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대의 시화 에세이] 19 말의 서랍
[신성대의 시화 에세이] 19 말의 서랍
  • 신성대 칼럼니스트
    신성대 칼럼니스트
  • 승인 2018.09.19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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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서랍
 

강남역에서 판교역 가는 전철을 타고 가는 중이었습니다 꽉 찬 좌석이라 앉을 수도 없어 출입문 근처 기둥에 기대어 가고 있었습니다. 전철이 두 구간을 지날 쯤 문득 고개를 들다 배가 제법 나온 젊은 임산부가 서있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주위는 여전히 꽉 찬 좌석 뿐 누구 하나 양보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젊은 임산부 앞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습니다.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손으론 열심히 문자를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잠시 바닥을 보는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거기에는 핑크색 네모칸에 임산부를 위한 "핑크카펫, 내일의 주인공을 위한 자리입니다"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근데 참 애매한 것은 자리에 앉아 있는 분이 여성 같기도 남성 같기도 한 묘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그리고 남성분이면 상관없지만 여성분이면 그것도 임신한 채 앉아 있으면 뭐라 말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여러 생각들이 순간 지나갔습니다.

그래도 그냥 서 있는 모습을 두고 볼 수 없어 젊은 임산부께 조용히 물었습니다. "힘드시겠네요? 혹시 어디까지 가세요?" "보정까지 가요" " 아 그래요? 그럼 얼마나 걸려요?" "괜찮아요. 30분 정도 밖에 안 걸려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홀몸도 아닌 분에게 이건 아니다 싶었습니다. 그런 대화를 나누고 있음에도 이어폰이 귀를 막고 있는 분은 휴대폰에 정신이 팔려 오직 자신의 일에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자리 앉은 그분의 어깨를 톡톡 쳤습니다. 내 쪽으로 얼굴을 돌리더니 이어폰을 빼고 나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도 모르게 "혹시 남자분이세요?" 했더니 "아니오, 여자에요." 허걱 순간 당황스럽고 미안했습니다.

그래도 할말은 해야 하니까 "에구 죄송합니다. 그럼 혹시 임신중이신가요?" 하고 연타를 날렸더니 나를 힐끔 보더니 새삼스럽다는 듯 "아닌데요" 하고 약간은 퉁명스럽게 답을 했습니다.

드디어 자신감 붙은 나는 일타를 날렸습니다."저 죄솧한데요 여기..." 하며 앞에 서 있는 젊은 임산부를 가리켰습니다. 순간 그녀는 마치 죄인인 양 스프링 튕기듯 빠르게 일어섰고 "아 죄송합니다" 하며 연신 고개를 숙였습니다. 젊은 임산부에게 얼른 자리를 양보하며 뒤이어 자리를 앉은 젊은 임산부는 "고맙습니다" 라고 인사를 건넸습니다. 상황은 묘했지만 기꺼이 미안함을 알고 얼른 자리를 양보한 그녀를 보며 기분은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것은 그다음에도 있었습니다.
누군가 자꾸 나를 쳐다보고 있는 느낌이 들어 그 쪽을 향하니, 눈이 마주친 어떤 할아버지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대견스럽다는 듯 연신 긍정의 고개를 끄덕여 주셨습니다. 비록 그분의 말소리를 듣지는 못해도 무슨 말을 하시려고 하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인데 대신 해줘서 고맙네'" 하는 그런 메세지 말입니다.

삶은 용기고 그 용기속에 나온 적절한 말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을 이끌어 냅니다.
말은 그냥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넣어둔 말의 서랍 속에 어떻게 채워 넣고 꺼내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누군가를 위한 한마디의 말이 필요할 때 만약 입이 말의 서랍을 닫은 채 가만히 있는다면 누군가의 마음도 닫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의 서랍 속에서 기분 나쁘거나 상처되는 말이 아니라 적절한 따뜻한 말의 단어를 서랍에서 꺼내어 쓸 수 있다면 이 하루가 더 행복해질 것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환한 미소로 연신 긍정의 고개를 끄덕여 주신 그 할아버지의 기분 좋은 얼굴과 안도하며 핑크색 의자에 앉은 젊은 임산부의 얼굴이 겹치며 엷은 미소가 번지는 내 말의 서랍을 만지작거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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