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의 무협지, 출산 비화를 아시나요? (칼럼05)
여자들의 무협지, 출산 비화를 아시나요? (칼럼05)
  • 황순유 칼럼리스트
    황순유 칼럼리스트
  • 승인 2018.06.01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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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독박 육아에 지친 아내!」

그 사이에서 왠지 모를 미안함과 죄책감에 기죽은 남자들이 뒤엉켜 살고 있는 세상이다. 행복한 사람들은 없고 모두 억울하다고 외치고 있다.

“그래서? 여자인 게 억울해요? 엄마인 게 억울해요?”

21세기의 며느리는 20세기 며느리와 다르게 살고 싶다. 21세기 엄마는 20세기 엄마들과 다른 삶을 살고 싶다.

아이와 함께 꿈꾸고 아이와 함께 성장하며 아이와 독립된 나만의 꿈을 향해 나아가는 것. 21세기의 이상한 나라는 꿈과 희망의 세계이기를….

아이의 행복을 바라지 않는 부모는 없다. 아이의 행복을 심지 않은 부모도 없다. 잘될 거다, 잘될 거다…라고 주문처럼 흘리는 말들이 씨앗이 되어 행복의 뿌리를 내리려면 엄마가 먼저 행복해야 하지 않을까?

엄마를 웃게 하고 꿈꾸게 하는 보통 엄마들의 소박한 이야기를 10회 연재로 담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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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여자들의 무협지, 출산 비화를 아시나요?

 

2005년 12월 17일 새벽 4시 30분. 아침 생방송을 위해 새벽길을 달렸다. 평일 아침에는 경인방송에서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고, 주말 아침에는 KBS 「세상의 아침」에 리포터로 출연하고 있었다. 당시 임신 9주 차. 특별히 조심해야 하는 시기였다.

생방송 스튜디오로 들어가기 전 화장실을 들렀는데 몸에 이상 신호가 느껴졌다. 빨간 피가 쏟아져 내린 것이다. ‘이걸 어떡하지?’라는 걱정과 두려움. 그렇지만 내 걱정에 매몰될 수만은 없다. 생방송 5분 전이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복도로 나갔다. 분장팀 막내의 운동화로 바꿔 신고, 생리대를 빌려 수습하고 급히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갔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방송을 펑크 낼 수는 없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보다 급한 것은 눈앞에 닥친 생방송이었다.

내 눈빛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는지, 옆자리의 출연자가 무슨 일이냐고 물으셨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대형 한방병원의 S 원장님이셨다. 광고가 나가는 사이, 나는 조용히 원장님께 말했다. “선생님, 제가 임신 9주 차인데요. 방금 하혈을 했어요. 그래서 급하게 수습하고 들어온 상태예요. 너무 무서워요.” 생방송 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동안 선생님은 맥을 짚더니 “맥이 두 개 뛰어요. 아직 태아의 맥박이 느껴지니 걱정하지 마세요” 하시며 나를 안심시켰다. 그렇게 방송을 마치고서, 사람들이 채 나오기도 전에 서둘러 방송국을 떠났다.

사실 바로 전날인 12월 16일은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아직은 임신 초기라 조심해야 할 시기에 예쁘게 차려입고, 구두를 신고, 큰아이까지 데리고 외식을 했던 게 혹시 무리였을까. 후회되는 마음에 나는 구두를 벗었다. 12월의 차가운 복도 바닥을 맨발로 걸었다. KBS 복도의 얼음장 같은 냉기가 발바닥을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얼마나 울었을까.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 온 세상의 시간이 멈춰버린 듯했다.

남편이 데리러 왔다. 병원으로 가기에는 너무 이른 시각이니 우선 큰아이가 있는 시댁으로 가자고 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신발도 벗지 못하고 현관에 주저앉아 울었다. 너무 무섭고 두려웠다. ‘아이가 잘못되면….’ 시어머니께서는 “미역국 끓여놨다. 먹고 병원에 가자. 아이가 인연이라면 어떻게든 태어날 거고, 인연이 아니면 아무리 애써봐야 안 되는 거니까 울지 마라”라고 하신다. 평소에도 이성적이고 현명한 분이라는 건 알았지만,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슬픈 순간에서도 냉정한 이성을 잃지 않으시다니, 한편으로는 매몰차게 느껴졌다.

병원에 갔다. 토요일 오전의 많은 예약 산모들을 제치고 응급으로 진료실에 들어갔다. (사실 두 언니와 나는 병원에서도 신경 쓰던 골칫덩어리 산모들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큰언니는 임신 초기 하혈로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실려 온 적도 있고, 작은언니는 유산기가 있어 임신 7개월까지 방 안에서 요강을 끼고 살던 원시인이었다. 21세기에 요강이라니. 그런 세 자매의 막내인 나 역시 동현이를 임신했을 때 피까지 토해내는 입덧으로 유난을 떨다가 28주 차에는 진통이 일찍 찾아와 조산 위험으로 두 달 넘게 입원했다. 병원에서는 골치 아픈 황씨 세 자매로 유명했다.) 잘 버틴다 싶던 임신부가 응급으로 들어오니 담당 의사 두 분이 같이 진료를 하셨다. 진단 결과 이미 태반의 40% 이상이 떨어져나가서 아이를 지탱하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만에 하나를 대비해 남편은 수술 동의서에 사인했다. 나는 버티는 데까지 버티겠다고 독하게 마음먹고 그날부터 병원 생활을 했다. 한 생명을 살리겠다는 강력한 마음이 생겼다.

생방송을 모두 끝내고 얘기를 전해 들은 팀장님이 전화하셨다. 주조정실에서 화면을 보면서도 전혀 몰랐다고 했다. PD님은 미안하다고 했지만, 생방송 중에 사실을 알았다 한들 달리 방법이 있었을까? 아마 방송을 하지 않고 그냥 돌아왔다면 지금까지 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오랜 병원 생활을 하며 다행히 안정을 찾았다. 처음에는 태반의 40%가 떨어져나갔지만, 자궁이 점차 커지면서 떨어져나간 태반의 비율이 줄어든 것이다. 다행이다. 천만다행이다. 물론 퇴원하고 얼마 안 있어 임신 중 대상 포진으로 다시 입원하게 되었지만 끝내 무사히 둘째 석현이를 출산했다. 지금도 난 석현이를 끔찍이 아낀다. 시댁에서는 ‘잃을 뻔했던 아이라 더 각별한 거지’라고 하시지만, 나에게는 존재의 의미가 다르다.

남자들의 군대 이야기처럼 여자들의 출산기도 역시 하나하나 대서사시다. 난 아이가 셋이니 무협지 세 편을 써낸 것이나 다름없다. 단, 나에게만 특별한 출산 무협지. 이쯤에서 끝내야겠다.

필자소개

황순유 

경인방송 FM90.7mhz ‘황순유의 해피타임907’ DJ 

KAA(한국아나운서아카데미) 강사

더 퓨어 컴퍼니 대표, 20년 경력의 프리랜서 진행자.

저서)황순유(2018),《77년생 엄마 황순유》, 도서출판씽크스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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