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 칼럼] 억겁(億劫)의 인연
[전정희 칼럼] 억겁(億劫)의 인연
  • 전정희 소설가
    전정희 소설가
  • 승인 2021.05.04 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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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因緣)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 사이에 맺어지는 관계를 말한다. 인은 결과를 만드는 직접적인 힘이고, 연은 그를 돕는 외적이고 간접적인 힘이다. 석가모니는 ‘모든 것은 인(因)과 연(緣)이 합하여져서 생겨나고, 인과 연이 흩어지면 사라진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인연’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가장 먼저 피천득 씨의 수필 ‘인연’이 떠오른다.

십 년쯤 미리 전쟁이 나고 그만큼 일찍 한국이 독립되었더라면, 아사코의 말대로 우리는 같은 집에서 살 수 있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뾰족 창문들이 있는 집이 아니라도. 이런 부질없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 집에 들어서자 마주친 것은 백합같이 시들어 가는 아사코의 얼굴이었다. ‘세월’이란 소설 이야기를 한 지 십 년이 더 지났었다. …… 아사코와 나는 절을 몇 번씩 하고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한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마지막 문장은 밑줄을 그어놓고, 그 뒤로도 몇 번이고 더 꺼내 읽으면서 먹먹해지는 마음을 달래기 위해 한참씩 창밖을 내다보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아마 아사코 같은 인연을 평생 마음속에 품고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이 있으리라 생각된다.

눈 깜짝할 사이를 ‘찰나’라고 하고, 손가락을 한번 튕기는 시간을 ‘탄지’, 숨 한번 쉬는 시간을 ‘순식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겁(劫)’이란 헤아릴 수조차 없이 길고 긴 시간을 말한다. 다시 어학사전을 뒤져본다. ‘겁이란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는 무한히 긴 시간,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라는 뜻’이라고 되어 있다.

힌두교에서는 43억 2천만 년을 ‘한겁’이라고 하고 지붕의 낙숫물이 집채만한 바위를 뚫는 시간도 ‘한겁’이라 한다. 또 잠자리가 날갯짓으로 바윗돌을 닳아 없어지게 하는 시간을 ‘한겁’이라고도 한다. 생각해 보라, 손으로 만지기만 해도 곧 부스러질 약하디 약한 잠자리의 날갯짓이 바윗돌을 닳아 없앨 정도의 시간이라니……, 솔직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 초월의 시간이다.

우리가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500겁의 인연이 있어야 옷깃을 스칠 수 있고, 2천 겁의 세월이 지나야 겨우 하루 동안 동행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5천 겁의 인연이 되어야 이웃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한다. 또 6천 겁이 넘는 인연이 되어야 하룻밤을 같이 잘 수 있게 되고, 억겁의 세월을 넘어야 평생을 함께 살 수 있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만약 당신 곁에 남편, 혹은 부인이 있다면 억겁의 인연으로 맺어진 인연임을 새삼 명심해야 한다. 어떤 경로를 통해 두 사람이 만났건간에 억겁의 인연을 딛고 만났으니 하늘이 맺어준 운명임은 확실한 듯하다.

겁이라는 무한한 시간에 대해 놀라면서 내 주변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을 되새겨보면 내 옆에 있는 사람들 역시 정말 놀라운 인연으로 나와 맺어졌다는 생각에 인연의 소중함을 확실히 각인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전세계 인구는 77억 명이 넘고 UN에 등록된 국가는 2020년을 기준으로 195개국이다. 그런데 그 많은 국가 중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내 주변에 이런저런 인연으로 묶여 얼굴을 맞대는 지인들을 떠올려보면 위에 언급한 억겁의 인연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생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더 소중하고 사랑스럽게 다가오는 저녁이다.

모든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나는 정말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중 하나다. 나는 나와 한 번 맺은 인연을 끝까지 유지하기 위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 수많은 인연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그중에서도 한 번 해서 안 되면 두 번 하고, 두 번 해서 안 되면 세 번, 아니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면 반드시 성공한다고, 실망하지 말고 용기를 가지라고 나를 다독였던 지인의 얼굴이 오늘따라 더 살갑게 다가온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부족한 나를 어여삐 여기고 늘 버팀목처럼 든든하게 나를 응원해준 여러 인연으로 인해 나는 외롭지 않았다고 자부한다. 그분들에게 내가 보답할 수 있는 것은 좋은 글, 희망을 전하는 글을 많이 써서 가슴에 훈훈함을 안겨주는 것이리라. 내가 곁길로 갈 때 질책해 주고 힘들 때 따뜻한 손 내밀어 주었던 소중한 인연들, 내밀어 준 그 손을 꼬옥 붙잡고, 오늘도 ‘인연’이라는 묵직한 단어를 다시 한 번 마음속에 새겨본다.

 

소설가 전정희 / 장편소설 '하얀민들레', 중편소설 '묵호댁', 장편소설'
소설가 전정희 / 저서 '묵호댁' '하얀민들레' '두메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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