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이근식의 황칠나무 이야기...기록 속의 황칠
[컬럼]이근식의 황칠나무 이야기...기록 속의 황칠
  • 정성남 기자
    정성남 기자
  • 승인 2019.02.18 2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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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이근식 서남해안협동조합 이사장]

◆삼국시대의 기록

(1) 백제와 관련된 기록
삼국 가운데 백제는 황칠과 관련해서 사료(史料)에 가장 많이 언급된다. 
먼저 완도(莞島)는 옛날에 가리포도(加里浦島)였다. 이 섬에서는 황칠이 난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당나라의 두우(杜佑)가 쓴 통전(通典) 권 185 백제 편에 보면, “나라의 서남 바다 가운데, 세 섬이 있어 황칠수가 난다. 소가수(小榎樹; 가래나무)와 비슷하지만 더 크다. 6월에 진액을 취해서 기물(器物)에 칠하는데 황금같이 번쩍여서 안광(眼光)을 빼앗는다.”라고 했다. 이를「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는 완도산 황칠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나라의 서남 바다 가운데 세 섬이라고 했기 때문에 완도뿐만 아니라 다른 2개의 섬에서도 생산되었다. 그곳 중의 하나가 바로 제주도(濟州島)이다. 

명광개(明光鎧)는 백제뿐 아니라 수·당기에 양당개와 함께 유행한 갑옷으로 황색칠이 되어 있고 양쪽 가슴에 호심이라는 판이 붙어 있다. 

“당 태종(唐 太宗)이 정관(貞觀)19년 (백제 의자왕9년, 서기645년)에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금칠(金漆)을 채취하여 산문갑(山文甲)에 칠하였다.”는 내용이 있으며, 여기서 금칠을 황색 칠로서의 황칠이라 해석하였다. 이 시기라면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백제로부터 연합작전을 요구받았을 때였고 백제는 신라를 견제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조공의 형태로 황칠 갑옷을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가죽을 오려 갑옷을 만들고 여기에 여러 번에 걸쳐 황칠을 입히면 부드러운 가죽이 단단해져서 철갑보다 더 단단해졌던 것이다. 더욱이 황금빛 광채가 났으니 지휘자로서는 최고의 권위를 내세울 수 있었다.

구당서에 ‘백제 섬에서는 황칠 수액이 생산된다.’는 글귀가 보인다. 
삼국사기에 보면  “백제가 금빛 광채의 갑옷을 고구려에 공물로 보냈다.”고 적혀 있으며 신라는 칠전(漆典)이라는 관청을 두고 국가가 칠 재료 공급을 조절하였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죽목류(竹木類)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죽목류(竹木類)

당외사(唐外史)
“대진(大秦)의 서쪽에 패다국(貝多國)이란 나라가 있고 그 나라의 산에는 패다수(貝多樹)가 많다. 그 나라 사람들이 가을과 겨울에 그 잎을 비축하고 청자수(靑磁水)에 칠(漆)을 타서 경(經)을 쓰는데, 만겁(萬劫)이 지나도 마멸되지 않는다. 고종(高宗) 3년에 패다경(貝多經)을 바쳐 오자 저수량(褚遂良)에게 명하여 편차해서 간수하게 하였다.” 하였으니, 그것은 바로 오대(五代)를 지나 송(宋)나라에 이르러서 고려(高麗)에 반사(頒賜)된 것이었다.

해동역사 제26권  물산지(物産志) 1에 의하면 조선국의 토산으로 황칠을 언급하였다. 

왜(倭)의 광인천황(光仁天皇) 보귀(寶龜) 원년(770, 문왕34)에 발해가 헌가대부(獻可大夫) 사빈소령(司賓少令) 개국남(開國男) 사도몽(史都蒙), 대판관(大判官) 고록사(高祿思), 소판관(少判官) 고울림(高鬱琳), 판관 고숙원(高淑源), 대록사(大錄事) 사도선(史道仙), 소록사(少錄事) 고규선(高珪宣) 등 187인을 파견하여 사신으로 보내와서 왕비(王妃)의 상(喪)을 고하고 왜황이 즉위한 것을 축하하였다. 왜황은 전계(展繼)를 보내 사도몽과 함께 발해에 사신으로 가게 하였으며, 견(絹) 50필, 실 200꾸러미, 솜 300둔을 하사하였다. 

사도몽이 더 주기를 요청하자, 또 다시 황금 작은 것 100냥, 수은(水銀) 큰 것 100냥, 금칠(金漆) 1단지, 해석류유(海石榴油) 1단지, 수정으로 만든 염주(念珠) 4관, 빈랑(檳榔) 10매를 주었으며, 왕비의 상에 견 20필, 명주(絁) 2필, 솜 200둔을 부의(賻儀)하였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2012년 인천 옹진군 영흥도 부근 바다 속 펄 바닥에서 인양한 고대 교역선(영흥도선)의 배 조각과 안에 실렸던 유물들을 정밀 분석한 결과 7~8세기 통일신라 배로 판명됐다. 배를 뒤덮은 쇳녹덩어리 속에서 나온 넓은 주둥이를 지닌 작은 토기항아리 안에  갈색으로 일부 변색되기는 했지만, 끈적거리는 원래 상태의 황칠액이 들어 있었다.

2006년 경주 첨성대 인근의 제사 터 유적 지하에서 딱딱하게 굳은 황칠 덩어리가 들어 있는 토기가 발견돼 관심을 모았다.

토기 바닥에 남겨진 황칠덩어리
토기 바닥에 남겨진 황칠덩어리

고려의 기록
1)계림지(鷄林志
“고려의 황칠은 섬에서 난다. 6월에 수액을 채취하는데 빛깔이 금과 같으며 볕을 쪼여 건조 시킨다. 본시 백제(百濟)에서 나던 것인데 지금 절강(浙江)사람들은 이를 일컬어 ‘신라칠(新羅漆)’ 이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황칠의 도장 방법은 7~8월에 채취한 수지액을 옥외의 직사광선 아래서 칠하며 기온이 낮을 때는 도장, 건조가 곤란하다고 하였으며 도장에 필요한 시간은 칠하기, 건조하기가 모두 하루면 충분하다. 도장 횟수는 3번 반복하여 칠하고 합죽선에 칠할 때는 들깨 기름을 먼저 바르고 말린 뒤 솔로 칠하며 햇볕에 말린 뒤에 다시 솔로 칠하며 햇볕에 말리는 일을 3번 반복해서 광택을 내었다. 목제품일 경우에는 들깨 기름을 바르지 않고 황칠을 바로 칠하는데, 칠한 뒤 말리는 일은 합죽선(合竹扇)과 마찬가지로 3번 반복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2)고려사절요제15권, 제23대 고종 8년(1221)
몽골 황태제(皇太弟)가 저고여(著古與) 등을 보내 와서 수달피 가죽 1만 령(領)과 가는 명주 3천 필, 가는 모시 2천 필, 면자(綿子) 1만 근(觔), 용단먹(龍團墨) 1천 정(丁), 붓 2백 관(管), 종이 10만 장(張), 자초(紫草) 5근, 홍화(葒花) ․ 남순(藍筍) ․ 주홍(朱紅) 각 50근, 자황(紫黃) ․ 광칠(光漆) ․ 오동나무기름 각 10근을 요구하였다.

3) 고려사절요 제20권,  제25대 충렬왕 8년(1282) 
충렬왕 8년 5월에 좌랑 이행검(李行儉)을 원나라에 보내어 황칠을 바쳤다.

4) 기언별집(記言別集) 제7권 서독(書牘) 3
편지를 받고서 무척 위안이 되고 고마웠네. 꿈결 같았던 지난번의 만남이 지금도 생생하기만 하네. 날씨는 따뜻하고 꽃은 져 가는데, 걸어서 앞 시내로 나가 보니 시냇물을 모조리 논에 대고 늪에는 먼지가 풀풀 일어 무엇 하나 좋은 정황이 없네 그려.

황칠(黃漆)은 지(誌)에 동이(東夷)에서 생산된다고 했는데 찾아볼 길이 없네. 듣건대 여행 보따리 속에 들어 있다고 하니, 칠할 곳이 많지는 않지만 볼 수 있다면 다행이겠네. 모쪼록 가지고 와서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네. 새 버선을 보내 준 것은 뜻이 지극히 후하니, 깊이 감사하는 바일세.

삼가 살펴보건대, 황칠은 지금 강진(康津)의 가리포도(加里浦島)에서 생산되는데, 가리포도는 예전에 이른바 완도(莞島)이다. 우리나라의 온 성(城) 가운데 오직 이 섬에서만 황칠이 난다.

5) 영파사지(英坡寺誌)
주역(周易)의 서문(序文)에는 황칠판(黃漆板) 위에서 이 책을 명상(冥想)하라고 쓰여져 있다.

6) 고려도경(高麗圖經) 
23권에 보면, “그 땅에 솔이 잘 자라 복령(茯苓)이 나고, 산이 깊어서 유황(流黃)이 나며, 나주(羅州)에서는 백부자(白附子),황칠(黃漆)이 나는데 모두 조공품(土貢)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충렬왕은 1282년에 좌랑(佐郞) 이행검(李行儉)을 원(元)나라에 보내어 황칠(黃漆)을 바쳤다.

16세기 중엽에 간행된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牛馬羊猪染疫病治療方)」의 기록에는 “제주에서는 ‘나나니’란 이름을 ‘황칠’이라 하고, 이 땅에서 ‘나나니’란 붉나무 진이라.”라는 기록이 있다. 

고려의 나주도(羅州道)에서는 황칠이 나는데, 토산물로 진공(進貢)한다. 

7)동사강목 제11하  : 제24대 원종 12년(1271) 
몽골이 비사치(必闍侈) 흑구(黑狗),이추(李樞) 등을 보내와 궁실(宮室)의 재목을 요구하였다. 또 성지(省旨) 중서성(中書省)의 명(命)으로, 금칠(金漆), 청등팔랑충(靑藤八郞蟲), 비목(榧木), 비실(榧實), 동백실(桐柏實), 노태목(奴台木), 해죽(海竹), 동백죽점(冬柏竹簟), 오매화리등석(烏梅華梨藤席) 따위 물건을 요구하였다. 

추는 상장군 응공(應公)의 아들인데, 몽골로 도망해 들어가, 본국의 토산물 중에 형용할 수 없는 희귀하고 진기한 물건이 있다고 거짓 아뢰니, 황제가 믿고 요구한 것이다. 드디어 금칠 10항(缸)과 비목 ․ 노태목 등을 바쳤는데, 추가 청등팔랑충은 교동(喬桐) ․ 진도(珍島) ․ 남해(南海) 등에 난다고 말하니 가서 찾았으나 얻지 못하였고, 오매화리등석은 토산은 아니나 송(宋)의 상인이 바친 것이 있으므로 아울러 바쳤다.

조선의 기록
(1) 세종실록
조선시대에 영면을 기리는 제례의식으로 하관을 고하는  천전의(遷奠儀)가 행해졌다. 이 때 기물(器物)로 자황칠 목잠(紫黃漆木簪)·자황칠 목채(紫黃漆木釵)가 하나씩 진설(제사나 잔치 때에 음식을 법식에 따라 상위에 차려 놓음) 되었다. 

(2)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은 권응창에(1500~1568)에 의해 중종 38년(1543)에 간행된 수의학서로서 소의 역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황칠을 태워 그 냄새를 맡게 하면 즉시 좋아진다고 했다.

(3) 다산 시문집 제4권궁복산(弓福山)과 순암집에서는 순암 안정복(1712~1791)선생은 이정조(李廷藻)에게 “우리 나라 동쪽 삼척(三陟)의 삼촌심(三寸椹), 갑산(甲山)의 들쭉(豆乙粥), 삼수(三水)의 지분자(地粉子) 바로 뱀딸기인데 맛이 매우 좋다. 북도(北道)의 용편(龍鞭), 남해(南海)의 황칠(黃漆)은 모두 진귀한 산물이니, 기록해도 무방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편지를 보냈다.

산림경제(山林經濟)로서는 조선시대 숙종 때 실학자 유암 홍만선(1664~1715)이 농업과 일상생활에 관한 광범위한 사항을 기술한 소백과사전적 책인 「산림경제」에  황칠은 천금목(千金木)이라고 하였다. 그 씨가 약에 많이 들어가고, 여기서 나온 즙액은 황칠이 되고, 수지(樹脂)는 안식향이 된다. 갓끈에 그 같은 구슬을 패용하면 부정함을 막아낸다.  

진연의궤(進宴儀軌)에는 조선시대 국가에 경사가 있을 때 궁중에서 베푸는 연회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책인 「진연의궤」에 숙종 44년(1718)년 2월 17일에는 실록(實錄)과 인조 23년(1645)의 의궤(儀軌)를 참고하여 길의장(吉儀仗)에 자칠목잠채(紫漆木簪釵) 1개와 함께 황칠목잠채(黃漆木簪釵) 1개를 사용하였다.

진연의궤(進宴儀軌) 제2권 감결(甘結)에 보면 외진연 시 영친왕 시연위(侍宴位) 배설을 전례대로 거행하며 황칠 소원반(黃漆小圓盤) 2죽(竹), 황칠반 10닢을 사용되었다.

중화전 진연(中和殿進宴)에 사용된 외진연 시에 배설하는 위차(位次)에 따르면 어좌(御座)는 전내 중앙에 위치하여 남향한다. 전선사 외숙설소(典膳司外熟設所)에는 모두 황칠이 된 고족찬안(高足饌案) 12좌(坐), 찬안(饌案) 황칠 고족 찬안 2좌, 황칠 수주정(壽酒亭) 1좌, 주기안(酒器案) 1좌, 다정(茶亭) 1좌, 진작탁(進爵卓) 1좌, 진화탁(進花卓) 1좌, 준대(樽臺) 2좌, 함(函) 2부는 상방에서 준비하였다. 대전에 올리는 미수(味數), 염수(鹽水), 대선(大膳), 소선(小膳), 탕, 만두, 차를 나르는 황칠 소원반은 탁지부(度支部)에서 준비하였다. 

내숙설소(內熟設所)의 관명전(觀明殿) 정일 진연(正日進宴)에서는 대전에 올리는 찬안(饌案)으로 고족찬안 (高足饌案) 12좌(坐)를 상방에서 준비했다. 대전에 올리는 황칠 조각 고족 별대원반(黃漆雕刻高足別大圓盤), 내입 소반과(小盤果) 1상은 내별고(內別庫)에서 준비한다. 

관명전(觀明殿) 야진연(夜進宴)에서는 대전에 올리는 찬안(饌案)으로 황칠 고족 찬안 6좌(坐)를 상방에서 준비하였다. 관명전 익일 회작(會酌)에서는 대전에 올리는 찬안(饌案)으로 황칠 조각 고족 별대원반을 본청에서 준비하였다. 관명전 익일 야연(夜讌)에서는 대전에 올리는 찬안(饌案)으로 황칠 조각 대원반은 상방에서 준비하였다. 
  
전(殿)의 북쪽 계단 위 북쪽 가까이에 남향으로 군막(軍幕)을 설치한 뒤에는 황칠로 된 서안(書案) 1좌, 연갑(硯匣) 1좌를 배설방에서 준비하였다.
상방에서 준비한 황칠 관련 물목을 정리하면 대찬안 6좌, 협안(挾案) 4좌, 진작안(進爵案) 1좌, 협안 4좌, 진잔탁자 2좌, 황칠 대찬안 6좌, 황칠 수주정(壽酒亭) 1좌, 다정(茶亭)1좌, 준대(樽臺) 1좌, 촛대 받침 2좌, 황칠 치사 탁자(黃漆致詞卓子) ․ 진화 겸 휘건 탁자(進花兼揮巾卓子) 각 1좌, 황칠 진화함 1부, 황칠 치사함, 찬품단자함, 진화함, 황칠 준화아가상(黃漆樽花阿架床) 1좌였다. 

그리고 서영보(徐榮輔)의 별단(別單) / 황칠은 또한 기물의 수요에 관계되는 것인 만큼 마땅히 배양하고 심고 가꾸어 국용에  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 10년을 한정하여 영과 읍에 으레 바쳐오던 것을 아울러 감면하여 오래 자라는 실효가 있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옛날 상태를 회복하여 규례대로 납부하게 된 뒤라도 과외로 징수하는 폐단은 엄격히 조목을 세워 일체 금단해서 영원히 섬 백성들의 민폐를 제거하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완도의 황칠을 10년을 기한으로 해서 면제해 줄 것에 관한 일입니다. 지금 영과 읍의 가렴주구로 인하여 생산지에서 도리어 계속 잇대기 어려운 근심이 있다고 하니 어찌 한심하지 않겠습니까. 영읍에 바치는 것은 일체 모두 10년을 한하여 임시로 감면해주고, 비록 10년이 지난 뒤라도 그 동안 얼마나 자라났는지와 얼마나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웠는지를 논하여 본사에 보고한 연후에야 비로소 옛날대로 회복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서매수의 건의 / 도승지 서매수(1731~1818)가 “통영(統營)과 수영(水營)에 바치는 황칠을 방답진에서 책임지고 대는 것이 전례이기는 하지만, 최초로 분정(分定)할 때에는 본진이 관장하는 여러 섬에 옻나무가 울창하고 풍부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폐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사방의 산에는 소나무를 제외하면 잡목이라고는 하나도 없는데, 예전부터 으레 납부해 오던 것을 중지할 수가 없는 데다 힘이 없는 진장도 감히 사실대로 논보(論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방군(防軍) 수십 명을 덜어 내어 그들의 번전(番錢)을 감해 주고 진선(鎭船)을 빌려 주어 바다로 멀리 나가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바다의 깊은 섬에서 끝까지 찾아내게 하여 기한에 맞추어 통영과 수영에 바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황칠은 상납하는 물품이 아니고 두 영에서 사사로이 사용하는 수요(需要)에 불과하니, 두 영에 분부하여 영구히 혁파해서 약간이나마 백성의 폐해를 없애 주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여, “도신에게 분부하여 엄히 신칙해서 징수하지 못하게 하라.”고 전교하였다.

(증정교린지 제2권 지(志)에서는 조선시대 일본과의 외교관계를 적은 책인 「증정교린지」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조선 제 17대왕(재위 1649~1659) 효종 원년에 관백 원가광(源家光)이 죽으니 차왜가 정관(正官) ․ 도선주(都船主) ․ 봉진압물(封進押物) 각 1인, 시봉(侍奉) 2인, 반종(伴從) 16명, 격왜(格倭) 70명을 거느리고 예조 참판(禮曹參判)에게 서계를 바쳤고 동래 부사에게 황칠괘연(黃漆掛硯) 1비와 부산 첨사에게는 황칠괘연(黃漆掛硯) 1비를 바쳤다. 1709년에는 부산 첨사에게 황칠무부대원분(黃漆無趺大圓盆) 10매를 바쳤다. 1763년에 일본으로 간 통신사 일행은 대마도에 들러 만송원(萬松院)이 보낸 황칠과반(黃漆菓盤) 3부를 예단(禮單)으로 받아 왔다. 

해동역사(海東繹史) 제26권 물산지(物産志) 에는 조선 후기 실학자 한치윤(1765~1814)이 단군조선으로부터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를 서술한 책이 「해동역사」이다.

총론(總論) 
조선국의 토산으로는 금(金), 은(銀), 철(鐵), 석등잔(石燈盞), 황칠(黃漆), 과하마(果下馬), 장미계(長尾鷄), 봉밀(蜂蜜), 초피, 예피, 장피(獐皮), 녹비(鹿皮), 해표피(海豹皮), 팔초어(八梢魚), 여방(蠣房), 귀각(龜脚), 죽합(竹蛤), 해조(海藻), 곤포(昆布), 메벼[秔], 기장[黍], 보리, 삼[麻], 송(松), 인삼(人葠), 백부자(白附子), 복령(茯苓), 유황(硫黃), 개암, 배, 밤, 핵도(核桃), 귤, 매(梅), 죽(竹), 차(茶), 목단(牧丹)이 있다. 

청일통지에서는 “조선의 토산으로는 백저포(白紵布), 면주(綿紬), 목면포(木棉布), 오조룡석(五爪龍席), 잡채화석(雜彩花席), 백추지(白硾紙), 미(米), 녹비(鹿皮), 달피(獺皮), 칼(刀)이 있는데, 이상은 모두 조공(朝貢)으로 바친다. 

또 금(金), 은(銀), 철(鐵), 석등잔(石燈盞), 수정(水晶), 소금(鹽), 낭미필(狼尾筆), 유매묵(油煤墨), 접선(摺扇), 황칠(黃漆), 과하마(果下馬), 장미계(長尾鷄), 봉밀(蜂蜜), 초피(貂皮), 예피(皮), 홍표피(紅豹皮), 팔초어(八梢魚), 반어(斑魚), 여방(蠣房), 귀각(龜脚), 죽합(竹蛤), 해조(海藻), 곤포(昆布), 메벼, 기장, 삼, 송(松), 인삼(人葠), 복령(茯苓), 유황(硫黃), 개암, 배, 밤이 있다.” 하였다.

황칠은 금(金)으로 착각할 정도의 황금빛 비색과 상상을 초월하는 내열성과 내구성, 벌레를 쫓아내고 정신을 맑게 하는 안식향, 오십견, 중풍, 항암제로도 사용되는 약용성분을 가지고 있어 중요 약재들로 다루어졌다고 각종 옛 문헌에서 알려주듯이 황칠의 역사적 효능들은 가히 놀라울 정도다.

안식향은 향뿐만이 아니라 약재로서도 중요했기 때문에 왕실의 건강을 담당하는 전의감(典醫監)이나 백성의 병을 돌보는 혜민서(惠民署)에서도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약재였다. 하지만 황칠나무는 이러한 가치와 그 희귀성 때문에 오히려 수난을 받았다.  특히 중국에 대한 조공과 과도한 공납 등으로 많은 양이 요구되었고, 황칠을 관리하는 지방 관리의 횡포로 농민들을 채근하여 구하려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황칠나무를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 나쁜 나무라고 여겨지게 되었고, 농민들은 공물 수탈을 피하고자 나무를 베어 내고 또 있는 곳을 감추었다.

다산 정약용(1762~1836) 선생은 이러한 당시의 현실을

공물로 지정되어 해마다 실려 가고
징구하는 아전들 농간도 막을 길 없어
지방민들 그 나무를 악목이라 이름하고
밤마다 도끼 들고 몰래 와서 찍었다네
<다산시문집 茶山詩文集권4, 시 황칠>
라고 개탄하였다.

그런 가운데 제주도와 완도, 보길도 등에 있던 황칠나무는 서서히 잊혀져 갔던 것이다. 

 1000여 년 동안 내려온 황칠나무가 21세기에 이르러 서서히 그 신비한 모습을 과학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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