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길모퉁이에 한 사람이 서 있었던 도시
모든 길모퉁이에 한 사람이 서 있었던 도시
  • 박다빈
    박다빈
  • 승인 2019.02.2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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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 본 최고의 도시에 관하여

   걷기 여행을 시작한 지 3년 정도 되었다. 그 이전에도 종종 여행을 다녔으나, 그때는 (그게 무엇이든) 교통수단을 이용해 이동했으므로, 도보 시간은 거의 없었다. 여행 계획도 걷기와는 전혀 상관이 없었다. 나는 뭔가를 보러 가거나 먹으러 가거나 들으러 간다는 목적으로 여행을 떠났고, 그에 따르는 과정은 언제나 부수적이었다. 다시 말해, 당시의 내 여행은 목적지향적인 행위였다.

   그러다 우연히 걷기 여행이라는 걸 알게 되었고, 마음 맞는 사람과 술을 마시다가 걷기 여행 계획을 시작했다. 어디서 어디까지는 차를 타고 가고, 거기서 거기까지는 걷자, 이런 식으로. 중간에 흐지부지될 줄 알았던 여행 계획은 의외로 탄탄하게 살집을 불려 나갔고, 급기야 우리는 생각보다 빨리 첫 여행을 시작했다.

   첫 걷기 여행을 떠난 그때, 나는 한시도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상태에 있었다. 나는 한 사람을 좋아하고 있었고, 어디에서든 그 사람을 생각해 낼 줄 아는 재미있고 근사한 창의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창의력이 극대화된 곳이 순천이다. 나는 순천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 잡아 놓은 숙소에서 순천만까지 걷고 또 걸으며 온 곳에서 그 사람을 만났다. 해가 떠오르는 새벽 강변에서, 순천만 국가정원에서, 순천만 갈대숲에서, 순천문학관에서. 그리고 되돌아오는 길에서도.

   

   머릿속이 한 사람으로만 가득 찰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처음 들어가 보는 식당에서 처음 집어 든 숟가락의 옴폭한 면 안에도 그 사람이 있었고, 먼지 낀 버스정류장 지붕 위에도 그 사람이 있었고, 허름한 콘크리트 벽을 물들인 락카 낙서 속에도 그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내 물리 세계의 모든 곳에 침투해 있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있을까. 왜 하필 순천에서 그런 압도적인 경험을 한 것일까. 아무것도 가늠되지 않았다. 나는 다만 숨을 짧게 내쉬며 끊임없이 행복해했다. 그것은 터질 듯 벅차면서도 상당한 안심을 주는 행복이었다. 누군가로 인한 내 인생의 팽창이 이토록 즐거운 일일 수 있다는 것에 나는 유쾌하게 감탄했다. 나는 모든 것을 보고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그 모든 것 속에 그 사람이 있어서. 

   나 아닌 누군가를 향한 마음을 만들고 그렇게 만든 마음을 그 사람 앞에 내놓는 것에 자주 인색했던 나는 기본적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에 엄청난 경계심을 갖는 사람이었다. 내 것이라면 그 무엇도, 조금이라도 잃지 않으려고 낑낑대는 구두쇠여서. 사랑하는 일이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지각 변동, 매서운 폭풍우, 높은 파도 같은 것들이 내 삶으로 밀려드는 것을 질색했다. 그것들에 휩쓸려 뭔가가 깨질 것이 두려워서. 뭔가가 사라져 버릴까 불안해서. 손해 보기 싫어서.

   그랬던 내가 보호 장비 하나 없이 온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소스라치게 두렵던 것들이 한없이 하찮아져서. 그것들이 하찮다는 사실마저 망각해 버려서. 누군가를 깊이, 깊이 사랑하게 되어서. 그 사랑이 전부여서. 나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만 관심을 쏟았고,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일만 하였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지내는데 일상이 더 잘 굴러갔다. 일의 능률이 오르고, 삶의 질이 증폭되고, 체력이 늘고, 마음이 자꾸만 커졌다. 내 일상을 통째로 엎어 버릴 줄 알았던 내 커다란 사랑이 나를 그 어느 때보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잘 재우며 나를 자라게 했다. 앞으로 씩씩하게 나아가게 해 주었다. 사랑으로 꽉 찬 마음은 나보다 나를 더 아꼈고, 그 점이 나를 여러 차례 놀라게 만들었다. 내 마음에 나 혼자 있을 때보다 그 사람과 내가 함께 있을 때 나는 나에게 "잘 살자."고 더 자주 말했다. 기이한 일이었다. 

   내가 조심해야 하는 것은 사랑 그 자체가 아니었다는 점을 나는 서서히 깨우쳐 나갔다. 사랑이 균형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균형을 잃는 것이었고, 사랑이 삶을 위협하는 게 아니라 뭔가로 인해 훼손되거나 일그러진 내가 삶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며 내가 배운 것 가운데 가장 값진 사실이 이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일에 지레 겁을 내거나 주춤거리지 않는 사람이 되어 갔다. 그것은 엄청난 변이였다. 그 변이의 결정적인 시작이 순천에서 일어났다. 하여 나는 내 마음의 역사를 되짚어 볼 때마다 순천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조용하지만 정겨운 도시. 

   사람의 마음마다 그런 공간에 대한 기억이 하나씩은 있을 것이다. 자기 내면의 획기적인 변화를 고요히 함께해 준, 다독여 준, 지켜봐 준, 끌어안아 준, 독려해 준 공간에 대한 기억. 그래서 어째 동료처럼 느껴지거나 친구처럼 느껴지는 공간에 대한 기억.

   나는 주로 여행을 통해 그런 기억들을 만들었다. 나에게 여행은 어떤 공간과 절친한 관계를 맺게 해 주는 신기하고 아름다운 행위였다. 여행지에서의 걷기는 자주 내 마음속의 미개척지를 유랑하는 일 같았고, 그래서 나는 하나의 여행이 끝날 때마다 '내 안에 오래 존재했으나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문'을 하나씩 열어 놓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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