 피웠고, 또한 매복 나올 때 담배를 한 사람도 지참하지 않았는데도, 어젯밤에 파고 들어갔다가 아침에 다시 메워버린 호 근처에 월남 사람들이 즐겨 피우는 담배꽁초 몇 개가 흩어져 있었다.

담배필터나 종이가 아직 깨끗했다. 분명히 적이 다녀간 것이 확실했다. 적들이 첨병을 뒤따라오다가 어디엔가 숨어 있었음에 틀림없었다. 아침에 철수할 때 습격을 받거나 역매복에 걸려들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제는 산에서 마을 쪽으로 내려오는 적을 타격했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산속에 계급이 높은 적 지휘관이 있을 것이며, 그들의 지휘관에게 보고하기 위해 음어를 가지고 빠른 시간 내에 산으로 다시 들어가리라고 예측되었다. 나는 대대에 전투음어를 분실한 사실을 보고하고, 3일 이내에 반드시 찾겠으니 음어를 분실한 제중사를 3일 동안만 함께 작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건의 드려 승낙을 받아냈다. 중대에는 상급부대의 음어관계관이 와서 우리와 함께 음어를 찾는데 협력했다.

우리는 비장한 각오로 음어회수작전에 임했다. 전 중대원을 3명 일개조로 편성하여 조당 거리를 평균 50~100m정도 이격시켜서 약 2km정도 되는 ‘캇숀’ 계곡 입구를 완전히 막았다. 출동하기 전에 군장검사를 하면서 일장훈시도 하고, 현상금도 걸었다.

대민 의료 지원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극비문서인 전투음어가 적의 손에 들어가서 북괴에서 온 장교의 손으로 면밀히 연구, 분석된다면 앞으로 교신내용이 적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많은 전우가 희생된다는 내용을 강조했으며, 중대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주길 당부했다. 또한 찾지 못하면 중대장과 제중사가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는 사실에 중대원들은 많은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꼭 찾아서 돌아오겠다는 다짐을 하고 대원들이 중대정문을 나서서 컴컴한 어둠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중대 기지에는 화기소대를 포함하여 20여명만 최소의 기지경계를 위해 잔류시켰고, 나는 관망대 위에 올라가 밤을 보냈다.

그날 밤, 중대는 세 군데서 적과 접전을 했다. 나는 전투음어를 분실한 제중사와 그가 인솔했던 어제의 매복조를 같은 장소로 다시 내보냈다. 그길로 적들이 다시 올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새벽 두 시경, 관망대에서 폭음소리를 듣고 바라보니 제중사가 매복하고 있는 장소 상공에 적과의 접촉을 알리는 빨간색의 수타식 조명탄이 떠올라 있지 않은가!

‘살상지대로 10여명의 적을 완전히 유인하여 전부 사살했다’는 보고가 날아왔다. 미리 출발 전에 이르기를 적 첨병은 음어를 절대 갖고 있지 않으며, 본대에 있는 간부가 소지하고 있을 것이므로 절대 첨병을 공격하지 말고 반드시 통과시킨 뒤 본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었다. 첨병을 타격하는 조는 전부 군법회의에 회부시키겠다는 중대장의 의지를 병사들은 실천에 옮겨주었다. 제중사는 두 명의 첨병을 통과시키고 본대를 타격했다.

그들은 조명 아래에서 경계병을 배치하고, 적의 군장과 옷을 전부 벗기고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적의 지갑 속에서 제중사가 분실했던 바로 그 음어를 기적같이 찾아냈다. 그 음어는 크레모아 파편에 구멍이 났고, 선혈이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정말 기적같은 행운이었다.

우리 중대는 유명해졌다. 주월한국군 최초로 전투음어를 분실하여 적의 수중에 들어가게 하여 유명해졌고, 또 그 분실한 음어를 분실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분실했던 그 장본인이 다시 찾아냈기 때문에 더욱 유명해졌다.

독수리 맹호 12호 작전 시 베트콩을 향한 맹호의 분노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전투 그 자체에 무서움이나 공포를 이기지 못하는 병사들을 이해하고 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음어분실 사건 이후, 제중사는 최소한 대대 내에서만큼은 유명인사가 되어버렸다. 그는 그 후 몇 번이나 엉뚱한 행동을 해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 첫 번째가 한 병사의 자해사건이었다.

사냥꾼이나 낚시꾼처럼 멧돼지를 쓰러뜨리거나 월척을 낚아내기 위해 스스로 고생하며 스릴을 찾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살생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전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싸움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서움이나 공포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떠는 사람도 있다.

제중사의 대원 중 한 병사가 전입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야간 매복을 나갔을 때, 밤의 공포를 극복하지 못하고 호 안에서 근무를 서다가 자기 우측발의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 사이에 총을 대고 쏜 사건이 발생했다. 소위 전장에서 자해를 한 것이다.

호 안에는 다른 두명의 동료가 함께 있었는데 그 당시 그들은 가면을 하고 있었다. 적이 접근하면 눈뜨고 근무하는 병사가 옆의 가면하고 있는 동료를 깨운다. 그리고 함께 전투를 한다. 우리 병사들은 그런 절차에 숙달되어 있었다. 그들이 가면 상태에 있을 때 전혀 예고도 없이 호 안에서 총소리가 “땅”하고 났으니 어찌 되었겠는가?

같이 있던 한 병사는 벌떡 일어나 앉아 총을 잡고, 자해한 병사를 보면서 “적이 어디 있느냐?”고 묻고 사격준비를 했다. 이 병사는 다가오는 적을 향해 근무자가 총을 쏜 것으로 믿었다. 다른 한 병사는 엉뚱하게도 호에서 뛰쳐나가 매복지점의 측후방으로 뛰어 달아났다. 이 병사는 적이 호 앞에까지 와서 호 안에다 대고 총을 쏜 것으로 착각했다. 그가 뛰어 가면서 측후방에 동료가 설치한 조명지뢰를 터뜨리자, 인접 매복조 근무자가 후방에 매설한 크레모아를 터뜨리고 사격을 했다.

그는 뛰어 달아나다 정신이 들었는지 약 20m정도 후방에 있는 작은 둑 밑에 엎드렸다. 간발의 차이로 전우의 총에 맞아 죽는 것을 면했다. 행운아였다. 네다섯 발자국만 더 뛰어갔어도 전우의 크레모아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참으로 다행인 것은, 자해한 병사가 겁에 질려 자기 옆의 고참 병사에게 “무서워서 제가 제발을 쐈어요”하고 부들부들 떨면서 즉시 이실직고를 하였기 때문에 옆의 고참병이 총기오발이라고 고함을 질렀고, 그 때문에 엉뚱하게 벌어진 이 사건은 운 좋게 끝났다.

그런데 이사건의 뒷처리를 제중사는 또 엉뚱하게 했다. 그는 전장에서 자해를 하면 현장에서 즉결처분을 하거나 군법회의에서 사형에 처할 만큼 엄하게 다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사건 자체를 보고도 하지 않고 꿀꺽 삼켜버렸다. 자기는 말할 것도 없고 함께 매복한 병사들까지 함구하도록 교육을 철저히 시켰다. 근무병이 허깨비를 보고 적으로 오인하여 일어난 촌극이라고 조작해서 보고했다.

또 TV 한 대가 날아간다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전장에서 깊은 밤에 무서워지기 시작하면 전입 온 지 얼마 안 되는 신병들이 나무 등걸이나 돌을, 총을 든 적으로 오인하여 사격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쩌다 한 번씩 발생했기 때문에 나는 제중사의 허위보고를 사실로 믿어버렸다.

3일째 되는 날 모든 사실이 들통나고 말았다. 그날은 제중사팀이 다시 매복 나가는 날이었다. 군장검사를 마치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 자해했던 그 병사는 다시 총을 들고 호로 들어가 지난번에 쐈던 발가락사이를 또 쐈다.

중대장 앞에 불려온 그의 군화에는 피가 흥건히 고여 있었다. 아무리 물어도 말을 못하고 사시나무 떨 듯 와들와들 떨기만 했다. 군화를 벗기니 실탄이 지나간 자리가 나란히 두 군데였다. 잘못해서 연발사격이 된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순간적으로 자해라는 의심이 들어 다그쳐 물었으나 와들와들 떨기만 하고 말을 더 이상 못했다.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더 확인을 못하고 중대의 급수차에 태워서 대대의 의무지대로 후송했다. 나는 후송 간 병사가 자해한 것으로 의심이 되니 대대에서 좀 더 자세히 조사해 달라고 보고했다.

다음날 아침, 매복에서 돌아온 제중사가 매복 복귀신고를 마치고 중대장실로 따라 들어 왔다. 의자에 앉은 내 옆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어제의 사고에 대해 용서를 비는 줄 알고 부하를 걱정하는 그를 오히려 위로했다. 그러나...... 그의 보고를 다 듣고 난 후 나는 새로운 사실, 즉 전장에서 인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고뇌와 고통의 한 부분을 체험했다.

후송 간 병사는 전입 온 지 얼마 안 되는 신병이었다. 며칠간 기지 내에서의 동화기간이 지나 첫 매복을 나갔다. 당시 이 병사의 분대는 소대장인 한 중위조에 편성되어 며칠 전에 큰 전과를 올렸던 교통호 매복에 참가한 경험이 있었다. 앞에서 이미 소개했듯이 그의 소대는 30여명의 적을 교통호 안으로 유인하여 몰살시켰다. 이런 경우, 시체에 대한 전장정리는 주로 신병들의 차지였다.

신병의 입장에서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었던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적의 시체를 한곳으로 모으고, 갈기갈기 찢겨진 옷 속에서 피범벅이 된 소지품을 수집하여 첩보의 가치가 있는 문서와 기록물을 찾아내야만 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 병사는 겁에 질려 떨기 시작했다. 음식을 먹으면 자주 토하고 아예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밤만 되면 악몽에 시달렸다. 무서워서 잠도 못 잤고 며칠사이에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피로가 극에 달했으며, 점점 야위어 가더니 끝내는 자기 감정을 자기가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와버렸다. 불과 며칠사이였다.

게다가 고참병들은 신병의 그러한 행동을 꾀병으로 간주하고는 그의 호소를 전혀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집단의 수치로 생각하고 윽박지르기만 했다. 제중사는 그 모든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이런 증세는 약으로는 치료할 수 없고, 오로지 하나님의 힘으로만 치료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첫 번째 자해가 있고 난 후 그 병사의 고통을 잘 알고 있던 제중사는 늘 그 병사와 함께 있었다. 낮이나 밤이나 그를 데리고 기도했다. 밤이면 그 병사가 잠들기 전까지 그의 곁에 쭈그리고 앉아 기도했고, 야간에 기지 내 경계호에서 경계근무를 할 때는 그의 손을 잡고 함께 근무하면서 작은 목소리로 함께 기도했다. 자기 자신의 허위보고에 대한 잘못과 병사의 자해를 용서하고, 고통과 괴로움, 무서움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의 대원들 역시 그의 진지한 종교적 태도에 감동되어 다 같이 입을 다물어 주었다. 아무도 보고를 하지 않았다.

첫 번째 자해사건이 있은 지 3일이 지난 후, 다시 매복임무를 부여받았다. 그 병사는 엄습해오는 고통과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할 자신이 없어 다시 발가락을 쏴버렸다. 전장에서 자해행위를 한 그 병사는, 당시 상황으로 보아 즉결처분할 여건은 못된다 하더라도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중벌을 받게 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제중사의 울먹이는 보고를 다 듣고 난 나는 그를 돌려보내고 나서 군율을 공정하게 다스려야 하는 지휘관으로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대로 보고를 해서 처벌을 받게 할 것인가? 아니면 모른다고 할 것인가?

제중사가 사실대로 보고를 하지 않았으면 나도 자세한 사실을 알 수 없었다. 나는 자해사건에 대해서 추가로 보고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공포감을 받아들이는 감각이 다르고 개인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가 받은 심적 고통과 두려움은 우리 인간으로서 얼마든지 이해하고 수용해야 된다고 믿었다. 이미 그는 벌을 받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판단했다.

그 병사가 후송 간 후에도 상급부대에서는 몇 차례 문의를 해왔다. 그때마다 ‘경계호에서 소총 손질도구를 개머리판에 집어 놓기 위해 총을 거꾸로 놓고, 뚜껑을 열고 집어넣다가 노리쇠뭉치가 충격을 받는 바람에 격발되어 발가락을 다쳤다’고 주장했다. 이런 경우에는 오발로 처리되어 벌을 받지 않는다. 나에게 ‘사실이냐?’고 재차 물었을 때에 ‘현장에서 아무도 본 사람이 없어 확실한 증명을 할 수는 없다’고 답변했다.

랜딩지점을 확보하라. 사주 경계를 철저히 [사진:대한민국월남전참전자회 제공]

그는 우리 중대를 떠났다. 그러나 그가 남긴 여운은 그리 달갑지 못했다. 그 병사는 제중사의 간절한 기도대로 인간적인 고뇌와 고통을 청산하고 싸움터의 공포에서 완전히 벗어났겠지만, 지금 어디에선가 인생의 수치스러운 부분을 간직한 채 살고 있을 것이다. 제중사의 허위보고와 변명, 자기과오와 병사의 두려움을 씻어주기 위한 간절했던 기도, 그것이 아름다운 것이었는지 또는 허위로 가득 찬 변명이었는지 지금도 판단이 옳게 내려지지 않는다.

중대장으로서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고 자해한 병사를 비호 한 것은 상급부대의 꾸지람이 두려워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었다.

내 나라의 전쟁도 아닌 남의 나라 전쟁터에 잘못 뛰어든 그를 낙인찍힌 인간으로 살게 만든다는 사실이 내 자신을 두렵게 했을 뿐이다.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은 것을 잘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공포에 시달리던 그를 이해하고 용서함으로써 전과자로 만들지 않고 우리 사회의 건전한 시민으로 살 수 있게 해주었다는데서 의미를 찾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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