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정희 칼럼] 명절 증후군
[전정희 칼럼] 명절 증후군
  • 전정희 소설가
    전정희 소설가
  • 승인 2019.09.1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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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증후군

바야흐로 나흘간에 이어진 추석 연휴가 끝이 났다. 월요일 아침, 텅 빈 집안에 앉아 커피를 한잔 마시며 창밖을 바라본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을 증명하듯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하고 열어둔 창문으로는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불어온다. 가족들은 직장으로 학교로 모두 복귀하고 모처럼 꿀처럼 달콤한 휴식을 취한다. 오늘따라 코끝을 자극하는 은은한 커피향이 연휴 동안의 피로를 모두 몰아내 주는 것 같다.

추석이든 설이든 명절이 다가오면 그 얼마 전부터 마음이 분주하다. 인사치레를 해야 할 곳에 선물도 골라서 보내야 하고 꼭 찾아 뵈어야할 어른들은 시간을 쪼개 일일이 인사를 드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추석은 많이 장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명절이라고 그냥 보내기 아쉬워서 송편이며 각종 과일과 나물 등을 준비해 두었다.

명절이면 돌아갈 곳, 가야할 곳이 없어서 더욱 더 쓸쓸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많다. 특히 나처럼 친정 부모님이 돌아가신 경우는 명절이 더욱 애잔하다. 여자들에게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친정은 아무리 형제자매가 있어도 그 빈자리를 대신할 수 없다. 세월이 흘러 효도라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았는데 정작 효도를 받을 어버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다. 송강 정철의 시가 입가에 맴돈다.

 

어버이 살아실제 섬기기란 다하여라

돌아가신 후면 애닯다 어이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은 이 뿐인가 하노라.

 

명절이면 부모님 생각이 더욱 간절하게 나는 것은 평소 만나지 않던 일가친척들의 얼굴들을 마주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귀찮고 반갑지 않았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1년 혹은 2~3년에 한 번씩 친척들의 얼굴을 보는 것도 이제는 기다려진다. 아마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그들의 생사여부와 안부가 더욱 반갑게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일가친척이 반갑다는 필자의 말에 반기를 들지도 모른다. 결혼한 우리나라 여성 중 대다수는 행복은커녕 불쾌한 명절을 보냈을 것이 명약관화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다큐멘터리 영화 <B급 며느리>를 본 적이 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은 다음과 같은 대사로 시작된다.

“명절에 시댁에 안 갔어요. 그래서 완벽한 명절을 보냈죠.”

해맑은 웃음을 짓는 며느리의 대사에 시어머니의 침울한 표정이 오버랩된다. 이 영화는 작년 설 연휴를 앞두고 명절증후군을 앓는 며느리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흥행에 성공했다. 아마도 고부갈등이 심한 우리의 현실을 반영한 탓일 것이다. 며느리와 시어머니는 사사건건 부딪치지만 두 사람 모두 한국 사회 가부장제 시스템의 피해자임은 분명하다.

“시댁에서 남편은 빼고 저만 설 전날 아침에 와서 음식을 준비하라고 하세요. 남편에게 너무 스트레스 받는다고 얘기했더니 명절이 1년에 몇 번이나 된다고, 시어머니 잠깐 도와주고 설거지 조금 하는 게 뭐가 힘드냐고 화를 내더라고요. 이런 거 하기 싫으면서 뭐 하러 결혼했느냐는 얘기까지 들었답니다. 남편 말대로 제가 무책임한 건가요?”

“설 전날 밤에 시댁에 가서 음식 만드는 일을 돕고, 당일에 제사를 지내고 친정에 내려갈 예정이에요. 그런데 명절마다 시어머니가 시누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을 보고 가라고 하세요. 시누이네가 오면 시누이 남편은 처가라고 편하게 쉬다가 밥까지 먹고 갈 텐데, 그 밥은 누가 차리고, 누가 치우나요? 명절마다 답답합니다.”

“저희는 맞벌이 부부예요. 설에 시댁에 가면 남편은 도와줄 생각은 않고 매번 늘어져라 낮잠을 자요. 저는 오가는 손님들 시중 드느라 정신이 없죠. 그런데도 시어머니는 매번 남편에게만 피곤하지 않느냐며 들어가 자라고 하시죠. 이럴 때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마치 드라마 <사랑과 전쟁>에 나올법한 며느리들의 하소연이다. 하긴 요즈음은 과거와 달리 오히려 며느리의 눈치를 살피는 시어머니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유독 며느리의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네 ‘시월드’는 분명 개선되어야 할 여지가 있다고 생각된다.

명절증후군을 앓는 사람은 비단 며느리들뿐만이 아니다. 가장은 가장대로 친가에서는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받고, 처가에서는 또 잘 나가는 동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취업 못한 취준생은 취업을 못한 죄로 스트레스를 받고, 결혼을 하지 못한 젊은이들은 또 그들대로 온갖 염려와 걱정을 폭탄처럼 맞고 머리를 쥐어 뜯는다. 그리고 명절이 끝나면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집을 떠나 각자의 보금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민족의 대이동 반열에 스스로 나서는 이유는 그래도 오랜만에 보는 부모님과 가족들의 정다운 얼굴 때문일 것이다.

지금 이 시간 혹자는 명절 때 받은 온갖 스트레스를 동네 지인들과 만나서 풀고 있을 것이고 혹자는 그럴 시간도 없이 직장으로 복귀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문화가 바뀌어도 요지부동한 명절증후군, 이제는 명절이 스트레스를 받는 시간이 아니라 손꼽아 기다려지는, 진정한 휴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

 

전정희 소설가 저서 '하얀 민들레' '묵호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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