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생이 회고하는 일제하 북한지역의 여행문화는 어떠했을까?
1909년생이 회고하는 일제하 북한지역의 여행문화는 어떠했을까?
  • 김진덕
    김진덕
  • 승인 2019.01.16 2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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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하 북한에서의 여행 문화는 어떠했을까? 조선인들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먹고 어떻게 즐겼을까?

그동안 일제하 여행에 관해서는 단순히 여행지 소개에 그치는 감이 없지 않다. 아래는 1909년 평양생인 김운형을 통해 좀더 디테일한 이야기를 해본다.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북한출신의 회고록은 해방될 무렵 20살 전후가 되는 192,30년생들이 많다. 별다른 여행을 해보지 못한  그들의 기억은 '나의 살던 고향은' 수준을 벗어나기 어렵다. 그들보다 윗세대의 회고들도 총론 수준이거나 단편적인 일화에 머무르는 경향이 강하다.

김운형은 1909년 평양시에서 태어나 사업을 하다가 35세의 중년(?) 나이에 해방을 맞았다. '다시 가야할 금강산과 북한산하'(1992년)는 사업상 여행을 하면서 보고 겪은 풍물이 많이 담겨 있다.

그역시 '기억'의 문제가 있고, 반공주의자로서 '자기검열'을 하는 모습도 보인다.  그러나 여행지 소개나, 그곳에서 무엇을 보고 했는지에 대한 디테일을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강점 36년간에도 일본인 경찰서장이나 고급관리를 배치하지 못한 곳은 이곳 개성 뿐이라고 알려져 있다. 개성의 남대문 부근의 시장과 상점 거리를 다녀보아도 일본인이 경영하는 상점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당시를 회상하여 보면 전국에 걸쳐 도시에는 일본인이 거주하는 신시가지가 형성되어 있었어나 개성시가지 만은 일본인들이 침투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배급경제로 전국이 힘들었는데, 개성시가지만은 별유천지였다. 서울에서 개성역까지 기차로 1시간 남짓 달리어 중간 하차를 하여 남대문 시장 목노집으로 가는 것이 이 코스를 아는 사람은 전부 동일하다.

목노집 소갈비와 돼지 다리를 처마끝의 고드름과 같이 주렁주렁 매달아 놓고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고 푸짐한 부식까지 준비되어 식욕애 따라 저녁식사겸 개성 특주를 몇잔 마시고 도보로 개성역으로 돌아와 다음 기차로 평양에 돌아가던 여정이 아직 생생히 떠오른다.

개성이 이런 곳인줄 미처 몰랐다. 처마 끝의 고드름과 같이 주렁주렁 매달아 놓는 모습은 냉장고가 없던 시절의 이야기인데, 내일 관련 사진을 올릴까 한다.

한반도 제일의 온천지대로 이름높은 백천, 평상, 마산, 송악, 신천 등이 차례로 개발되어 성업중이었다, 

그 중 백천온천은 개성시를 배후도시로 신천온천은 평양시를 배후도시로 발전중이었고, 평양의 기생제도와 같이 옥외거주 제도를 채택하여 호텔, 여관 등 요식업소에서 지명 호출되어 철야 영업을 하던 곳이다.

당시 기생에 대해서는 가와무라 미나토의 '말하는 꽃 기생'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평양급 기생들은 출퇴근을 할 수 있었다는 것, 자못 놀랍다.

1940년에 개항한 용당포 해변통 구릉지대는 천혜의 요양지 및 휴양지로 이용되었고, 해안통 어항에서 첫새벽에 개장되는 어시장은 일대 혼잡을 이루웠고, 이곳 특산품인 꽃게들을 삶아놓고 해주의 특산 청주 백세청풍(百世淸風)을 맛보던 평온은 그시절 지금부터 45년으로 아-아 그립기만 하다

꽃게를 삶아서 백세청풍이라는 청주를 마셨다니. 꽃게는 그시절에도 인기였구나.

해주의 백세청풍이라는 청주는 검색이 안된다. 역사는 선택적 기억과 배제라는 사실!

필자가 해주를 자주 찾을 시기에 시내 중앙로에서 일본인이 경영하던 요정 대정관(大正館)이 있었고, 이곳에 종사하고 있는 일본 게이샤들은 요정에 합숙생활을 하고 있었고, 한국 기생들은 자기집에서 자유로이 호출되어 출퇴근하고 있어 그들에게는 항상 부러움을 사고 있었고, 부근 평야의 곡창지대 야산에 재배된 해주의 단감은 그 맛이 독특하여 과일 중에 으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이 글은 1992년 씌여졌다. 지금처럼 반일감정이 진하지 않던 시절이라 어쩌면 팩트일 듯. 기생들이 자기 집에서 자유로이 호출되어...- 자기집은 포주가 있던 집이라고 할수도 있다만.

웅진만 일대에는 크고 작은 섬들이 산재되어 근해 어업이 상당히 발달되어 어민들의 소득도 윤택한 형편이었고, 웅진 시내 온천탕에서는 대중탕에 입욕하기 전에 생계란을 준비하여 가지고 온천수에 삶아 먹으면서 목욕하던 그 추억도 아직 기억에 남는 일이다.

백두산에서 계란을 넣는다는 건 TV에서 본 적이 있는데, 온천에 계란넣어 즐기는 방식은..그때 그시절에도 있었구만.

곡산은 황해도의 최북단으로 강원도, 황해도, 함경남도, 평안남도 등 4개 도의 사이에 인접되어 있는 고산 준령의 군청소재지로서 이곳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곡산을 찾아드는 사람은 고산준령에 지쳐서 울고, 떠날 떄는 인정을 잊지 못해 정다운 눈물을 흘린다'

필자도 이곳을 단한번 들렸을 적에 호롱불을 정원 입구에 매달아 놓고 영업하는 객주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옥수수와 감자를 섞은 식사에 산채나물을 곁들이고 머루로 담은 감주를 한잔 맛보던 그 시기가 50년이 흘렀으니...

울고왔다 울고간다는 강원도 이야기가 6시 내고향에서 흔한 레파터리이다. 그런데 조선팔도이던 시절은 좀 더 먼 오지이야기에서 유래했기 쉽겠다.

머루로 담은 감주라.. 이게 뭘까? 나는 남쪽의 단술이 아니라 머루주로 읽힌다.

사리원과 평양 중간 지점에 황주읍(黃州邑)이 자리잡고 과수단지로 형성되어 있었다. 이곳 과실 중에는 국광 사과가 특산품으로 명성이 높고 사과의 감미와 향취가 월등히 양호하여 이곳 황주 사과는 대부분 일본 본국의 위탁업자들이 예약하여 반출하던 인기있는 과실이었고, 또한 배후에 대도시 평양시를 소비 시장으로 이곳 과수업자들은 경제적으로 윤택하던 형편이었다.

국광 사과. 지금은 잊혀진.

한국인들은 작금에 제일 인기 많은 후지사과와 신고배가 일본에서 유래한, 그것도 일본 식민지 시절 최고봉이었던 대만의 봉우리 이름에서 비롯된 걸 모른다. 안다면 개명 운동이 벌어질까?

대동강 상류인 성천, 덕천 등지의 고원지대와 용강의 야산지대에서 생산되는 감율(甘栗)은 밤 중에서 가장 알맹이가 작은 품종으로 그 맛이 감미와 향취가 겸비되어 있어 국민이 애용하는 인기있는 과일로 특히 군밤으로 활용되어 시민에게 공급은 물론이고 평양역을 통과하는 기차 승객들에게 차내 매점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던 특산 기호 식품으로 그 감율의 생산 여부가 지극히 궁금하다.

식민지 시절, 조선의 밤은 유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감율이 무언지 궁금하다. 시골에 몇나무씩 남아있는 재래종 밤을 의미할까? 

사람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인데, 1960년대 우리네 땅의 밤은 전염병이 들어 거의 멸종을 했다. 지금 밤은 그 이후의 밤들이고....

평양에서 원산의 중간 지점에 양덕(陽德) 온천이 있다. 이 곳은 전국 제일의 양송이 생산지로 여름 8,9월만 되면 전국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들던 곳이다. 이곳 온천장에는 일반 숙박시설은 건축할 수 없고 단 구룡각(九龍閣) 호텔 일개소만 갸업중이었고, 본관에는 숙박시설, 별관은 유락장소로 분리되어 고관대작이나 특수층들만 출입했다. 일반인에게는 대중 목욕탕만 영업했다. 

별관 유락시설에는 일본인 여자 접대부만 배치한 특수 요정으로 활용하고 있던 곳이다. 식사는 손님이 원하기만 하면 연중 양송이 정식을 제공받던 온천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양송이는 분명 자연송이를 말할 것이다.

양송이 정식이라.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정식이 어떠한지를 생각해보면 대강 어떤 방식일지 짐작이 된다.

묘향산 - 상원암에서 불공을 드리면서 일박하고 중비로봉, 상비로봉까지 왕복이 가능하도록 당시에도 간이 등산로가 개설되어 있었고, 요소 요소에는 통나무 집으로 된 간이 숙소가 준비되어 있어 취사도구까지 비치해서 등산가의 편의를 제공하였고, 왕복에는 3,4일이 소요되었다.

필자가 자주 찾던 1930년대 후반까지는 보현사 경내외에는 일반 숙박시설은 통제되어 있었고, 다만 사찰 경내 명월당에서 유료로 숙식을 제공하였고 일반 향락행위도 통제되어 있었다.

일반 관광객들은 묘향산역 부근의 숙박 시설을 이용하였다. 당시 묘향산역은 시골 기차 정거장에 지나지 않았으나,  역부근의 개발이 촉진되어 일반 숙박 시설과 유락 시설 등이 개발 중에 있었고 또한 묘향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한약재와 산나물 등이 부락민들의 유일한 부수입으로 제공되던 장소이가도 하였다. 

한약재와 산나물은 당시 전국 어디라 할 것 없이, 지금처럼 토산품이었다. 김운형은 고보 다닐 시절 병이 있어 15일 이상 이곳에서 살았기 떄문에 기억이 정확할 것이다.

간이 숙소는 과연 무엇일까? 찻집 또는 무인숙소.

원산 - 반원형으로 휘어진 해수욕장과 송림 사이에는 미국 선교사드릐 붉은 벽돌집 별장이 해변가를 밝게 하여 주었고, 호텔 등 숙박시설과 오락시설이 구비되어 손색없는 휴영지로 지목되어 있던 곳이고, 이 지역 일대를 송도원으로 호칭하고 있었다.

원산하면 해산물을 생각하게 되고, 해산물 중에는 명태와 오징어를 연상하게 된다. 송도 유원지에도 생선회집이 즐비하게 나열되어 인기를 끌었다.

일제 시절에도 생선회집이 원산이 있었구나.

허지만, 좀 더 조사해 보아야겠지만, 그횟집이 지금처럼 생선횟집일지, 아니면 멍게해삼같은 것일지는 단언할 수 없겠다.

삼방 약수 - 계곡마다 적당한 위치에 간이 숙박시설이 준비되어, 계절만 되면 피서객으로 붐비던 곳이고, 원산 송도해수욕장과 연계되어 해수욕으로 검푸른 피부를 이곳 약수터에서 하루 이틀 회복시키기 위하여 반드시 거쳐가던 곳이다. 

게다가 겨울이 되어 한적하게 되면 인적이 끊기게 되어 고등고시와 국가고시를 준비하는 학구파 또는 문학과 예쑬을 전공하는 청춘 남녀들이 끊이지 않게 왕래하던 유서깊은 곳이다.

수험생들이 한적한 사찰에서 공부하던 이야기는 불과 얼마전까지 우리네 주변에서 횡행했다. 이게 일본시절에서 유래한 것이라니... 하기사 사법시험이 그때 그시절부터 비롯된 것이니 말이다.

경북대 김두식 교수의 '법률가 열전'을 보면 해방정국 시절 기막히는 법률가 이야기가 펼쳐진다.

주을온천 - 함경선 철도를 이용하던 여행객들은 이곳 주을 온천을 자주 찾았고, 부근 농촌에서 채취하는 자연산 머루를 원료로 만든 '쯔루쥬크'라는 포도주는 이곳의 특산품으로 애음되었고, 여행객의 선물용으로 인기를 끌고 있던 것이다. 

그 당시 주을에는 실내 온천풀이 가동 중이었고, 백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모래찜 시설 등 다양한 휴양지로 손님을 받고 있었다.

머루로 만든 쯔루쥬크라는 포도주라.

쯔루주크가 무슨 뜻일까? 6,7,80년대 설악산 수학여행을 한 이들이라면 기억할 머루주의 원형일까? 이 책에서는 들쭉술이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볼꺼리이겠다.

아오지 탄광도 과거에는 생활 터전을 잡지 못한 수많은 노무자가 광부 생활로 다른 직종에 비하여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으면서 유일한 천직으로 알고 가정을 이끌어 나가던 곳이다.

196,70년대 독일의 탄광부를 기억하는 이라면, 당시 첨단 산업이었던 아오지 탄광부가 비교적 좋은 대우를 받았다는 말이 과잉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다.

성진시는 항구도시로서... 중소업자들이 가공하는 한국 고유의 가정에서 필수품으로 간직하던 다듬이돌은 여행객들의 기호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었다.

다듬이돌...성진돌. 어려서 굴러 다니던 우리집의 다듬이돌, 

할머니하고 어머니하고 따독따독 다듬던 그 돌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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