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덕의 등산재구성]도봉산 부봉재가 기억나시나요.
[김진덕의 등산재구성]도봉산 부봉재가 기억나시나요.
  • 등산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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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9.04.10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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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봉산 고향산천을 돌아나가면 녹야원 은석암쪽 첫 갈림길이 나타난다. 10여년전만 해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한옥 한채가 있었다.

오늘 새삼스럽게 그 건물의 당호가 부봉재(富峰齋)라는 걸 알게 된다. 구글에서 도봉산을 검색하면 100만개나 존재하지만, 부봉재는 열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지금은 철거되어 텅빈 공간으로 된 그 건물을 추억한다.

                                             *사진출처

우선 의문점부터 갖고 시작하자. 건축에 문외한인 나는 이 건물이 전형적인 일제 때 건물일거라고 다만 짐작한다. 좌측 측면에도 유리창이 있어서이다. 그런데 학계에서는 이 건물이 조선말기의 건물이라고 한다. 글쎄다.

2000년대 초 냉골릿지등반을 하기 위해 이곳을 부지기수로 찾았다. 지나칠때마다 유리창 안으로 눈을 두리번두리번 거렸지만, 별다른 관심꺼리는 없었다. 퇴락해가지만 단정하고 단단한 이 건물을 지나칠 때마다 소설가 이병주가 북한산과 도봉산에 푹 빠져 쓴 책 "산을 생각한다"를 떠올렸다. 그는 한 에세이에서 일제 때 도봉산에 별장을 갖고 있던 친구의 비극을 그리고 있는데, 그 시절 별장이 이런 식이었을거라는 상상 말이다.

                                                *사진출처

현판에는 부봉재(富峰齋)라고 적혀 있어 궁금증은 더했는데, 당시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지만 내막을 알기 어려웠던 걸로 기억한다. 2006년 7월 14일자에 찍은 이 사진은 부봉재의 거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다. 곧 철거되었다. 

도봉산에서 마지막까지 '신비'를 자아내는 건물인데 안타까워라. 도봉산을 찾은 이들은 그러나 여기에 주목하지 않았는지 구글, 네이버 할 것 없이 사진은 몇장 밖에 없다. 보고싶어도 더  볼 수 없다.

도봉문화원에서 2004년 "도봉산 서원마을 조사보고서"를 낸다. 도봉산 매니아이기에 이 책을 몇번 보았다가 책장에서 사라졌다.  오늘에사 발견되어 다시 꺼내 읽었는데 이번에 부봉재에 관한 짤막한 글이 눈에 띤다. 글은 이렇다

ㅁ 권돈인 사랑채 고가

도봉동 산29-10에 위치한 고가로 현종 때 영의정을 지낸 권돈인(1783-1859)의 사랑채 건물인데 서울 중구 삼각동에 있었으나 도시계획에 의해 1960년경 현 위치로 이전하였다. 부봉재라는 현판이 전면에 걸려 있다. 그러나 현재 관리가 되지 않아 폐가가 되어가고 있다.

 

검색해보니 권돈인은 조선이 몰락의 길을 차근차근 밟아가던 헌종 시절 자그마치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을 모두 섭렵했고 추사 김정희와의 교유로도 유명하다. 이 글에 의하면 조선조 말의 사랑채 건물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럴까.

대충 보니 권돈인은 처세도 반듯하게 한 인물인 것 같은데 이 건물이 각종 문화재에 지정되지 않은 걸 보면 일제 때 건물이라서일거라고 강한 심증이 간다. 이런 전제로 이 부분을 정확히 하자면 이래야겠다. '권돈인의 저택에 후손이 일제때 개축 또는 신축한 사랑채 건물인데'라고 말이다.

여기서 간송 전형필 고택을 떠올려 본다. 한눈에 보아도 건축양식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좌측측면에도 창을 낸 부봉재가 아무래도 조금 더 후대의 건물이기 쉽겠는데.

간송전형필 고택이 2012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받는 일화는 재미있다.(여기를) 여기서는 건축연대에 집중하자. 고건축학 박사가 얼마나 많을텐데, 전형필 고택의 건축연대를 두리뭉실 1890-1900으로 추정한다. 아직 을사조약이 맺기 전인데 이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아무래도 민족문화의 보루인 전형필 가옥이 '일본식, 근대가옥'이 아니라 '전통가옥'이었으면 하는 '조작'의 바램에서일거다.

재미있게도 구글에서 '일본전통가옥'으로 검색하면 이렇게 작은 유리로 전면을 장식한 집들이 대부분이다. 유리가 귀한 조선에서는 엄두도 못냈을 터, 하여 부봉재나 전형필 고택이나 모두 일본 스타일의 집이라고 추정된다. 

원래 종로에 있던 이 한옥을 지은 이는 친부인 대지주이자 미곡상인 전명기이다. 전명기는 1870년에 태어나 1919년에 몰하였다. 만약에 그들이 주장하듯 전명기가 을사조약 한참 이전인 1890년대에 이렇게 집을 지었다고 하자. 그럴 경우 오히려  전명기가 상당히 일찍부터 친일(=일본을 선망)했다는 황망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역사가 오래되었다고, 전통적이라고 해서, 위인의 것이라고 해서 더 아름다운 게 아니다. 아름다움을 자꾸 외부적 요인을 가미하지 말고 아름다움 자체로 보는 안목을 길러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어보자. 일본인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면 막사발은 그냥 개밥그릇일 뿐이다. 아까울 것도 없고 사라져도 아쉬울 것도 없는.

                                           *철거된 터의 모습

디지털 도봉문화대전에는 윗글과 같은 맥락에서 권돈인이 김정희 등 당대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고 하며 그래서 '아마도 존재하지 않았을' 디테일을 '덧칠'한다.

당초 서울특별시 중구 삼각동에 위치하였던 이 건물은, 주인인 권돈인이 김정희 등 당대의 유명 문인들과 교류하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1960년경 중구 지역 도시 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건물이 철거될 위기에 놓이자, 이 건물을 아끼는 후손들의 노력으로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29-10번지로 이전하였다. 시간이 흐르며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폐가로 바뀌었고 주민들의 민원이 제기되자 2004~2005년에 훼철되고 그 터만 남았다.

이조 다실(李朝茶室) 혹은 부봉재(富峰齋)라고도 불렸던 권돈인 사랑채 고가는 이건(移建) 당시에는 단층 목조의 상하 2채로 되어 있었다. 건물은 조선 후기 양반가 사랑채의 건축 양식과 가옥 구조의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고 평가된다.

 부봉재를 따로 이조다실이라고도 한다는데, 이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상상으로 붙인 것일까? 아니면 주인이 이곳을 공개해서 차마시는 공간으로 운영해서일까? 후자라면 더많은 에피소드가 남아 있을 것이다.

2004~2005년 훼철되었다는 건 오류이다. 위의 사진을 보듯이 2006년 7월까지는 근근히 버티어 냈기 때문이다. 지금같은 입장이라면 '훼철'되기 전 현판이라도 떼어올 걸 그랬다 싶다.

한쪽에 놓여져 있는 석재의 모습. 모르긴 몰라도 10년만 더 버티었더라면 살아남았을 것이다. 손혜원 의원의 목포 사태로 관심이 촉발된 '근대문화재' 이론에 의하면, 이 사랑채는 예산이 투입될 것이다. 6~70년대 도봉산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도봉산의 한 풍경으로 되살아 남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살아남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엄청난 '과잉'의 의미로 덧칠되어서 말이다.

이 책 "도봉산 서원마을 조사보고서"는 그런데 일제 이후 터잡고 산 사람들과 전쟁후 들어온 도봉산 등산문화 이야기도 적지않게 담겨 있다. 이런 이야기가 더 솔깃하지 않으려나. 앞으로도 이 책에 들어있는 '우리 시대'의 도봉산 이야기를 모셔올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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