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 맥락화의 의미생성 체계
탈 맥락화의 의미생성 체계
  • 김석원
  • 승인 2013.09.13 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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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스투데이=중소기업&소상공인 전문지] 뮤지엄과 사진의 주체적 관계

● 뮤지엄(Museum)이란 용어는 세계최초의 박물관으로 불리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에 창설된 Museion을 그 어원으로 하고 있다. Museion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문화예술의 신인 Muse를 경배하기 위해서 신전으로서 기증물과 상납물이 모아져서 박물관 수집품의 기원이 되었으며, 문학 및 예술을 배우고 전파하는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국제 박물관혐의회 초대회장 조르주 앙리 리비에르는 ‘미술관/박물관’의 정의를 “지식을 증대시키며 문화의 발전을 목적으로 인류의 대표적 유산을 수집, 보존, 전시를 하는 사회적 기관”으로 정의한다. 미술관의 사전적 정의는 미술 박물관의 약칭으로 회화, 조소, 공예품등의 문화유산을 수집하고 감상, 계몽, 연구를 위하여 전시하는 기관으로 되어있다.

결국 미술관은 미술에 관계된 여러 유물들을 수집하는 전문박물관의 하나로 넓게는 박물관의 범주에 포함된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미술관은 예술가와 대중사이에서 미술의 여러 가지 다양한 현상들을 예술적, 역사적으로 체계화하고 분류해서 그들의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미술을 대중들에게 알기 쉽게 전달하기란 쉽지 않다.

미술관은 전시의 목적뿐만 아니라, 미술작품을 감상하는 관람자의 문화적 활동이 가지고 있는 다양성을 작가의 입장에서 알리는 곳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미술관은 다양한 여가활동과 휴식공간의 역할도 하고 있으며, 사회교육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도 병행한다. 도미니끄 뿔로의 저서 <미술관과 미술관론>에서는 유럽인구의 삼분의 일은 미술관, 갤러리를 자주 접하지만, 나머지삼분의 일은 태어나서 한 번도 미술관, 갤러리를 가본 경험이 없다고 한다. 이런 사례는 유럽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며, 한국의 경우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미술관의 경직된 분위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몇 년 동안 미술관외의 공간에서 작가들이 대중들과 가깝게 소통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다. 하지만, 작가들이 극복해야할 미술관의 벽은 허물어지지 않았고, 그 벽을 허물려는 직접적이며 충격적인 시도는 미미했다. 작가들은 문화 권력의 상징인 미술관을 넘어서 많은 사람에게 자신의 작품 활동을 선보일 수 있는 기회를 얻고자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쉽지않다.
김소희의 <Frame, Frame>은 예술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뮤지엄과 관련된 주제를 제 해석하고 탐구하는 작가들의 작업세계에 관심을 가지고 전시를 기획한다.

또한, 전시재목에서 언급하는 Frame은 일반적으로 사진과 영화에서 언급하는 이미지, 틀, 테두리, 구도의 다양한 의미로 사용되는 용어이며, <Frame, Frame>은 작품들의 개념과 시각적인 형식에서 이중성과 반복성을 상징하는 의미로 만들어진 제목이다. 김소희는 전시를 크게 두 가지로 구성한다. 첫 번째는 사진(술)효과 (Photography Effect)라는 제목으로 박천욱, 안성석, 이명호, 이민호로 구성하고, 두 번째는 미술관 효과(Museum Effect) 양연화, 윤정미, 이단, 이은종 으로 구성해서 총 참여 작가는 8명이다.

<Frame, Frame>의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동덕아트갤러리는 인사동 입구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시장의 지하에는 총 2개의 전시실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1층의 190평에 이르는 비교적 넓은 전시공간이다. 전시장의 디스플레이 방식에서는 가벽을 사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전시장의 공간이 눈에 들어온다. 우선 가벽을 사용하게 되면 작가들의 개별화된 개인적인 공간이 생기며, 좁은 공간을 넓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가벽을 사용하지 않으면 시야가 넓게 확보된다는 장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가벽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에는 각 세션별로 한 가지의 주제를 다양한 작품으로 전개하기 때문에 전시의 주제를 파악하기에 유리하다. 또한, 가벽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개별적인 작가의 작품수가 많지 않고, 벽면이 너무 넓고 크기 때문에 가벽을 사용하면 시각적으로 답답하게 보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김소희는 <Frame, Frame>을 전시하기 전부터 관객과의 소통을 위해서 <포토넷> 잡지의 지면을 통해서 앞으로 진행될 전시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과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한바 있다. 전시장은 일반적인 화이트 큐브를 지향하는 공간이며, 전체적으로 조명이 다소 밝은 톤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소희의 <Frame, Frame> 전시동기는 “앙드레 말로 의 저서 <상상의 박물관>에서 그가 주목하고 있는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성을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을 통해 다시 점검해보고자 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사진의 등장으로 인하여 모든 예술작품들이 시 공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었고 사진 이미지들은 나란히 비교됨에 따라 이것을 통해서 양식을 추출해낼 수 있었다. 말로는 이 과정에서 모든 오브제가 예술화되는 시뮬라크르(simulacre)의 과정을 겪게 된다고 보면서 이러한 예술의 보편성을 확인할 수 있는 곳을 바로 박물관 Museum 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사진이라는 매체의 본성을 인지하면서 뮤지엄(Museum) 이라는 매개공간을 관련주제로 작업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업을 재해석해 보고자 한다.”고 얘기한다. 김소희는 이 전시를 통해서 작가의 작품이 생성하는 맥락을 제시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각 작가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주제의식과 방법론적으로 연결되는 두 가지 세션으로 전시한다. 첫 번째, 사진(술)효과에서는 사진매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적인 상황에 주목한다. 이를테면, 사진의 재현력은 기계적인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기록된 순간만 부각되고 전후의 사정을 알기 힘들다. 물론 ‘포토스토리’의 형식을 빌려서 그 당시의 상황을 전개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사진가의 시각에 따라서 상황이 다르게 인식되고, 모든 과정을 전부 기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포토스토리’의 형식이 아니라 한 장의 사진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찍은 사진에서 대표적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전 후의 맥락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점검을 해야 한다. 즉, 사진의 기록성, 지시성, 복제성을 인식하고 ‘매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재확인하고자 한 것이다. 두 번째, 미술관 효과는 뮤지엄(Museum)이 지닌 다양한 의미들, 권력구조, 예술가와 관객 그리고 상호소통에 관한문제, 장소가 가지고 있는 특성 등 다양한 담론에 주목한다. 그런 의미에서 뮤지엄은 다양한 맥락으로 재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김소희는 뮤지엄을 개념적으로 인식하고 미술관의 제도권안과 밖에서 작용하는 다양한 시선이 개입된 작품들을 사진 적으로 구현된 작품으로 구성하고자 하였다. 결국, 사진(술)효과와 미술관 효과의 공통점으로 작용하는 것은 대상 혹은 예술작품이 원래 소유되고 사용된 맥락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의미를 생성한다는 부분에 주안점을 둔다. 그것은 작품의 고유한 의미의 해체, 장소이탈의 성격, 공간적 특성, 탈 맥락화등 다양한 담론을 형성하게 하는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안성석, historic present, 2009

♯1. 안성석 -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는 몽타주

전시장지하의 오른쪽 공간은 ‘사진(술)효과 (Photography Effect)’로 구성되어 있고 왼쪽은 ‘미술관 효과(Museum Effect)’로 구성되었다. <Frame, Frame>에 출품한 8명의 작가 중에서 안성석의「historic present」시리즈와 양연화의 <예술가의 작업실>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한다. 안성석의 <historic present>사진작업에 대해서 작가는 “사진의 본질에 대한 연구와 변화하는 공간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고자 했다. 이 시리즈는 역사 속 과거와 현재의 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쉼 없이 변화하는 이 거대 도시에서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간절한 답을 얻고 싶었다. 현재 이 땅의 공간에 존재하는 모습과 콘크리트가 덮이기 전 과거의 모습을 동시에 바라보며 시대의 흐름이 만든 많은 감정들과 의식의 변화를 전달하고 싶었다.” 고 얘기한다.

안성석 작가의 말처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시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들추어내서 다시 현실의 실재와 대입시킨다. 이러한 행위는 두 개의 시간대를 한 군데로 합치는 행위로 인식된다. 안성석의 <historic present> 작업은 2009년도 SeMA 프로그램에 선정된 것으로 <조선고적도보: 朝鮮古蹟圖譜: 일제가 우리의 문화유산을 관리하기 위해서 만든 자료>와, 혹은 어른들이 소장하고 있었던 옛날 사진과 미군들이 소장했던 자료들에서 찾아 낸 역사적 유적지들의 흑백 사진을 현존하는 문화재에 병치되도록 스크린을 설치하고 과거의 사진 이미지를 투사한 다음 작가 자신이 함께 촬영한다.

즉, 남대문, 첨성대, 팔달문, 광화문, 숭례문, 경성역과 같은 문화유산 앞에 스크린을 설치한 다음에 각도를 정확하게 맞추어서 현실의 풍경과 역사 속에 있는 사진 이미지가 겹쳐지게 찍어 동질성을 확보한다. 안성석의 <historic present>를 자세히 살펴보자. 첫 번째, 현재와 과거를 동시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 차용한 것은 컬러와 흑백, 과거와 현재의 대비로 병치된 사진들에서 과거에 존재 했던 사실이 작가의 모습이 함께 등장하면서 현재성을 부여 받는다. 여기에서 작가의 존재는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된다. 그것은 과거의 흔적과 현재의 모습을 증명해주는 ‘역사적 증인’으로서 그 효력이 발생한다. 또한, 작가가 현장에 분명히 있었다는 ‘노동의 증거’로 작용한다.

두 번째, 아카이브적인 개인의 기념사진이 삼각대 스크린에 투영된 순간 현재의 모습과 절묘하게 맞춰진 몽타주의 효과가 두드러진다. <historic present>에서 스크린의 검은 틀을 사용한 이유에 대해서 작가의 말을 빌리면 “ 검은색 프레임은 과거와 현재를 분류 시키는 기능을 한다” 고 언급한다. 작가의 말처럼 이런 방법은 적합한 것으로 느껴지긴 하지만 지나치게 작위적인 느낌이 든다.

즉, 의도가 너무 분명하기 때문에 그 의도 너머에 상상할 수 있는 의미와 실체를 전달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형식적으로는 컬러와 흑백 사진의 대비를 통해서 연속되는 장소에서 분리되는 시간의 차이에서 새로운 완결성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스크린은 실재풍경의 일부분을 가리거나 실물의 왼쪽, 오른쪽, 아랫부분을 합치며 실재로 대상이 없는 실체를 과거의 사진이 대처하기도 한다. 또한, 대부분의 사진들은 현재 남아있는 문화재를 밤에 촬영한 것들이다.

이런 방법은 스크린 효과를 증폭시키고, 인적이 드문 밤에 이루어졌다. 밤거리의 도시풍경에서는 작가, 스크린, 문화유산만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안성석은 “변화되는 이 도시 속 우리의 정체성에 대한 질문에 간절한 답을 얻기 위해 지금껏 이 땅위에 존재했던 사람들과 콘크리트가 덮이기 전 과거의 땅의 모습을 보며 시대의 흐름으로 인하여 생겨난 많은 감정들과 의식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곧 “나는 어떤 것들에 의해 사로잡혀 있는가?” 와 같다. 한마디로 규정할 수는 없겠지만 나아가는 작업의 과정들을 통해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자 한다.“ 작가노트에서 밝혔지만, 역사에 기록된 과거의 모습과 현재를 병치시킴으로서 자신이 현재 처하고 있는 존재론적 정체성을 찾고자하는 시도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의식은 나의 정체성을 확립한다는 문제라기보다는 우리민족의 정체성에 더 가깝다고 생각한다. 나의 정체성을 찾으려면 오히려 자신의 가족사에 대한 발자취를 더듬어서 과거와 현재를 융합시키는 시도가 오히려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1.양연화 - 예술가의 위치는 무엇인가?

데카르트(Rene Descartes)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그는 방법론적인 회의라는 철학적인 사고를 통해서 절대적으로 확실성을 가지고 있는 진리를 믿으려고 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지만, 의심의 주체인 자신에 대한 존재 자체를 부정 할 수 없었다. 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서 진리를 발견하고, 나는 존재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즉, 인간의 본질은 물리적인 신체가 아니라 사유하는 신체라는 것을 밝혀 낸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미술에서 왜 지금 이런 얘기를 다시 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러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 혹시 구태의연한 발상은 아닌가? 하지만, 나라는 존재에 대한 사유는 과거, 현재, 미래에 있어서 자유로울 수 없고, 유행을 따라가는 이즘과는 별개의 문제다. 철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신에게 집중된 관점을 인간 혹은 '나'라는 존재의 사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나라는 주체가 확립이 되었다면 그 다음은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에 있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는 ‘자신을 믿는 순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알게 된다’고 얘기를 한다. 단순하게 ‘의식주’를 위해서 살아가야 하는 현실의 논리를 따를 것인가? 하지만, 다큐멘터리 아마존의 눈물에서 본 것처럼 현대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에 있어서 그들만큼 처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인간이 살고 있는 여러 가지 환경적인 문제와 사회적인 요건을 고려한다면 이러한 단순 비교가 무의미 할 수 있다. 이처럼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에 대한 문제는 단순한 영역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기억되는 철학자의 말처럼 나 자신을 믿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한 믿음에서 출발할 때 좀 더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안성석, historic present, 2009

그렇다면, 예술가의 경우는 어떠한가? 예술가들은 철학적, 미학적 사고에 관련된 논쟁을 벗어나서 오랫동안 명상을 통해서 대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표현하고, 작품을 생산한다. 그런 행위는 예술의 모든 장르를 막론하고 똑같이 적용되며, 작가는 창조적인 행위를 거치면서 스스로 작품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탐구하는 것이다. 문제는 무엇을,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 것인가에 있다. 작가들이 자신의 고유한 시각을 통해서 인식되는 사회적 현상, 내면적인 문제를 어떤 해석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달하려는 것일까? 양연화는 ‘예술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한다. 현대사회에서 예술로서 유통되는 것은 작품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예술가의 작품을 다양한 방법으로 차용한다.

이런 현상을 부추기는 것은 미디어가 담당한다. 또한, 대중들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이미지는 판타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드라마에서 자유 분망하고 자신의 생각을 당돌하게 표현하는 사람의 직업군으로 예술가들 이 등장하거나, 예술가의 스페셜 코너에서는 작가의 작품세계와 그 외에 얽혀 있는 야사, 개인적인 사생활, 정신세계를 다루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의 경우는 살아생전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얘기가 대부분 이다. 대중들은 예술가들의 삶이 녹녹치 않고, 힘든 시절을 많이 겪는 그들이 스스로 고통스럽게 사는 것을 자처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예술가들의 삶은 극단적으로 인식된다. 양연화는 이러한 예술가의 고정된 이미지들에 대한 의문을 제시하고 우리가 아는 예술이란 결국 제도권에서 만들어진 사회적인 통념이라는 것을 얘기한다. 양연화는 예술가의 고정된 이미지의 베일을 벗기는데 비교적 성공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다음에 논의를 해야 할 부분이 빠진 것 같다. 이를테면 예술가의 위치가 평범한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생각하는 예술가의 위치는 이렇다는 확고한 정의가 없다.

양연화는 <예술가의 작업실>2006년 작품에서는 작가자신이 붓으로 새를 그리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것은 예술가는 손을 통해서 새롭게 세상을 만드는 창조주의 입장이 드러난다. 이것은 정확하게 언급하면 ‘예술가의 역할’ 에 관한 것이지 ‘예술가의 위치’는 아니다. 만약 양연화가 이 부분에서 예술가의 위치라고 생각했다면, 모든 작품에 ‘예술가의 위치’가 드러나야 하지 않을까? ‘예술가의 위치’에 대한 정의는 예술가의 사전적인 정의와 사뭇 다르며, 그렇다고 논리적인 바탕위에 정의를 내려야 할 필요는 없지만, 예술가에 대한 자신만의 창조적인 정의가 필요하다. 양연화가 <예술가의 작업실>을 앞으로 계속 진행시키려면 작가 나름대로 예술가의 정의를 확고하게 확립시킬 필요가 분명히 있다.

♯2. <예술가의 작업실>에 작가의 몸이 등장하는 이유?

양연화는 <예술가의 작업실>2006년의 초기 작업에서는 본인이 등장하거나, 다른 모델이 들어간다. 이러한 이유에 대해서 작가는 “자신이 그림에 등장하는 것은 나를 포함해서 여러 사람들의 얘기를 대변 한다”고 언급한다. 예술가의 몸이 자신의 작품에 등장하는 경우는 무수히 많다. 국내외 작가들을 열거하자면, 신디셔면(Cindy sherman), 마리나 아브라모빅(Marina Abramovic), 니키리(nikki s.lee), 이윰, 김미루 등이다. 예술가 자신의 몸이 작품에 등장하게 되면 작품의 질적인 수준과 관계없이 보여주는 부분에 집중하게 되고, 자칫하면 젠더링(gendering: 남, 녀의 사회적 성을 구분하는 행위)의 특성이 부각되기도 한다. 즉, 부정적인 측면에서는 작품을 창의적으로 제작하기 힘들어서 단순하게 자신의 신체를 벗는 퍼포먼스로 인식하거나, 여성성을 매개로해서 상품화하는 행위로 보여주는 측면이 있다.

양연화는 “자신은 자아(ego)가 강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몸을 보여주는 것에 대해서는 별 의미가 없다. 관객이 각자 알아서 판단해주기 바란다.” 고 얘기한다. 물론, 어떤 작품을 보고 판단하는 것은 관람자의 몫이다. 똑 같은 작품을 감상할 때, 보는 사람마다 반응은 다르게 나타난다. 예술적인 감흥을 받았다고 극찬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와는 정반대로 무관심한 반응을 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어떤 작품을 해석 할 때는 그 사람의 지적인 수준과 작품에 관한 안목이 중요한 요인을 차지한다. 아무리 좋은 작품이라도 관람자가 이해하지 못하면 헛수고에 불 과한다. 작품의 관람 방법을 몸 철학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작품의 좋고 나쁨의 차이는 작품을 바라보는 관람객이 스스로의 몸 상태를 기준으로 작품의 가치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관람자의 몸 상태가 좋으면 작품이 좋게 판단되고, 몸 상태가 나쁘면 작품도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견은 존 버거(John berger)가 언급한 관객의 사고와 지적인 능력에 따라서 작품을 판단한다는 기준과 몸 철학의 기준이 서로 상반되는 지점이다. 그렇다면 두 가지 의견에도 불구하고 사진작품이 감상하는 사람마다 다르게 보이는 근본적인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의미론의 관점에서 볼 때, 작품은 독특한 매체적 성격을 가진다. 회화 작품과 문자를 비교해보면 문자의 경우 문법에 의해서 비교적 한 가지 의미를 전달하지만, 작품의 경우 관람자의 해석에 따라서 여러 가지의 의미를 갖는다. 해석을 한다는 점에 있어서 문자는 의미가 이미 존재해 있고 우리는 그 의미를 읽는다면, 작품은 그 대상의 형태에서 발생하는 ‘무정형(無定型:일정한 틀이 없다)’적 특성 때문에 관람자가 자신의 나름대로 의미를 조성하는 측면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관람자의 숫자만큼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결국, 작품을 감상하는 판단의 기준은 처음의 질문처럼 자신의 문제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작품의 해석을 관객이 개별적으로 한다고 해도, 자신의 몸이 작품에 왜 들어갔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이유가 필요하다. 양연화의 언급처럼 자신과 타인을 대변한다는 말로는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신디셔면과 니키리의 경우는 자신의 몸이 작품에 들어간 이유에 대한 논란은 적어도 없다. 그 이유는 작가의 몸을 바라보기 이전에 작품의 내용(사회적, 문화적)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양연화의 <예술가의 작업실>은 어떤가? 작품의 내용이 풍부하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신디셔면과 니키리처럼 예술가의 몸을 바라보기 이전에 내용에 대해서 깊이 있게 사색하는 기회를 관객에게 제공하는가? 관객이 작품을 개인적으로 판단하는 부분은 차치 하더라도, 작가는 관객에게 자신의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 분명한 메시지가 없을 경우에는 차라리 자신의 몸을 보여주지 않는 편이 낳다. 양연화는 <예술가의 작업실>을 2006년부터 꾸준하게 진행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형식적인 부분 외에 내용적인 측면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고, 연구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된다.

* 본 글은 서울문화재단의 ‘예술평론 활성화 지원사업’을 통해 선정, 지원하는 평론가가 6월 현장작품을 대상으로 작성한 평론입니다.

글: 김석원(시각예술 평론가)
중앙대학교 사진학과 및 동 대학원 졸업. 동국대학교 영상대학원 영화영상학과 박사과정수료(2006),숭실대학교 미디어학과 박사(2011),<영화가 사랑한 사진,2005>외 다수의 책과 논문을 발표했다. 현재 서울문화재단 시각예술 평론가로 활동 중이며, 대학교에서 강의와 전시기획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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