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
이야기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
  • 박다빈
    박다빈
  • 승인 2019.04.12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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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평상시에 말수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언제부턴가 그런 사람이었다. 말하는 것보다는 듣는 게 편하고 좋았다. 자꾸 말을 하는 것이 물감에 물을 붓는 일처럼 느껴져서, 말을 할수록 마음이 희석되는 것 같아서, 주요하다고 생각되는 말만 하고 침묵을 지키는 편이었다. 미소나 웃음으로 남은 말을 대신하거나, 상대는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넌지시 묻는 편이었다.

   나 자신은 필요한 말만 하고 마는 것이 좋은데, 누군가를 만날 때 나는 상대가 말을 많이 할수록 상대를 좋아했다. 내 이야기는 핵심만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반면, 상대의 이야기는 삼천포 저 끝에 있는 것까지 다 듣고 싶어 하는 내가 있었다. 상대가 자기 이야기에 각주를 달 때마다 마음이 들썩들썩했다. 내 이야기는 내가 이미 아는 이야기라 그걸 말로 바꾸는 일로부터 대단한 재미까지는 못 느끼는데, 상대의 이야기는 내가 아직 모르는 이야기라 그걸 처음 접하자니 엄청난 재미와 감동이 일어났다. 그런 걸 보면, 나는 천성적으로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그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 얼굴을 처음 본 것은 비 내리는 3월이었다. 그 사람을 직접 만나기 전에 우리는 핸드폰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알고 지내던 어른 한 분이 그 사람을 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당시 내가 준비해야 할 일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안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면서.

   비 내리는 3월의 그 날, 나는 윗사람으로 가득한 어려운 자리에 있었다. 그곳은 ‘친목을 도모하기 위한 회식 개념의 자리’였지만, 나에게 그 자리는 무지하게 어려운 자리였다. 개개인에 대한 암묵적인 평가와 편 가르기가 별로 암묵적이지 않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자리에 그 사람도 있었다.

   새파란 막내인 나는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들이 따라 주는 술을 마셔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이 거북하기 시작했다. 긴장을 많이 했을뿐더러, 저녁도 안 먹은 상태에서 술 먼저 마셨기 때문이다. 눈앞이 핑핑 돌기 시작했다. 술 취한 티를 안 내려고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있었다.

   꽤 많은 사람들이 취기를 느낄 무렵, 그 사람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술집 밖으로. 그 사람은 내가 앞서 언급한 ‘윗사람’ 중 한 사람이었고, 그 사람이 술자리에서 나를 따로 불러 가는 것에는 문제랄 것이 없었다.

   내가 술집 앞 골목으로 내려서자, 그 사람이 걷자고 했다. 나는 그 사람 뒤를 따라 걸었다. 술집에서 조금 멀어진 무렵, 그 사람이 겉옷 주머니에서 숙취 해소제를 꺼내 나에게 주었다. 지금 마시라고 하면서.

   문자 나눌 때와 달리 사람이 참 과묵하다고 생각하며, 나는 숙취 해소제를 단숨에 마셨다. 태어나서 숙취 해소제를 처음 마셔 보는 거였다. 그 전까지는 억지로 술을 마실 일도 없었고, 숙취 해소제 약효를 빌리면서까지 술을 많이 마시고 싶었던 적도 없었으니까. 그 사람은 나를 데리고 동네 한 바퀴를 끝까지 돌더니 나를 다시 술집으로 들여보냈다.

   이후로도 그 사람은 나를 여러 번 불러내, 이것저것 유용한 도움을 주었다. 늘 그렇듯 조용하게. 정말로, 정말로 필요한 말만 하면서. 그 사람 앞에 있으면 내가 수다쟁이 같을 정도였다. 같이 식사를 할 때도 주로 말하는 게 나였다. 누군가와 단둘이 있으면서 대화의 주도권을 계속 잡아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그 사람과 내 관계에서의 내 역할을 낯설게 느끼면서도, 그걸 싫어하지 않았다. 부담스럽지도 않았고. 그 사람으로 인한 어떤 결핍감을 느끼지도 않았다. 그 사람이 나에게 더 많은 이야기를 해 주길 바라지도 않았다.

   이상했다. 오가는 말이 없는데도 모든 게 충분한 것 같아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마음은 느낄 수도 없는 마음이라고 그때껏 생각했는데. 그 사람 마음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한 번씩 어안이 벙벙했다.

   밥 먹으러 걸어가는 길에 그 사람이 자기 손끝으로 내 손목을 건드리며 웃을 때. 나란히 걷다 좁은 골목을 만나 일렬로 걷는 중에 그 사람이 내 오른쪽 어깨 위로 손을 살짝 얹었다 떼었을 때. 아무런 약속도 인사도 없이 『내려올래? 밥 먹게.』라는 문자를 받았을 때. 계단 끝에 서서 핸드폰만 내려다보고 있는 그 사람의 옆모습을 보았을 때. 그 사람이 싫어하는 줄 모르고 건넨 내 선물을 굳이 쓰는 그 사람을 볼 때. 이야기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의 존재를 처음 만났다.

   그 사람 생각을 지금도 자주 한다. 말에 갇히지 않은 추억들이 많아, 그 사람을 떠올릴 수 있는 게 참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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