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전후 제주도에 관한 이런저런 '사람사는' 이야기들입니다
해방 전후 제주도에 관한 이런저런 '사람사는' 이야기들입니다
  • 등산박물관
    등산박물관
  • 승인 2019.05.1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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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전후 제주도에 관한 이런저런, 술자리에서 할 이야기 없으면 꺼낼 호사가적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1) 제주도의 섬모양은 무엇을 닮았다고 해야 할까?

2) 일제하 서민들의 집에는 화장실은 제대로 있었을까?

3) 일제하 제주도를 찾은 육지인들은 도민(島民)들과 조선어로 소통했을까? 

4) 4.3 사건때 한라산에 고립되어 있던 무장대는 무엇을 먹고 버티었을까? 

5) 과연 무엇을 먹었을까? 쌀밥은 못먹어도 생선이나 해삼, 전복은 양껏 자셨을까 등등 입니다.

이즈미 세이치는 해방전 경성제대 산악부원으로 활동하고, 전후에는 도쿄대 인류학자로서 유명하다.

제주도와 기이한 인연을 갖고 있어, 경성제대 산악부원으로서 그는 1935-1936년 동계 한라산 초등 기록을 갖고 있다. 인류학자로서 "제주도"라는 책을 남긴다.

책에는 재미있는 내용들이 많은데 오늘은 위에서처럼 술자리에서 그냥 꺼내기 좋은 이야기꺼리 몇몇을 언급해 볼까 한다.

1) 제주도는 무엇을 닮았을까?

이즈미는 '감자 모양의 본도(本島)와 34개의 부속도서 및 암초로...'라 하여 감자모양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그렇네.

그 다음 페이지에서는 '제주도의 모양은 '해중에 내던져진 감자 모양' 또는 '방패 모양'이고...라고 다시한번 적고 있다. 감자모양도 그럴 듯하고 방패 모양도 그럴 듯 하다. 제주도민들은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하다.

한번도 이 모양새에 대해 따로 생각해본적 없는데, 제주도 기념품으로 이렇게 섬의 모양을 본따서 만든게 많다. 

2) 해방 전 제주도민들은 화장실이라는 게 있었을까?

제주도에서는 거의 모든 농가가 돼지를 기르고 있어 퇴비 생산과 더불어 식료원 역할을 했음은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거의 변함없다. 다만 30년 전에는 뒷간이 노천이었으나 지금(1963년)은 지붕있는 변소가 그 위에 만들어져 있다.

라고 이즈미 세이이치는 적고 있다.

그러니까 해방 전 제주도 농가의 변소는 하늘도 사방도 뚫려서 시원했다는 것을 알 수있다. 이게 가능할까 싶은 이 있겠다만, 그때의 신체노출에 대한 민감도는 지금과는 확 달랐을 거라 본다. 해방후에도 여성들이 가슴을 내놓고 다니던 시절인데 엉덩이 쯤이야.

일제하 서울의 빈민가는 이렇게 움막보다 못한 토막살이를 했다. 화장실은 엄두도 못내었을 터. 그리고 곰곰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다닐때, 여학생들은 함께 우루루 몰려가서 학교에서 키우던 염소 축사에서 엉덩이를 까고 함께 소변을 보곤 했더랬다. 

3) 일제하 제주도를 찾은 육지인들은 도민(島民)들과 조선어로 소통했을까? 

                     

대학때 195,60년대에 제주도 산간 지방에 현지조사를 간 교수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하숙집 딸이 뭐라뭐라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라. 바디랭귀지로 겨우 이해했는데 신문을 볼거나랴는 거였더라 라고 말씀한게 항상 잔상이 남아 있어 궁금한 주제였다.

4.3사건의 토벌대가 제주에서 맞닥뜨린 문제는 바로 ‘의사소통’이었다. 이들은 제주도 방언을 이해하지 못했고, 생활습관 또한 이해하지 못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고 생활수준이 낮은 제주사람들을 이민족 또는 열등민족으로 인식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허 기자는 “사람을 보면 전부 공비 같아 보였고 누가 공비가 아닌지 몰랐다. 제주도 사투리로 말하니 알아들을 수가 없어 일본말로 소통했다. 심지어 다른 병사는 제주도 사투리를 통역해주는 통역관도 있었다고 할 정도다. 이들이 일본어로 소통한 것은 제주사람을 대한민국 국민이 아닌 이민족이라는 인식을 갖게 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출처 : 제주의소리(http://www.jejusori.net)

나는 그동안 일제 때 육지인들은 제주도민과 일본어로 소통했을거라 짐작해 왔다. 육지인들은 정규과정에 일본어가 있었고, 무학의 제주도민들이라도 직업을 찾아 일본과 왕래가 잦은 터라 일본어에 능숙했을 테니 말이다. 

지금 이렇게 4.3사건 언어소통의 문제를 보니, 내 짐작이 맞았음이 알게 된다. 

4) 4.3 사건때 한라산에 고립되어 있던 무장대는 무엇을 먹었을까? 

4.3 사건의 토벌과정에 중산간지방의 촌락은 완전히 소개되었다. 육지와 달리 제주도 무장대원들은 독안에 든 쥐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런데도 54년까지 버티어 냈다. 그들은 무엇을 먹었을까?

책에는 아사히 신문의 기사를 인용하고 있는데, 그 중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제주도의 게릴라 활동이 외딴섬이면서도 8년간이나 계속된 것은, 첫째로 일본군 무기 탄약을 쓸 수 있었기 때문이며, 둘쨰로는 방목 우마라는 식량자원이 있었기 때문'임과 동시에..... 산의 원시림은 깊다.

44년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이 오키나와에서처럼 제주도에서 결사항전을 외치고 몰려 들었다. 당시 제주도민은 25만, 일본군은 13만 정도였다고 한다. 그들은 곳곳에 땅굴을 파고 무기를 은닉해놓았다.

해방될 무렵 일본군이 13만정도나 되어 항상 반란의 소지가 있었다. 따라서 항복조인식에서 미군측은 하지 장군만 서명한 데 반해서 일본측 서명 당사자는 3명으로 조선 총독, 조선군 주차 사령관, 그리고 제주도 사령관 3명이다.

             *사진 설명: 1920년-1930년대 사진으로 추정되는 마소를 돌보는 제주 소녀

현재 발견된 동굴 등은 1,200여개에 달한다. 무장대는 일본군이 여기저기 은닉한 무기들을 찾아 무장했다. 그리고 평소에 소와 말을 방목해서 키우던 제주 목축문화 덕에 소와 말을 잡아 먹어며 단백질을 보충할 수 있었다. 참고로 제주도에는 조선 때에도 맹수는 없었다.

실제로 1934년에 비해 1957년 말이 엄청난 숫자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6) 그들은 바다 생선이나 해녀가 잡은 해삼 전복은 양껏 먹었을까?

                           *1964년 해녀의 모습

아니다. 놀랍게도 아니다.

일본 해녀들은 해삼, 전복 등 패류와 해조류 등 먹거리를 중심으로 잡았는데, 제주 해녀들은 밭 거름으로 쓸 둠북이라는 게 주이고, 식용 해조류와 패류가 그 다음이다. 사람입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1935,6년 표

보다시피, 겨울과 봄에 집중적으로 전복, 소라, 미역 등을 주로 채취함을 알 수 있다. 

참고로 1990년 한중 수교가 된 다음, 북경대 교수가 한중간 교류를 위해 한국을 찾아 부산으로 입국했다. 부산의 교수들은 그를 접대한다고 자갈치 시장에 가서 해삼, 멍게, 전복 등과 회를 샀는데,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한국인들은 이 좋은 재료를 갖고 요리를 할 줄 모른다. 내가 잘 아는 요리사를 데려오고 싶다." 그는 나중에 중국을 대표하는 지한파로 활동했고, 권위있는 훈장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이름을 잊어버렸다. 

1965년 다시 제주도를 찾은 이즈미 세이이치는 이렇게 적고 있다. "음식물은 특히 산 해촌에서는 30년 사이에 거의 변한게 없다... 이제 K리에서의 최근의 식사를 보자. 식사 회수도 하루 두 끼 이상 먹기는 어렵다. 여름으로 접어들면 보리가 걷히므로 보리. 팥밥에 날콩잎을 먹게 되는 것은 옛날과 거의 다름없다. 여름에는 국에도 신선한 채소가 쓰이고 자리돔도 회로 즐겨 먹는다. 가을 들어 조가 걷히면 보리. 조. 파탑에 갈치, 전갱이, 고등어 등의 반건어 그리고 콩가루로 만든 콩국도 즐겨 먹는다...

식사횟수도 종전과 거의 달라지지 않았다. 겨울에서 봄에 걸쳐 하루 세끼 식사를 취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보릿고개는 심각하다. 

표는 1965년 해촌 K리인데, 1930년대에도 별반 다르지 않다. 지금 보자면 참 신산스러운 삶이다. 

그렇다면 1930년대 제주도민들은 어떻게 식사를 했을까? 이즈미는 "육지와는 달라 일가족이 대형 밥상에 장유 구별없이 둘러앉는다. 밥. 국. 김치 등을 각각 하나의 그릇에 담아 가족 전부가 자기 숟가락으로 떠먹고 가끔 손가락을 쓸 때도 있다"라고 적고 있다. 

이상 해방 전후, 아마도 몰랐을 제주도에서 사람사는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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