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덕의 등산재구성] 전주 에델바이스 산악회가 보여주는 1960년대 등산 풍경
[김진덕의 등산재구성] 전주 에델바이스 산악회가 보여주는 1960년대 등산 풍경
  • 등산박물관
  • 승인 2019.03.27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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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전주를 이끌던 젊은 명망가들이 주도하여 에델바이스 클럽이 생겨난다. 그로부터 속절없이 30년이 흘렀고 그들은 "창립 30주년 기념지"를 발행한다. 특히 60년대 회상기를 보면 아마 전설같다고 느낄 부분이 적지 않을 것같다. 이를테면 이런 내용을 주목해 본다.

1) 1960년 전후에 산을 오른 사람들의 면면은 어떠했을까?

2) 여성들이 산악회에 동참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3) 동계 덕유산을 10박 9일로도 실패할 수 있는가.

표지는 1976년 3월의 산행인데, 이런 설명이 달려 있어 우리를 짠하게 한다. 

"한국에는 이런 산도 있었고 우리는 이런 산도 올랐고, 저 속엔 나도 있었더랬다."

글의 시작은 김남규 회원의  '되돌아 본 에델 발자취' 중 60년대 등산 풍경이다. 전주 에델바이스 산악회는 재미있게도 회원번호제를 운영하였고 김남규는 10번이었다. 창립배경과 60년대 전주의 산악계와 등산 풍경에 대한 재미있는 글이다.

1) 1960년 전후 전주의 산악계는

50년대 말 전라북도 지방에는 목가 시인 신석정씨가 친지들과 어울려 부안의 변산반도를 중심으로 산을 오르고 있었고, 성심여고 김규성(당시 교장)씨를 주축으로 한 일부 교사들과 유승국씨 등 몇몇 의료계 인사들이  명산을 찾아 다니다가 58년 전주 산악회(후에 전북산악회로 개칭)을 창설한 바 있다.  

이 외에도 전주 지역에서는 송현주(전북대 교수)와 소건호 교수(교대 교수) 소재현(간호학교장)등이 주변 친지들고 어울려 산을 오르는게 고작이었다.

60년대 전후 배고픈 시절에는 등산이라는 게 보다시피 사회 오피니언 리더들의 고급 문화였다.

2) 남녀 혼성 산악회

창립 총회에서는 또 그동안 남성들만의 전용이던 산악회에 여성회원을 포함시킴으로써 남녀 혼성 산악회의 효시를 이룬다.

전주산악회 등에서는 여성을 산악회에 입회시키는 것을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았다고 한다. 우리가 짐작할 그런저런 이유를 들어 초기 산악계는 금녀의 공간이었을 거라 본다. 

그러고보니 산악회에 언제부터 여성회원을 입회시켰을까라는 관점의 글은 아직까지 본 적이 없다. 언제 이 주제로 자료를 모아볼까 싶다.

3) 당시 배낭 무게는.

63년 8월 에델은 산악회 창립 이후 첫 장기 등산에 나선다. 5박 6일 일정으로 지리산 종주길에 오르게 된 것이다. 군용배낭에 군용반합(항고) A형 텐트, 군용 도끼까지 개인당 50kg이 넘는 짐을 메고 지리산 종주에 나선 것이다.

50kg이라는 게 느낌이 아니라 저울에 달았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요즘 배낭 무게를 염두에 두면 상상이 안된다. 전설같은 이야기이다.

                                               * 사진 출처

이게 A형 텐트이다. 윔퍼텐트와 A형 텐트에 대해 더 읽으시려면 --> 여기를

4) 1963년 10박 9일을 소요해도 덕유산 종주는 실패했다.

이무렵 전북대 송현주 교수는 유럽의 정통 등산 지식을 제자들에게 보급하면서 산악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당시 송현주 교수를 따르던 학생들은 에델의 이호선 회장을 지도위원으로 하는 '홀립'(屹立 흘-우뚝솟을) 이라는 서클을 만든다.

흘립은 1963년 겨울  영각사를 출발 남덕유, 동엽령, 북덕유로 이어지는 대덕유의 종주길에 나서지만 키를 넘는 폭설과 강추위 그리고 배낭 무게에 지쳐 10박 9일만에 동엽령에 도착 종주등산을 포기하고 만다.

남덕유에서 동엽령까지 지금은 1박 2일에 충분할 것이다. 1963년의 산은 그러니까 지금의 잣대로 보아서는 안될 것이다.

4-1) 그 당시 겨울 추위와 폭설은 이정도였다.

1963년 1월 모악산.

사흘째 계속되는 폭설이다. 가슴까지 쌓인 눈을 헤치면서 정상을 향한다. 악전고투 속에 정상에 올라 감격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는다. 

그런데 서복남씨의 독일제 라이카 카메라도 이날 추위에는 얼고 말았다.

1965년 12월 지리산.

아침 8시 화엄사를 출발 노고단을 향한다. 심한 폭설에 허리를 치고 넘는 눈더미를 헤치다가 오후 4시 겨우 중재 부근에 도착한다. 기온은 영하 27도 마땅한 캠프사이트도 없고, 바위틈을 비집고 비박을 한다.

추위에 잠을 설치고 이튿날 새벽같이 출발하지만 노고단 도착시간은 역시 오후 4시. 평소 화엄사 노고단은 4시간 거리다. 정말 엄청난 눈이었다.

이날 밤, 10시 까마득히 들리는 메아리 소리를 듣고 찾아나선다. 피아골을 출발, 노고단으로 오던 경남 마산팀(원로 산악인 남행수씨도 있었다)이 눈속에 길을 찾아 방황하고 있다. 

                                               *사진출처 - 같은 책에서

양말까지 벗고 있는 걸 보면 점심이나 저녁일 듯 싶은데, 야영터로 보이는 이곳에 어떻게 멍석이 있는건지 궁금하다. 멍석을 갖고 왔을리는 만무하고 임대해주는 이가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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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거국적인 등산대회를 그들은 거부했다.

당시에는 전문 산악계를 중심으로  '대통령기' 등의 타이틀을 놓고 산에서 달리기 경주를 했다. 이  등산대회에 대해서 전주 에델바이스 산악회는 이렇게 반응했다.

1963년 전주 산악회는 이고장에서는 처음이 되는 시민등산대회를 모악산에서 개최한다. 모래 3kg씩 배낭에 넣고 정상을 거쳐 금산사까지 선착순으로 달려 등위를 가리는 대회이다. 이런 여세를 몰아 1964년 국내에서는 경북 다음으로 두번째가 되는 제1회 전국 집중식 등산대회를 운장산 일원에서 열게 된다.  

그런데 1회 대회를 마친 후 '에델'은 '등산은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요 도전이며, 자신과의 투쟁일수는 있어도 사람과 사람, 팀과 팀의 경쟁일 수는 없다'는 견해를 보이고 대회 주체에서 물러 서게 된다.  이로 인해 '에델'은 그 뒤 발족되는 전라북도 산악연맹에도 참여를 유보하고 독자적으로 등산활동에만 전념하게 된다.

당시 등산에 대한 주도적인 담론은 ''등산은 자연과 인간의 만남이요 도전이며, 자신과의 투쟁일수는 있어도 사람과 사람, 팀과 팀의 경쟁일 수는 없다'였다. 

당시 산악인들의 이런 멘탈을 염두에 두고서 나는 등산대회에 대해 분명히 비판 또는 반대하는 이들이 있었을텐데 라고 짐작해 왔다. 전주에델바이스 산악회에서 그 예를 발견했다.

                                  *사진 출처 - 같은 책에서

 지리산 제석봉 부근의 고사목지대로 보이는데, 좌우측 두사람은 톱으로 쓸어 평평한 나무 등걸에 앉아 있다 도벌의 흔적이 역력하다.

6) 당시 장비는...

이때까지도 산행장비로는 군용 버너와 군용 반합. 스키 파카. 마닐라 로프가 고작이었고, 눈길에서는 군용 워카에 새끼들을 감는게 최상의 방법이었다....

솜씨좋은 백남정 회원은 A텐트를 오려 손수 키스링형 배낭과 오버 슈스를 만들어 나누어 주기도 했고, 방한복은 양면 다후다에 스폰지를 넣고 누벼 지금의 우모복 흉내를 내기도 했다.

이무렵(1965년 이전으로 추정- 인용자) 국내에서도 코펠과 수통 등의 기본 장비가 생산되어 시판된다. 그 효시가 마포에서 생산된 돼지표 코펠로 이호선 회장과 백남정, 김남규 회원 등이 이 코펠을 갖고 있었다.

알미늄 코펠 두짝에 소형 주전자가 들어 있고, 알콜 버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에델은 산행때마다 예쁘장한 이 주전자를 앨콜 버너에 올려놓고 커피를 끓여 마시며 여유를 즐기기도 했다.

한국에서 코펠은 이후 마치 버너가 그러하듯 수많은 브랜드가 난립한다. 김남규의 글에 의하면, 그 효시는 마포에서 생산된 돼지표라 하니, 언젠가 돼지표 코펠이 등산박물관에 들어오길 바라는 마음이다.

                      *사진출처 - 창립30주년 기념지

등산 안내판이 저렇게 단촐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립다.

7) 당시 교통사정은 이러했다.

1967년 10월 7일- 9일 속리산

이때만 해도 교통편이 어려워 2박 3일의 일정이었다. 법주사 입구 잔디밭에 천막 별장을 세우고 모닥불에 젊음을 태우면서 흥겨운 가락과 선율로 하모니를 이룬다. 

이튿날 서부(?)의 역마차도 마다하고 3열 종대로 행진이 시작된다. 이때 속리산엔 마차가 관광객을 실어 날랐다.

교통이 좋아 당일치기를 한다 치자. 매주말 산에 간다고 하자. 차라리 저때 저렇게 한번 모처럼 가서 캠핑하고 하는게 더 오랫동안 추억이 될 것이다. 

8) 설악산 봉정암 산장이 궁금하다.

1969년 8월 설악산.

폭우가 내려 수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봉정암 산장에 여장을 푼다. 그러나 심한 바람에 함석 지붕이 날아가고 뚤려버린 천정에선 빗방울이 떨어진다. 

봉정암 옆에 있던 봉정암 산장은 의외로 사진이 적고, 산행기에도 그리 많이 등장하지 않는다.

사진은 명문 요델 산악회의 나경봉님의 블로그에서 모셔왔다. 

그는 1967년으로 기억한다면서 봉정암이라고 적고 있는데, 봉정암 산장으로 보인다. 봉정암 산장도 모이는데로 따로 블로깅할 계획이다.

9) 그리고 '나나스케'에 대하여.

1963년 7월 운장산

1박 2일의 일정이었다. 대원은 7명. 그런데 세상에 이럴수가! 부식이라곤 '나나스케' 반쪽이 전부다.

일곱조각으로 나누어 들고 예정된 등산을 강행한다. 이튿날 점심시간, 콩 두쪽 정도되는 나나스케를 꺼내들고 부식이 남았다고 자랑하는 대원도 있다.

나나스케가 뭐지. 검색해보니 장아찌 류로 일본의 나라즈케를 한국식으로 부른 거라는 걸 알게되었다.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팔리고 있다는데, 더 읽으시려면 ㅁ1ㅁ2ㅁ3

10) 마지막으로, 사진 중에서 제일 애틋한 것 중 하나..

양철, 함석 지붕으로 된 초가삼칸 규모의 사찰. 축대는 얼기설기 돌로 자연스럽게, 자연그대로 쌓았고, 석등은 돌이 아니라 나무로 만든 목등이었다. 당시에는 제법 큰 사찰도 나무로 된 석등이 많았다.

이런 사찰 어디에 남아 있으려나. 고향집인양 살가운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는.

우리가 잃어버린 '조선의 산'의 풍경 중 하나이다.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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