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처럼 읽고 작가처럼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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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9.17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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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도서> 유도라 웰티의 소설작법

유도라 웰티(Eudora Welty)는 1909년 4월 13일 미국 미시시피 주 잭슨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평온했던 유년시절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철저하게 보호된 삶을 살았다. 이런 보호된 삶도 위험한 삶이 될 수 있다. 모든 대담한 도전은 내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웰티는 미시시피 주립대학교, 위스콘신 대학교,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수학하며 처음에는 광고홍보 커리어를 꿈꿨으나, 1930년대 중반부터 정기적으로 소설을 발표하며 소설가의 길을 택했다.

이 책을 읽으며 글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나에게 답을 알려준 문장이 있다. 다음과 같다.

나의 요지는 글쓰기가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방어나 증오심에서 나온 글, 남에게 명령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글, 남을 공격하거나 남에게 사과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글을 써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 내기 위한 글 역시 곤란하다. 독자가 그 부정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내 말은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자는 말이 아니다. 솔직한 분노가 담긴 글도 얼마든지 사랑에서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감정을 원천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다. 소설의 본질과 파급력을 결정하는 것은 그 소설의 원천적인 감정이다. (p. 156-157)

이 책을 읽고 나면 소설을 읽는 눈이 달라질 것이다. 작가를 꿈꾸는 사람, 이미 작가인 사람 그리고 소설을 읽는 사람 누구에게나 분명 많은 도움이 될 책이다.

☞ 책 속으로

<단편소설의 이해>

이야기는 행동이고, 움직이며 나아간다. 어떤 이야기들은 별똥별처럼 긴 꼬리를 남겨서 이야기가 다 끝나고 한참 뒤에 독자들이 그 흔적을 발견하고 이야기의 진짜 의미를 파악한다. 반면 포크너의 이야기는 별똥별이라기보다 일정한 주기에 따라 나타나고 사라지는 혜성에 가깝다. 이런 이야기들은 혜성처럼 때맞춰 등장하면서 그 의미를 반복하고 이야기 전체를 통해 한 번의 등장이 의미하는 중요성 이상의 것을 보여준다. (p. 27)

우리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요소(등장인물, 플롯, 이야기의 물리적 세계나 도덕적 세계, 감각적 형태나 상징적 형태 등)라면 무엇이든 그 이야기를 강조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처럼 작가가 이야기를 조직하는 방식을 보면 그 이야기를 쓴 작가의 성향을 가장 근접하게 알 수 있으며, 독자 입장에서는 그 작가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작가를 통해 얻는 심오한 즐거움의 근원이 바로 작가의 훼방과 종종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우리의 즐거움의 근원이 훼방을 받을 때 우리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야기하는 아름다움은 노골적이고, 명백하고, 잡다한 속성을 지닌 대상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다양한 종류의 과묵함, 완고함과 연관된 속성이다. 아름다움의 원천은 예상에 순응하는 대신 인간의 진실이 존재하는 한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필연적으로 행동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나온다. 아름다움은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한 수단이나 방법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결과이며, 질서, 형태, 자취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아름다움과 감수성은 현실의 삶에서 모방될 수 없지만, 소설에서는 함께할 수 있는 속성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을 때와 쓸 때는 아름다움과 감수성 중 한가지만 추구할 수 있다. 감수성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다. 아름다움은 우리 눈앞에 나타났을 때 이해할 수 있다.

앞으로 글쓰기는 규칙, 미학, 문제와 해결로 설명되지 않을 것이다. 상상력이 존재하는 한 글쓰기는 규칙이 아니다. 열정이 존재하는 한 미학도 아니다. 솔직한 작가들이 언제나 이야기하게 마련인 문제와 문제 해결도 아니다. 글쓰기가 앞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은 작가의 반대편에 있는 독자의 존재다. (p. 58-60)

<글쓰기와 분석하기>

작가들은 자신이 발표한 글에 대해 작가의 시각에서 분석해달라는 요청을 종종 받는다. 하지만 독자나 작가의 입장에서 생각했을 때, 나는 이미 완성된 글은 작가를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본다. 좋든 싫든 그 글은 이미 작가의 손을 떠났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작가가 과연 사람들이 원하는 분석을 해줄 수 있는가이다. 글쓰기와 비평적 분석은 마치 받아쓰기와 플루트 연주처럼 완전히 다른 영역의 재능이라 글쓰기를 잘한다고 해서 비평적 분석까지 잘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두 분야에 모두 능통한 사람이 있긴 하지만, 그마저도 글쓰기와 분석을 동시에 할 수는 없다. (p. 61-62)

어떤 이야기의 원천을 찾고 싶으면 작가의 내적 세계보다 그를 둘러싼 세계를 탐구하는 게 좋다. 이러이러한 감정을 직접적으로 촉발시킨 것은 무엇이며, 무엇이 이 감정과 연관되어 있는가? 무엇이 감정의 도화선을 당겼는가? 현실 세계의 무언가가 글을 쓰고자 하는 작가의 마음을 동요시켰을 것이다. 그 무언가란 거부할 수 없을 만큼 강력하고, 놀랍고(그것이 즐거운 놀라움이든 불쾌한 놀라움이든), 매력적인 사람, 장소, 사물이다. 이야기에 표현되는 현실 세계와 작가의 반응은 매번 다르고, 둘의 합도 매번 다르다. 현실 세계와 작가의 반응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p. 64)

어떤 이야기의 시작점은 비평에 있는 게 아니라 작가의 외부 세계에 있다. 작가는 자신이 직접 두 눈으로 본 살아 있는 대상을 원천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나간다(그것이 비록 작가 혼자만의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작가가 본 외부 세계는 작가의 머릿속, 마음속을 거쳐 무언가로―작가의 이야기를 구체화할 수 있는 윤리적인 생각, 정열적인 생각, 낭만적인 생각―만들어지는데, 이런 작가의 머릿속과 마음속은 지도처럼 그림으로 그리거나 도표화할 수 없는 영역이다. 어떤 이야기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 그 이야기에 생명력을 부여하는 것은 작가의 머리와 마음에서 나온 결과물이다. 종이 위에 인쇄된 한 편의 이야기는 작가가 그 이야기의 문제와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습득한 결과물로, 이는 마치 아무도 가 보지 않은 미지의 영역처럼 작가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과정이다. (p. 65-66)

<소설의 장소>

소설에서 '장소'는 큰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고 한쪽 구석에서 소설의 진행을 조용히 지켜보는 요소 중에 하나다. 반면 등장 인물, 플롯, 상징 등은 소설 안에서 자기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열심히 고군분투한다. 특히, 개인적으로 봤을 때 소설의 느낌은 다른 어떤 것들보다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요소로, 장소는 이 느낌에 밀려 뒷전을 차지하게 되기 일쑤다.

소설에서 장소는 어떤 입지를 갖고 있는가? 소설의 배경, 또는 소설을 '지역적'이게 만드는 요소쯤으로 간주하고 소설에 당연하게 있어야 할 존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소설을 정의하는 대부분의 용어들이 그러하듯 이 '지역적'이라는 용어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헨리 제임스가 세상에는 딱 두 가지 종류의 소설, 즉 좋은 소설과 나쁜 소설이 있을 뿐 '영국 소설'과 '미국 소설' 같은 용어 구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장소가 좋은 소설과 직결되는 건 아니더라도 좋은 소설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어째서 그럴까?

첫째, 장소는 글쓰기의 좋은 원재료로 글에 타당성을 부여한다. 둘째, 장소는 좋은 글쓰기, 즉 작가가 온전한 결정권을 가지고 그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허구의 세계를 만든다. 셋째, 장소에는 작가의 가치가 드러난다. 장소는 작가가 뿌리를 내리고 서 있는 배경이자, 작가가 이야기하는 경험의 판단 기준이며, 이와 동시에 작품에 드러나는 작가의 관점이다. (p. 77-79)

모든 예술 장르가 장소와 연관되어 있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바로 모든 예술은 장소의 신비함을 찬미한다는 사실이다. 장소의 신비함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장소의 본질이 우리 인간의 본질보다 훨씬 영속적이기 때문에 신비한 것일까? 또는 어떤 장소가 가진 이름 때문일까? 그 이름을 붙여 준 것이 우리라서 그런 것일까? 우리는 어떤 장소에 이름을 붙이고 그 장소에 일종의 낭만적인 환상을 입히는 경향이 있다. 더 이상 우리 눈앞에 보이지 않거나, 심지어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소라 해도 낭만적인 환상은 그대로 유지된다. 우리는 지금도 세계 7대 불가사의에 대해 이런 낭만적인 환상을 품고 있다.

“글의 원천인 장소를 생각하자.” 지난 독서 경험을 돌이켜 보면, 어떤 이야기의 원천이 그 이야기의 타당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사실이든 허구이든, 작가는 이야기의 장소를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도록 그냥 방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이끈다. 바로 이것이 소설 속 장소의 역할이다. 소설은 허구다. 내면의 생각은 진실이지만, 외형은 언제나 허구이다. (p. 83-85)

현실을 현실처럼 만드는 것은 예술의 임무다. 따라서 작가는 삶을 관찰하는 데 필요한 세련된 감수성을 키우고, 고독하고, 끈기 있고, 타인에 기대지 않고 오로지 자신만이 얻을 수 있는 삶의 비전을 받아들이고 그 비전을 아무 왜곡 없이 지면에 옮길 수 있는 능력을 길러 독자가 자신의 비전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을 스스로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 우리 독자와 작가들은 작가의 비전이 독자의 비전이 되는 이 연금술 같은 과정을 기꺼이 경험할 수 있는 이 특별한 즐거움에 얼마나 열중하곤 하는가!

그렇다면 장소의 어떤 속성이 소설에서 이야기되는 것일까? 장소의 가장 훌륭하고 명백한 속성, 바로 장소가 주는 물리적인 질감이다. 장소는 작가에게 글의 소재가 될 뿐만 아니라, 작가와 독자를 연결하는 기능도 한다. 장소는 어떤 이야기의 진행 과정에서 이야기의 모든 감정, 믿음, 윤리적 신념의 전류가 흘러나오는 접지선과도 같다. 이런 전류가 흐르려면 발 디딜 수 있는 따뜻하고 단단한 땅, 가볍게 이는 공기, 술렁이는 감정, 은은한 분위기를 매개로 현실을 최대한 현실처럼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야기가 글로 표현되는 과정에서 비현실적으로 보였던 소재는 어느새 익숙한 감정을 전달한다. 삶은 원래 생소한 것이다. 소설은 삶을 더 생소하게 만들지는 않는다. 다만 이야기를 통해 삶을 더 믿음직하게, 더 필연적이게 만들 뿐이다.

단, 장소가 소설의 주제는 될 수 없다. 장소를 통해 주제를 제시할 수 있고, 주제를 마지막 디테일까지 보여 줄 수는 있지만, 장소는 인간이 무엇을 했고, 무엇을 상상했으며, 그의 과거가 어떠했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 시각적으로 보여 줄 수 있을 뿐이다. 오로지 인간의 삶만이 소설의 주제가 될 수 있다. (p. 101-104)

소설 작가든 아니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을 관찰하는 것은 삶에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소설 작가의 경우 익숙함을 벗어나 새로운 세상을 관찰할 의지가 없다는 것은 (그 의지가 정신적인 것이든, 영적인 것이든, 물리적인 것이든) 그가 정신적으로 소심해지고, 빈곤해지고, 퇴보했다는 신호로, 그에게 익숙함은 머지않아 숨 막히는 억눌림이 되고 말 것이다. (p. 105)

살다 보면 우리가 태어난 고향보다 왠지 모르게 더 친숙하게 느껴지는 제2의 고향을 발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와 우리가 태어난 고향의 관계는 혈연관계다. 만약 그건 고향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면 우리는 다른 어느 곳을 가도 그보다 나은 의미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안에 내재된 나침반이 없으므로, 우리는 어디에 가도 고향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놓쳤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을 것이다. (p. 107-108)

어떤 작품의 원천이 되는 장소를 분명하고, 명시적이고, 직접적이고, 열정적인 태도로 이야기하는 예술일수록 사람들에게 오래 공감을 준다. 우리가 태어난 곳이든, 우연히 또는 운명적으로 가게 된 곳이든, 여행을 다녀온 것이든 우리는 장소를 통해 뿌리를 내린다. 그 장소가 미국이든, 영국이든, 서아프리카 팀북투이든 그 뿌리가 향하는 곳에는 인간 지성에 양분을 공급하고 인간 지성으로부터 양분을 공급받는 맥, 끝없고 끊임없고 그 무엇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맥이 깊이 흐른다. 오늘날 작가들에게 주어진 도전 과제는 우리가 물려받은 유산을 어떤 부분도 외면하지 않고 지켜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에 대해 글을 쓰든, 그 주제는 다른 작가들이 과거에 이미 시도했던 주제다. 우리가 어느 장소에 대해 글을 쓰든, 그곳은 이미 누군가 다녀갔던 곳,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곳이다. 오로지 새로울 수 있는 것은 관점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p. 111-112)

<소설의 언어>

우리는 무(無)에서 글을 시작하지만, 언어는 무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이는 우리에게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언어 안에서 성장하지만, 똑같은 단어라도 그것을 일상적인 대화에서 구사하는 것과 소설 쓰기에서 구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소설을 쓰기 위해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작가에게 거의 무모에 가까운 어둠 속의 도약이다.

사실 글쓰기 학습은 독서 학습의 일부분이다. 내가 알기로 글쓰기는 독서에 대한 강렬한 열정에서 나온다. 깊이 있는 글쓰기는 소설에 대한 열정, 소설을 예술로 대하는 열정에 나온다(사실 이런 열정에서 나와야 마땅하다). 독서와 글쓰기는 특정 방식으로 사용되는 언어를 통해 우리가 상상이 지배하는 공간에서 상상을 통해 생각과 감정을 경험하는 (평생에 걸쳐 진행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고 현실을 보여 주는 힘을 발견한다.

물론 소설 쓰기는 삶에서 출발해 그 삶을 보여 주는 것이 목적이므로 다른 소설을 복제함으로써 학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p. 113-114)

소설의 목적은 작가가 선택한 인간의 삶 중 일부분을 일부 관점에 따라 보여 주는 것이다. 작가는 소설 한 편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일 년 또는 그 이상의 시간을 집필에 투자하며, 완성된 소설은 그 소설을 읽는 독자의 삶에 찾아가 무언가의 존재가 된다. 이는 작가와 독자 사이에 주고받음이 이루어지는 실로 엄청난 기회다. (p. 119-120)

우리는 소설이 무엇인지 기억해야 한다. 소설은 상상을 위해, 상상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환상으로 시작해 환상으로 끝나는―세상만사 많은 이야기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배타적인―이야기다. 소설가는 전적으로 환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어둠 속의 도약을 시도하며, 예술의 목적은 이러한 환상으로 하여금 인간의 진실을 보여 주고 인간의 진실이 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새로운 도약의 출발점에 선다. 그리고 기적과도 같은 소설의 첫 문장을 종이 위에 써 내려간다. (p. 135)

<소설가와 비평의 의무>

소설가와 비평가의 활동 영역은 각각 소설과 신문 사설이다. 그들의 의견이 서로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소설가와 비평가의 의견은 모두 타당하다. 나는 소설가와 비평가는 서로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편이 옳고, 다른 한편이 틀리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직함이 아니다. 사람들은 정직함에 의문을 제기하지도 않는다. 문제는 적절한 목적을 위해 적절한 언어로 이야기를 하느냐이다.

소설은 인쇄된 활자를 통해 독자의 눈에 보이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소설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은 소설을 신문 기사나 연설과 흔히 혼동하곤 한다. 이들은 소설을 오해해서가 아니라, 소설가가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이야기한다는 자체에서 소설가의 목적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

소설가는 실재하는 현실을 그대로 보도하는 대신, 그 현실을 자신이 쓸 소설의 원재료로 삼는다. 소설가의 목표는 소설의 이야기 속에 현실을 담아 독자에게 제시하는 것이다. 당연히 소설의 본질은 원재료와 다르다. 아니, 소설은 원재료와 완전히 별개의 영역이다. 소설이란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하나의 고유한 존재로, 소설에는 그 글을 쓴 소설가 단 한 사람의 생각만 담겨 있다. 무엇보다 소설과 소설의 원재료가 차별화될 수 있는 까닭은 소설은 내재적인 특성상 작가와 독자가 상상력을 공유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인데, 이는 소설과 저널리즘이 차별화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p. 138-139)

나의 요지는 글쓰기가 사랑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방어나 증오심에서 나온 글, 남에게 명령하거나 반박하기 위한 글, 남을 공격하거나 남에게 사과하기 위한 글이 아니라 사랑에서 나온 글을 써야 한다.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 내기 위한 글 역시 곤란하다. 독자가 그 부정적인 감정을 고스란히 떠안게 되기 때문이다.

내 말은 세상을 너그럽게 바라보자는 말이 아니다. 솔직한 분노가 담긴 글도 얼마든지 사랑에서 나올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감정을 원천으로 세상을 바라보느냐다. 소설의 본질과 파급력을 결정하는 것은 그 소설의 원천적인 감정이다. (p. 156-157)

<피닉스 잭슨의 손자는 정말 죽었을까?>

사실 내가 사람들의 질문을 인상 깊게 생각했던 이유는 그 질문 자체보다 질문에 깔려 있는 발상 때문이었다(모든 질문에는 어떤 발상이 내포되어 있게 마련이다).

나는 질문을 한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어떤 대상이 눈에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고, 어떤 이야기에 보이는 그대로의 의미만 있어도 괜찮다고 말이다. 동시에, 어떤 대상이나 이야기에 하나 이상의 다양한 의미가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의 삶이란 원래 모호한 것이다. 작가는 이야기에서 제시하는 사실관계뿐만 아니라 그 사실관계가 불러일으키는 암시적인 내용까지 모두 아울러야 할 책임이 있다. 왜냐하면 그 암시적인 내용이 소설의 전체적인 의미에서 보면 결국 사실관계가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떤 대상에 그런 의미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마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괜찮지 않으며, 독자의 선의를 저버리는 행위다. (p. 163-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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