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면 눈물이 먼저 나는 이름, 이모할머니(칼럼07)
부르면 눈물이 먼저 나는 이름, 이모할머니(칼럼07)
  • 황순유 칼럼리스트
    황순유 칼럼리스트
  • 승인 2018.06.15 10: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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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독박 육아에 지친 아내!」

그 사이에서 왠지 모를 미안함과 죄책감에 기죽은 남자들이 뒤엉켜 살고 있는 세상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고 모두 억울하다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여자인 게 억울해요? 엄마인 게 억울해요?”

21세기의 며느리는 20세기 며느리와 다르게 살고 싶다. 21세기 엄마는 20세기 엄마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

아이와 함께 꿈꾸고 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아이와 독립된 나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 21세기의 이상한 나라는 꿈과 희망의 세계이기를….

아이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다. 아이의 행복을 심지 않은 부모도 없다. 잘될 거다, 잘될 거다…라고 주문처럼 흘리는 말들이 씨앗이 되어 행복의 뿌리를 내리려면 엄마가 먼저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엄마를 웃게 하고 꿈꾸게 하는 보통 엄마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10회 연재로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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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부르면 눈물이 먼저 나는 이름, 이모할머니

생각하면 눈물부터 나는 사람이 있다. 그리워서도, 미안해서도, 볼 수 없어서도 아니고 그저 고마워서. 고맙다는 말을 수백, 수천 번 해도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이다. 우리 아이들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셨고, 내가 나의 길을 찾아가는 동안 가장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신 분.

2008년 3월. 셋째 출산을 한 달 앞두고 나는 처음으로 베이비시터를 알아보기로 했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일하는 동안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가 가끔 도와주시면서 버틴 것도 장한 일이었다. 만삭의 몸으로 아침마다 서울에서 인천으로 출근했다. 퇴근해 돌아오면 집안 살림과 함께 여섯 살 된 큰아들, 20개월이 된 둘째 아들까지 돌봤다. 바로 옆에 시댁이 있고 멀지 않은 인천에 친정이 있지만 매번 여기저기에 도움을 청하기도 번거롭고 죄송했다. 무엇보다 동현이가 점점 자라면서 안정된 생활이 필요했다. 촬영이나 행사가 있는 날이면 유치원을 결석하고 친정이나 시댁에 아이를 맡겨야 하는 불안정한 생활로 아이를 키울 수는 없었다.

남편과 상의 끝에 우리는 베이비시터를 모시기로 했다. 셋째 아이 출산 후에도 계속 돌봐줄 수 있는 분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주변에 소개를 부탁하고, 여러 인터넷 사이트에 들어가 전화를 걸어 사람을 구하기도 했다. 그리고 베이비시터 면접을 보았다.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1) 지금 다니는 집이 있지만, 10만 원 더 챙겨주면 당장이라도 출근하겠다

- 이런 사람은 나보다 10만 원 더 주는 집으로 가실 수도 있으므로 패스했다.

2) 첫째, 둘째 아이는 안 보고 셋째 아이만 돌보겠다고 정확히 구분을 짓는다

- 내가 자로 잰 듯한 사람은 아닌지라 일단 보류했다.

3) 인상도 좋고 사이클을 타고 오실 만큼 건강하지만 한글을 모르신다

- 조심스러운 부분이지만 당시 동현이는 여섯 살이었다. 한창 동화책에 빠져 있던 시기라 솔직히 걱정됐다. 마침 그 자리에서 딸한테 전화할 일이 있었는데 수첩에서 딸 이름을 찾아달라고 하셨다. 죄송하지만 마음을 접었다.

결정을 못 한 채 하루 이틀이 지났다. 한 분을 더 만나기로 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난다. 베이비시터로 면접을 보러 오신 건데 파란색 제과점 봉투에 롤케이크를 담아 오셨다. 첫눈에 센스 있는 분임을 알았다. 이전에 몇 살짜리 아이를 돌보셨고 왜 그만두셨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저 서로 살아온 이야기보따리를 몇 시간 동안 풀어냈는지 모른다. 특별하지 않은 얘기들이었는데도 ‘바로 이분이구나!’ 싶은 느낌이 왔다. 아니, 이분이 도와주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계속했다.

그렇게 2008년 3월 3일, 우리는 또 하나의 가족이 되었다. 그분은 자신을 이모할머니로 불러달라고 하셨다. 마흔아홉밖에 안 되셨는데 무슨 할머니냐고, 그냥 이모로 하자고 했지만 결국 원하는 대로 부르기로 했다.

사실 이모할머니와의 면접에서 살짝 고민되는 부분이 있었다. 집이 부평이란다. 인천 출신인 나로서는 반갑기도 했지만, 어떻게 매일 인천 부평에서 서울 목동까지 아기 돌보는 일로 출퇴근할까 싶었다. 비효율적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부담스러웠다. 마을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타고 1시간 이상 걸리는 거리다. 그렇지만 이모할머니는 집이 인천이라서 일에 소홀하거나 지각하는 일은 절대로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하셨다. 돌이켜보면 2010년 9월 태풍 곤파스의 영향으로 경인선 철로가 유실되고 출근길이 온통 마비되었던 그날 하루를 빼고는 단 한 번도 정해진 시간을 지나서 오신 적이 없었다. 그날은 수원으로 출퇴근하는 남편도 점심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직장에 도착했다. 아이들 학교에서는 학교장 재량으로 아침 일찍 임시 휴교령이 내려진 터라 “오지 않으셔도 됩니다”라고 전화를 드렸으나 소용없었다. 목동은 큰 나무들이 많아 목동이라고 불리는데, 목동의 상징인 나무들이 바람에 쓰러지고 물에 잠겼다. 신호등도 고장이 나고 거리는 아비규환의 상황이었다. 평소 출근 시간보다 늦기는 했지만, 취업 준비생이던 아들이 이모할머니를 차로 모시고 왔다.

지금도 많은 기억이 생생하다. 한번은 내가 감기 걸린 상태로 출근했는데 퇴근해 돌아오니 집에 아무도 없는 거다. 애들이 있으면 쉴 수 없다며, 애들 보면서 언제 쉬느냐며 애들을 데리고 부평 집으로 퇴근하신 거다. 주말 동안 푹 쉬고 괜찮아지면 데리러 오라고. 애들은 그곳에서 이모할아버지랑 놀이터에 가고, 이모랑 삼촌이랑 맥도날드도 가고, 석현이가 가보고 싶다던 낚시터도 갔다. 마치 손주들이 놀러 온 것처럼 아이들을 사랑으로 돌봐주셨다.

이모할머니는 내가 일하러 나간 시간이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아이들의 모든 일정을 맞춰주셨다. 동현이는 걸리고, 석현이는 유모차에 태우고, 지현이는 포대기로 업고 다니셨다. 엄마라도 이렇게 세 아이를 돌보는 건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사실 이모할머니는 유능한 베이비시터였다.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동네 놀이터에서 “지금 받으시는 금액보다 훨씬 더 드릴 테니 우리 집으로 와주세요”라는 말을 여러 번 들으셨단다. 하지만 한 번도 흔들림이 없었다. 오히려 나에게 “그 엄마 조심해”라고 조언하셨다.

2012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이모할머니는 지현이랑 나뭇잎을 주우러 동네 공원에 다녀오겠다고 하셨다. 지현이는 이모할머니의 자전거 뒤에 타 조금 먼 동네에 있는 큰 근린공원에 가는 걸 좋아했다. 자전거 뒤에 유아용 의자를 달아 지현이를 태우고 동네 어디든 다니셨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지현이는 나뭇잎을 한가득 가지고 들어왔다. 거실에서 소꿉놀이하고 노는 지현이를 보며 이모할머니가 어렵게 얘기를 꺼냈다. “내가 우리 지현이랑 보내는 마지막 가을이 될 거 같아서 더 부지런히 데리고 다니려고요.” 무슨 말인가 처음엔 이해가 안 갔고 나중엔 걱정이 되었다. 혹시 큰 병이 나셨나. 더 멀리 이사라도 가시는 걸까. 무슨 일일까 싶어 긴장하며 다음 말을 들었다. “우리 딸 임신했어요. 내년 여름엔 우리 손주 봐줘야 해서…”라고 말씀하셨다. 누구보다도 내가 제일 축하해줘야 할 일이다. 이모할머니의 딸은 내가 정말로 예뻐하며 친동생으로 여겼다. 나는 정말 축하한다고 호들갑을 떨었지만, 이모할머니는 울고 계셨다. 그리고 잠시 후 나도 같이 엉엉 울었다. 지난 몇 년간 우리 아이들을 진심으로 돌봐주셨던 그분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나는 곧 걱정이 밀려왔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해가 바뀌고도 한참이 지나야 벌어질 일인데 마지막으로 보낼 가을을, 마지막으로 보낼 겨울을…. 그렇게 하루하루를 특별한 날로 여기며 살았다. 예정된 날이 되었다. 2013년 7월 10일. “얘들아, 할머니 또 올게요.” 마지막 인사와 함께 퇴근하셨다.

주변에서는 내가 무척 특별한 경우였다고 한다. 나도 안다. 키우는 방식이 맞지 않거나 아이들하고 맞지 않아서 오래 못 가 새로운 베이비시터를 알아보는 집들이 허다하다. 이렇게 마음 맞는 고마운 분과 5년을 보냈다니 믿기지 않는단다. 그 시절에도 지금도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요즘 세상엔 딸 가진 엄마들이 “우리 딸 좋은 남자 만나게 해주세요” 다음으로 “좋은 베이비시터 만나게 해주세요”라는 기도를 한다는데, 우리 엄마는 어디서 기도를 하셨던 걸까? 또 하나의 가족이었던 이모할머니와는 지금도 애틋한 사이로 지낸다. 자주 볼 수는 없지만, 목소리만 들어도 눈물 나는 사이. 부둥켜안고 1박 2일을 얘기해도 늘 시간이 모자란 사이로.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 지금의 우리 가족이 있기까지 그분의 공을 생각한다면 평생을 모셔야 할 또 한 분의 엄마다. 진심으로 고마워요.

필자소개

황순유 

경인방송 FM90.7mhz ‘황순유의 해피타임907’ DJ 

KAA(한국아나운서아카데미) 강사

더 퓨어 컴퍼니 대표, 20년 경력의 프리랜서 진행자.

저서)황순유(2018),《77년생 엄마 황순유》, 도서출판씽크스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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