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웹소설]여자 넷은 너무 많아 <3화>
[웹소설]여자 넷은 너무 많아 <3화>
  • 이벼리
    이벼리
  • 승인 2016.12.26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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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여대 작가 양성 프로젝트

이벼리

4. 불가능성의 가능성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에게는 진작 폐경이 왔지만, 이모는 그 나이까지 꾸준히 생리를 했다고 했다. 같은 집에 살고 있었지만 이모가 생리를 하는 지 안 하는지 모를 정도로 이모는 깔끔하고 완벽했다. 사랑의 영역을 제외하고서는 뭐든 똑 부러지는 이모였다.

임신을 확인하고서도 그랬다. 그날부로 육아카드를 신청하고 산부인과를 다녀왔으며 남자친구에게 알리는 일까지 마무리 지었던 것이다. 이모의 남자친구는 임신에 회의적이었다고 했다. 이모보다는 어리긴 했지만 역시나 적지 않은 나이였고 또 그 나이 먹고 주위 눈치 봐가며 새장가를 들고 싶진 않았던 것이다. 이모는 아니었다. 이모는 진지했다.

“민주야. 이모는. 너도 알지? 이모가 사랑이 많잖아. 그래서 많이 사랑했었어.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만나보기도 하고, 끝내주는 사랑을 해보기도 하고. 주기만도 해보고, 받기만도 해 봤어. 지금도 여전히 우리 경숙이랑 민주 아주 많이 사랑하고. 이모가 민주한테 어떻게 보일지는 잘 모르겠어. 비록 실수로 들어선 아이고, 이모는 남편도 없고, 결혼할 생각도 없으니까. 근데 있잖아 민주야. 이모는 아이 낳고 싶어. 벌써 얘랑 사랑에 빠진 것 같아. 이모 이해해주라. 응? 그래 줄 수 있지?”

아이 소식을 듣고 허둥댄 것은 오히려 엄마 쪽이었다. 이지적이고 냉철한 인간인 줄 알았던 엄마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을 바꿨다.

“지금 우리끼리 살기에도 팍팍해.”

냄비를 홀랑 다 태워 먹고는 인터넷으로 새 냄비를 검색하던 엄마가 문득 진지해진 얼굴로 말했다.

“요즘 아기 옷들 진짜 귀여운 거 많더라.”

빨래를 개던 엄마가 섬유유연제 냄새에 취했는지 갑자기 꿈을 꾸는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네 이모는 왜 그렇게 이기적일까. 지금까지 결혼은 왜 안 한 거라니.”

문지방에 발가락을 부딪친 엄마가 이모에게로 분노의 화살을 돌렸다.

“엄마가 인터넷에서 봤는데, 그 나이에 임신한 거 기적이라고 하더라. 낳으라고 들어선 거래.”

집 가는 골목마저 헷갈린 엄마가 걸음을 멈추더니 말했다. 그리고 이 모든 문장의 끝은 나를 향해있었다. 정신을 놓고 한없이 생각에 빠진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날 빤히 쳐다보며 말했던 것이다. 이모는 그렇다 치더라도 엄마마저 내게 선택을 떠넘긴 기분이었다. 엄마는 이모를 견뎌내는 기분일까. 내가 오렌지색 언덕길을 견뎌내는 것처럼?

5. 선 밟기

난 그냥 동네를 걸었다. 동네엔 노인도 많고 언덕도 많았다. 이사 온 후 매일 같이 삼단 언덕을 오르내리느라 다른 곳에 눈길을 줄 여력이 없었는데 나름 괜찮은 공간이 많았다. 여기저기 갈라지고, 부서지고, 낡고, 부패한 곳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 건 썩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은 홍제동 자체가 거의 골목으로 이루어진 공간이라는 점이었다.

이전에 살던 동네는 아파트촌으로 이루어진 마을이었다. 아파트 몇 동이 하나로 모여 단지가 되었다. 단지는 다시 동의 단위가 되었고, 결국 하나의 동이 하나의 단위로 인식되었다. 그러한 면(面)적인 공간은 안정감을 주었지만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되어주진 않았다.

그러나 홍제동은 달랐다. 홍제동은 하나의 집합적인 구역이 아닌 그저 길과 길의 만남으로 느껴졌다. 걷다 보면 길은 길로 연결되었고 그 길 주위에 사람이 모인 듯한 기분이었다. 자글자글한 잔주름 같은 선들의 집합체였다.

비탈진 선들의 만남은 새로운 재미를 낳기도 했다. 단순히 평지를 걷는 즐거움이 아닌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함으로써 창출되는 리듬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이 많아져 틈 만나면 밖으로 나갔던 건데 막상 나가면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홍제동의 골목길은 지극히 일상적이면서도 비일상이 반복되는 장소였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반복했고 매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고양이를 마주치기도 했다. 전혀 새로운 골목으로 들어갔다가 익숙한 길로 나오기도 했고, 분명 아까 마주쳤던 할머니를 꽤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시 마주치기도 했다.

골목골목이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하나의 공간을 완성해낸 길을 따라 걷는 것은 불규칙적인 삶의 연장선을 따라 걷는 것 같았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말이다. 그런 것이 존재한다면 김정숙, 김경숙, 이민주 우리 세 가족과 홍제동은 어느 정도 맞닿아 있는 건 아닐까?

난 이모에게 전화를 걸었다.

6. 여자 넷은 너무 많아

아직 이모의 배는 눈에 띌 만큼 커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 존재감만은 확실했다. 조그만 수정체일 뿐이었던 어떤 것은 자신이 여기 있음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엄마는 아직 회의적이었다. 그럼에도 이모는 긍정적이었다. 병원에서는 노산이기 때문에 주의하라고 당부했지만 이모의 밝음은 끝이 없었다.

이모의 남자친구는 마음을 바꿔 같이 살 날을 슬며시 기대하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엄마와 나는 이모를 놔 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이모가 가장 확고한 것 같았다.

여자만 셋이던 오렌지빛 언덕 위 201호는 이제 여자만 넷이 되었다. 비록 그중 하나는 물 속을 헤엄치는 중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자 셋도 많았는데 이젠 여자 넷이 되었다. 노가리, 오렌지빛 언덕길, 땀, 가쁜 숨소리, 약간의 경계심과 초조함, 산바람, 새 집, 쎄멘, 정사각형, 옹벽이었던 홍제동엔 이제 여자 하나가 추가 되었다. 여자 셋은 많았지만 여자 넷은 너무 많다. 그리고 여자 셋은 좋았지만 여자 넷은 아주 좋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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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신여대 소설창작론 ‘작가의 탄생’팀은 미래의 예비 작가 양성을 위해 “나 혼자 쓴다 – 웹소설 1억 만들기” 프로젝트를 시작합니다.
지금은 웹소설 시대, 신춘문예의 계절 12월에 원고지대신 키보드를 두드립니다.
이번 테마는 ‘서울’. 서울이란 공간을 모티브로 서울에 사는 젊은이들의 삶과 사랑 그리고 희망을 쓰겠습니다.


-작가 이벼리 -

초여름에 태어났다. 누군가에게 읽힐만한, 누군가 읽고 싶어할만한 글을 쓰고 싶다. 하고 싶은 일을 통해 밥 벌어먹고 사는 것이 목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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