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사랑을 시작한 당신
새 사랑을 시작한 당신
  • 박다빈
    박다빈
  • 승인 2019.02.22 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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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쿠코 매거진 <소설>

   당신이 새로운 연인을 만나는 꿈을 꾸었습니다. 나와 잠깐 마주치고 웃으며 인사한 당신이 머리를 수시로 매만지며 가는 곳에 서 있던 사람. 다갈색 코트를 입고 서 있는 그 사람에게로 곧장 걸어가는 당신의 뒷모습을 나는 유리창 너머로 바라보았습니다. 뿌린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당신 향수 냄새가 내 얼굴에서 멀어져 가는 것을 느끼면서. 크림색 니트를 입고 조그만 가죽 가방을 멘 당신의 걸음들을 건너다보았습니다.

   우리는 아무 사이도 아니어서, 그랬던 적이 한 순간도 없어서, 내가 당신을 잃을 수 없는 것인데도, 나는 커다란 뭔가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허망해졌어요. 감히 그래 버렸습니다. 목 안쪽이 문득 메말랐다고 느끼며, 나는 유리창 너머의 당신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그것은 마치 표정을 가진 듯한 뒷모습이었습니다. 행복한. 약간 들뜬.

   당신이 새 사랑을 시작한 것이 당신에게는 또 하나의 우주를 선물로 받는 엄청난 일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것을 개운하게 축하하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당신이 행복한 것이 좋은데, 정말로 그건 너무 좋은 일인데, 사실은 당신이 내 곁에서 행복한 게 그렇지 않은 것보다 더 좋았나 봐요. 순수하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사실은 그렇지 않았나 봐요. 기다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당신을 기다렸나 봐요. 계속 기다리고 있었나 봅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바라고 있었나 봐요. 당신을. 당신 생이 흘러가는 방향의 전환을. 당신이 나에게로 와 주기를. 당신의 들뜬 걸음들 끝에 자주 내가 서 있기를. 당신에게 행복을 만들어 주는 사람들 목록에서 내 이름이 가장 크고 굵게 적혀 있기를. 

   유치하게도 나는 나에게 다갈색 코트가 있었나, 하는 생각을 하며, 당신이 마주 보고 있는 그 사람이 나였으면 어땠을지 상상도 했습니다. 그 상상은 고요하지만 굉음 같은 폭로였습니다. 당신에 대한 내 진심을 휘감아 놓았던 가식이, 장식이 낱낱이 흩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는 마음이 순수하지 않다고 하는 건 잘못된 표현이겠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하길 바라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런 마음을 가진 건 그리 순수하지 못한 일 같아서, 당신에게 미안했습니다. 정확히 뭐가 미안한 줄은 모르겠는데, 미안했습니다. 내가 순수하지 못한 게 미안했던 걸까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아주 많은 것들을 소리 없이 요구한 내 양면적인 태도가 미안했던 걸까요. 전부일까요. 전무일까요.

   잡아 본 적도 없는 당신을, 보낼 권리도 없는 내가 보내고 있는 그 순간 나는 아주 많은 것들을 느꼈습니다. 당신이 누굴 만나든 만나지 않든 당신을 좋아하는 내 마음에는 변함이 없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그 믿음이 이렇게도 간단히 균열되어 버려서 약간은 당혹스러웠습니다. 내 순정이 얄팍했던 걸까요. 그것밖에 안 되는 순정을 내가 가졌던 걸까요. 원래 혼자 품는 순정이란 게 이런 걸까요. 이랬다가 저랬다가, 단단했다가 물렀다가, 꿋꿋했다가 변덕을 부렸다가 하는 걸까요. 

   당신이 행복해서 좋으면서도 좋지 않은 내 마음을 어디에라도 두고 오고 싶어서,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자꾸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의 역사를 새로 쓰고 싶었습니다. 당신을 향해 있는 내 마음의 때를 벗겨 내고 싶어 자꾸 물 같은 것을 찾았습니다. 깨끗한 줄 알았는데 어쩌면 하나도 깨끗하지 않았던 그것을 처음으로 씻기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당신을 똑바로 마주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나를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 사람을 오래 사랑하며 지낸 세월은 나에게 참 많은 모순을 가르쳤습니다. 기쁘면서도 서글프고, 즐거우면서도 허전하고, 신나면서도 무기력하거나, 통쾌하면서도 막막한 마음들의 존재와 그것들의 사라져 감을 나는 의도치 않게 열심히 배웠습니다. 뭘 남기려고 당신을 사랑한 건 아닌데, 당신을 사랑하면서 내 안에 쌓여 간 것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래도 그것들 때문에 당신에게 고맙단 말을 하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세상을, 사람을, 마음을 더 잘 알게 해 줘서 당신에게 고맙긴 하지만, 내가 당신에게 고맙단 말을 할 때 정말로 고마운 것은 그게 아니니까. 당신은 당신이어서 언제나 고마운 사람. 첫눈에 사랑하게 해 줘서 고맙고 예쁜 사람. 말이 안 되는 것들을 말이 되게 하며 기적의 존재와 가치를 몸소 가르쳐 준 사람. 

   첫눈에 반한 사람을 이렇게 오래 좋아하게 되리란 걸 알았더라면, 당신에 대한 내 마음을 느리게 키웠을 걸 그랬어요. 너무 빨리 자라느라 중요한 것들을 몇 가지씩 빠뜨린 내 마음이 당신에게 미안해합니다. 미안해요. 급하게 사랑해서. 이제 와 돌아보니 당신이 내 마음 때문에 몇 번은 체했을 것 같은데. 내색 한 번을 안 하고 당신은. 

   행복하세요, 부디. 내 바람과 상관없이 행복할 당신이지만. 나는 늘 그렇듯 문득문득 혼란한 마음으로 당신의 행복을 끈질기게 가리킵니다. 당신과 당신의 행복이 극이 다른 자석을 가지고 있다고 믿습니다. 늘 그래 왔다고 믿습니다.

   부족한 것은 부족한 대로, 잘 안 되는 것은 잘 안 되는 것으로 두고, 내 마음은 내 마음의 길을 계속 걸을 것입니다. 이제는 좀 정직하게 그래 보려고 해요. 두려워하거나 절망하거나 하는 내 마음에 솔직하면서 당신을 사랑해 보려고. 똑바로 가다가 지그재그로 가다가 멈추었다가 기다가 뛰다가 집을 지었다가 집을 부수다가 돌아섰다가 다시 되돌아섰다가 하면서. 당신의 옆모습이나 뒷모습이 있는 그곳을 향해 계속 걸을 것입니다. 언젠가 내가 도착한 그곳에 당신이 없을지도 모르죠. 그래도 괜찮아요. 어쩌면 그건 당연한 일일 수도 있어요. 모쪼록 당신은 행복하세요. 그것만 하세요. 그것이 내 바람의 전부가 되도록 나는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동안 당신을 욕심내서 미안합니다. 아무 말 없이 내 마음의 모든 부분을 일깨우는 당신. 당신도 한 사람을 오래 사랑하고 있나요. 사랑할 예정인가요. 그런 사랑을 막 끝냈나요. 모쪼록 당신이 행복하길 바랍니다. 내 사랑이 당신의 자부가 될 수는 없을지 몰라도, 내 사랑이 당신의 체증이 되지는 않도록, 당신의 행복을 당신의 행복을 위해 기원하는 사람이 되어 보겠습니다, 나는. 

   사랑해요. 아주 오래 전부터. 아주 조금씩 똑똑해지는 마음으로나마.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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