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영 기자]좌파 성향이라 판단된 예술인들 리스트를 만들어 연극과 영화, 전시, 도서 지원금 선정 등 정부 지원에서 배제한 이른바 '문화계 블랙리스트' 사건과 관련해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재판을 다시 받게 됐다.
이들이 직권을 남용한 것은 맞지만, 지시를 받은 공무원들이 과연 '의무 없는 일'을 한 결과가 발생했는지는 불투명해 직권남용 범죄가 성립했다고 단정할 수 없단 것.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30일 '문체부 블랙리스트' 사건에 대한 상고심을 열고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재판을 다시 하라며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파기 환송했다.
앞서 김 전 실장 등은 문화예술계가 좌편향돼 시정이 필요하다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뜻에 따라 한국문화예술위원회ㆍ영화진흥위원회ㆍ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수행하는 각종 사업에서 이른바 좌파 등에 대한 지원배제, 예술위 책임심의위원 선정과정에 개입할 것을 지시한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겨졌다.
핵심은 직권남용죄 성립 여부였는데 형법 제123조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고 ▶사람이 의무 없는 일을 할 경우를 모두 만족해야 성립하는 범죄이다.
2심에서는 이들의 행위 대부분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하고, 김 전 실장과 조 전장관에게 실형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그러나 이들의 지시를 받은 공무원들이 과연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다.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했더라도 곧바로 사람이 의무 없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인지 따져봐야 한다는 것이다.
대법원은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 등이 문체부 공무원을 통하여 예술위ㆍ영진위ㆍ출판진흥원 소속 직원들에게 지원배제를 지시한 행위는 박근혜 전 대통령과 공모하여 대통령, 비서실장, 정무수석, 교문수석, 문체부 장관 등의 직권을 남용한 게 맞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직권남용의 상대방인 직원들이 그 지시에 따라 한 행위 가운데 각종 명단을 송부하는 행위, 공모사업 진행 중 수시로 심의 진행 상황을 보고한 행위 등은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행정기관의 의사결정과 집행은 다양한 준비과정과 검토 및 다른 공무원, 부서 또는 유관기관 등과의 협조를 거쳐 이루어지는 것이 통상적"이라며 "이러한 관계에서 일방이 상대방의 요청을 청취하고 자신의 의견을 밝히거나 협조하는 등 요청에 응하는 행위를 하는 것은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법령상 의무 없는 일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고 봤다.
대법원은 특히 "직권남용 행위의 상대방이 공무원이거나 법령에 따라 일정한 공적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공공기관 등의 임직원인 경우 법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하는 지위에 있으므로 그가 직권에 대응하여 어떠한 일을 한 것이 의무 없는 일인지 여부는 관계 법령 등의 내용에 따라 개별적으로 판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원심이 이같은 행위가 어떤 배경에서 이뤄졌는지 등을 따로 판단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대법원은 김 전 실장과 조 전 장관이 퇴임 후에도 이러한 직권남용죄를 저질렀다고 본 원심 판단에 문제가 있다고도 판단했다.
대법원은 "퇴임 후에도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등으로 퇴임 전 공모한 범행에 관한 기능적 행위지배가 계속되었다고 인정할 만한 특별한 사정이 없다면, 퇴임 후의 범행에 관하여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의 공범으로서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그 동안 판례는 직권남용 여부에 대해서만 주로 따져 왔고, 직권남용의 상대방은 자연스럽게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으로 봐 왔습니다. 이번에 대법원이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이 맞는지 여부에 대한 자세한 법리를 설시하면서 앞으로는 상대방이 의무 없는 일을 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추가적인 입증이 필요하게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에서 직권남용죄에 대한 법리가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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